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현아!”'“그러자, 우리.”'“갑자기 왜?”'“태주 씨에겐 갑자기 일지 몰라도 난 아니야.”'“이러지 마.”'사정하듯 일그러지는 남자의 얼굴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유현은 찬찬한 목소리로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했다.'“그러는 게 좋겠어. 나 그럴 거야.”'태주의 낯빛은 더욱 참담해졌다.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유현의 눈빛이 너무나 낯설어서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유현이 아닌 다른 여자인 듯싶었다.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려 해도 그간 자그마한 낌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유현은 오늘도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고, 헤어질 내색 하나 없이 함께 식사를 했다.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마냥 우울한 타입도 아니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건조해서 그녀와 있을 때면 목구멍이 늘 맵싸한 느낌은 들었지만 간혹 내뱉는 유머에 그런 불만일랑 고스란히 사라져 버리고는 했었다.'태주는 유현을 사랑했고, 그녀 또한 그렇다고 믿었다. 이제껏 유현을 만나 행복했기에 유현 또한 그럴 거라고 안심했다. 그런데 그녀가 헤어지자고 한다. 밥 잘 먹고, 영화도 잘 보고, 자주 오던 커피숍에 앉아 서로 좋아하는 취향에 맞게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가슴이 먹먹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멀쩡히 손에 잘 쥐고 있던 소중한 것을 누군가가 무참하게 빼앗아 가버린 상실감이 태주의 가슴을 댕강 가르며 지나갔다. 이날 이때껏 유현과 헤어질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은연중 무언가를 잘못해서 섭섭한 마음에 헤어지자는 연인들의 흔한 협박 정도였으면 좋겠다. 정말 그런 거라면 좋겠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현은 그런 부류의 여자가 아니었다. 연애하면서 아주 안 싸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 해서 쉽게 헤어지자, 말자 내키는 대로 말을 내뱉는 가벼운 성격도 아니었기에 오늘 유현이 한 말은 그녀 말대로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으리라.'그것이 태주는 두려웠다.'“다시 한 번 생각해 주면 안 되겠니?”'침착하려 애쓰는 흔적이 역력했으나 떨리는 목소리만은 감출 수 없었다. 유현의 지나친 찹찹함에 숨통이 막혔지만 무작정 화를 내고 으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녀의 성격에 더 튕겨 나갈 게 분명하니까. 유현의 고집과 성격을 잘 아는 태주로서는 무조건 감정만 갖고 대처할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유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양 태주는 간절한 눈빛으로 유현에게 호소했다. 제발 한 번만 돌이켜 생각해 달라고, 네가 왜 이러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고.'태주의 시선을 비켜 눈길을 깔며 눈앞의 커피 잔을 한동안 응시하던 유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랑은 군것질과 같아. 맛있고, 재미도 있지. 하지만 결혼은…… 마주 앉아 정식으로 식사를 하는 것과 같아. 태주 씨와의 결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자꾸 빈 그릇을 앞에 둔 기분이 들더라. 어느 날 아, 이건 아니다 싶었지.”'“결혼에 겁을 먹은 거니? 아니면 시간을 더 가질까?”'그와 연애한 지가 일 년 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나이가 있으니 연애만 하고 말 상대는 아니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시작한 사이였고, 지향하는 바도 비슷해서 주위 사람들은 천생연분이라고까지 둘 사이를 인정했다.'태주는 간도, 쓸개도 모조리 빼줄 것 같은 다정다감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남자다웠고, 연애를 즐길 줄 아는 감각 정도는 지닌 사람이었다. 스타일도 멋있고 점잖았으며, 여자에 대해 고리타분한 선입견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또한 박식하고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과거에 유현은 저 정도의 남자면 괜찮겠다, 내심 생각했었다. 저 정도의 넉넉한 남자라면 자신의 모든 허물도 모조리 감춰줄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언제부터 마음이 버성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한쪽 마음이 늘 허전한 느낌. 그걸 처음 느꼈을 때 몰려오던 사랑에 대한 괴리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등골이 서늘할 정도의 쓸쓸함이 가슴 깊숙이 자리 잡더니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그날 이후 태주의 곁에 있으면서도 유현은 줄곧 외로웠고, 홀로 그와의 이별을 준비해 왔다. 아니, 굳이 준비라고 할 것까진 없었다. 새 시나리오 막바지 작업 때문에 바빴고, 사실은 그것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시기는 적당했다. 시나리오 때문에 내내 긴장하고 곤두서 있던 신경들이 일시에 허물어지면서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으니까. 그동안 밀린 청소를 하듯 가장 먼저 정리 대상이 된 것이 태주였다. 더불어 사랑까지.'“사랑은 이제 싫어.”'유현은 남의 이야기 하듯 빙긋 웃으며 말했고, 태주는 그 한마디로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그럼 먼저 일어날게. 미안해, 태주 씨. 아마…… 내 인생에 사랑은 태주 씨가 끝이 아닌가 싶어. 그래서 일부러 잊으려고 노력 같은 건 안 할래.”'“유현아…….”'“작별의 인사말도 안 하고 싶어. 혹, 나중에라도 길에서 마주치면 우습잖아. 실컷 작별 인사하고 또 만나면.”'태주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 말은 곧,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는 말과 같았으므로.'그녀가 떠난다. 사랑하는 유현이. 아름다운 유현이.'“사랑해, 유현아.”'“태주 씨.”'유현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내게도 네가 마지막 여자야. 모르겠니?”'“태주 씨 진짜 짝꿍이 들으면 섭섭하겠는데? 그래. 그래도 그런 말 듣고 헤어지니 나쁘진 않다.”'잔인한 유현이.'유현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주는 넋을 잃고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매달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은 그러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여기서 유현을 떠나보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예감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더 빠르게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젠 끝이다. 끝…… 이었다.'유현이 홀연히 떠나간 자리에서 태주는 버석버석 모래가 묻어나올 것 같은 건조한 얼굴을 두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멍할 뿐.'그 시각, 유현은 커피숍 앞의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가을이었고 약간은 스산한 느낌이 드는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어깨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가벼이 흩어놓았다. 마음이 개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복잡 미묘했다. 이별의 후유증인가?'피식 웃고는 숙였던 머리를 꼿꼿하게 들었다. 전방의 녹색 신호등이 반을 건너기도 전에 깜박깜박하며 예정된 시간이 다 했음을 알렸다. 그 길만 건너면 이별이 더 완벽하게 매듭지어질 것처럼 걸음을 빨리해 건널목을 마저 건넜다.'“으차!”'마지막 발을 인도로 올려놓으며 경쾌하게 외쳤다. 슬며시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젠 정말 끝이로구나, 하는 안도감에 유현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처럼 전율했다. 과거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고, 태주와의 이별은 곧 과거와의 절연(絶緣)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길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십 대 초반 정도의 남녀가 보인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 속에서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열정적인 나이. 그들은 행복해 보이고 또한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란다. 사랑이 사람을 배반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