“역시 강 실장 소문이 허언은 아니었군.”'“과찬이십니다.”'“이대로 진행하게, 아주 마음에 드는군.”'“실망하시는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나이 지긋한 노 사장의 얼굴 위로 한껏 고조된 만족감이 비쳤다. '“그럼 종종 봄세.”'노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악수를 청했다.'“또 뵙겠습니다.”'배웅을 마치고 돌아선 태웅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긴장이 풀린 입매가 보기 좋게 휘자 경직됐던 눈초리와 안면 근육들도 여유롭게 풀렸다. 웃음에 인색한 그로서는 아주 만족했을 때만 짓는 표정이다. '평소 같으면 눈앞에 잔뜩 어질러진 회의 테이블에 인상을 구겼을 테지만, 짧은 순간 정도는 즐겨 줘도 될 듯싶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노 사장에게서 마음에 든다는 말과 함께 신축 사옥 공사를 따냈으니 말이다. '출판 업계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서 출판 공명孔明.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도 제목만 대면 알만한 베스트셀러들 중 삼분의 일이 공명의 작품들이다. 경제적으로 탄탄하다는 소문이 난 것도 있지만, 노 사장 자체가 1인 기업이나 다름없는 거물이었다. 현재 강남 한복판에서 제법 큰 규모의 건물을 5개 층이나 사용하고 있지만 노 사장의 뜻은 그보다 더 큰 곳을 향해 있었다. 도심 외곽에 거대한 성城을 지어 출판계에 탄탄히 입지를 굳히겠다는 야심찬 계획의 시초가 바로 이번 공사였다.'괜찮은 먹잇감에는 으레 여러 포식자가 달라붙기 마련이다. 이 공사에도 국내 손꼽히는 건축사들이 거의 달라붙었으나 깐깐한 노 사장을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건축사마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브리핑이 치열하게 이어졌고 노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로비도 심심치 않게 따랐지만, 결국 행운의 여신은 태웅이 몸담은 공간 건축의 손을 들어주었다. '태웅은 건축업계에서 최고가 된 기분을 만끽하며 흥분된 손길로 빠르게 자료를 추렸다.'“제대로 한턱 쏴주지.”'기분 좋은 중얼거림이 유리벽 너머의 민주호에게 향했다. 승자의 기쁨을 맛보게 해 줬으니 오늘만큼은 징징거려도 애교로 받아 주리라. 태웅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회의실을 나섰다. '사무실 문을 열자 근처 몇몇 직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태웅은 모른 척 무시하며 미팅 룸 근처 편집장 명패가 놓인 자리로 향했다. 절친한 친구이자 편집장인 주호는 낮은 파티션으로 분리해 놓은 미팅 룸에서 태웅이 브리핑 전부터 얘기 중이던 여자와 아직도 실랑이 중이었다. '“합시다.”'“여태 해왔잖아요.”'“매번 번거롭잖아요.”'“전혀 안 번거로워요.”'“달라지는 것도 없어요.”'“그러니까요.”'“집에서 더 가까워져 나올 필요도 없다니까요. 그냥 하던 그대로…….”'“그러니까 필요할 때 부르세요.”'“그럼 당장 결정 안 해도 되니까 생각해 봐요.”'“한두 해 겪어 보셨어요? 누구 담당, 어디 소속, 저 이런 거 질색이잖아요.”'“그러니까 생각이라도 좀 해 봐요, 알았죠?”'“아, 몰라요.”'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낚아채 미팅 룸을 나섰다. 주호의 자리에 앉아 있던 태웅은 여자와 동시에 일어서 미팅 룸을 향했다.'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그리고 멈춤. 태웅의 발이 멈춤과 동시에 여자의 발도 움직임을 멈췄다. 나가려는 여자와 태웅의 움직임이 거울 놀이처럼 계속 일치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같이. '여자는 미간을 구긴 채 태웅을 노려보았다. ‘너 뭐야? 빨리 안 비켜!’라는 눈빛으로. '태웅은 무심한 눈길로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옅은 화장기에 비해 또렷한 눈매, 적당한 콧대 아래로 얇지만 선명하게 반짝이는 입술이 탐스러운 체리 같았다. 갸름한 얼굴 때문인지 매끄러운 목선이 돋보이는 여자는 감탄이 나올 만큼 빼어나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는 순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몇 살이나 됐을까?’'호기심이 일어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여자가 눈싸움이라도 하듯 빤히 쳐다본다. 잔뜩 치켜뜬 눈썹과 거침없는 눈빛 속에 만만치 않은 성깔이 녹아 있었다. '태웅은 피식 속웃음을 삼키며 왼쪽으로 비켜섰다. 이번에도 엇박자로 그녀의 몸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거듭된 우연에 경직됐던 태웅의 어깨가 스르륵 풀렸다. '“작업입니까?”'“뭐요?”'“이런 작업 별론데.”'“허!”'“아님 말고.”'“……흥.”'쌩하니 비켜가는 여자의 표정 속에 ‘재수 없어, 별꼴이야.’라는 투덜거림이 녹아 있는 듯했다.'“……아님 마는 거지.”'태웅은 멀어지는 여자의 여운을 느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무슨 작업을 그렇게 후지게 해?”'미팅 룸으로 들어서자 주호가 흥미로운 듯 태웅을 바라본다.'“작업은 무슨.”'“그럼, 내가 비굴해 보여서 복수해 준 거냐?”'“그건 알아서 해석하고. 누구야?”'“혹시라도 관심이 생겼다면 얼른 접어라.” '태웅이 턱으로 출입문을 가리키며 묻자 주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파일을 펼치며 대꾸했다. '“유부녀야?”'“어딜 봐서.”'“그럼 네가 작업 중?”'무언가를 끼적이던 주호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헛웃음을 지었다.'“차라리 커밍아웃을 하고 만다.”'“?”'“애교 없고, 발끈거리는 여자. 아무리 예뻐도 작업 안 한다고, 난.”'“덜 아쉬운가 보지.”'“아쉽긴, 세상의 반이 여자고만. 이 바닥에서 꽤 인정받는 번역가야. 영어, 일어, 불어, 중국어에 근래 몽골어까지 마스터 했다나? 번역 쪽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글로벌한 재원이라고 할 수 있지. 이번 참에 우리 회사로 끌어오려고 하는데 아무리 꼬여도 ‘넌 짖어라.’ 딱 그 반응이야. 위에서는 쪼고, 상대는 철옹성이고. 죽겠다, 아주.”'“생긴 거랑 다른가 보네.”'혼잣말처럼 뱉은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주호의 표정이 시답잖다는 듯 변했다. '“외모와 성격은 반비례하다, 몰라? 그렇게 따지면 너도 생긴 건 훌륭해. 성격이 까칠해…….”'“얼른 끝내, 저녁 살 테니까.”'“당연히 사야지, 벌어 갈 돈이 얼만데. 30분만 기다려.”'주호가 파일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태웅은 테이블 한쪽에 잘 접힌 신문을 끌어당겼다. 그때 무언가가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의자를 밀고 발밑을 훑자 왼쪽 구두 옆으로 엄지손톱 크기의 노란 것이 반짝거렸다.'“뭐지?”'뭉툭한 손으로는 잘 잡히지도 않는 것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색이나 모양으로 봐서는 아기용 돌 반지였으나 그냥 돌 반지라고 하기엔 한쪽에 달린 연결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달고 다니는 액세서리인가? 누구 거지?’ '반지를 손에 쥐고 주변을 둘러보자 몇몇 여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일이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다짜고짜 일어나 ‘이거 분실하신 분?’하고 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잠시 고민하던 태웅은 바지 주머니에 반지를 밀어 넣고 신문을 펼쳤다. 눈동자는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데 주머니 속 낯선 물건의 이질감 때문인지 내용은 요약되지 않았다.'‘혹시, 그 여자 건가?’ '시선이 머문 활자 위로 신경질 가득한 눈동자와 얼굴이 떠올랐다. '“누구 거든 무슨 상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