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등을 켠 차가 조심스레 도로가에 멈춰 섰다.'“고마워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해나가 안전벨트를 풀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 별하의 그윽한 목소리가 그녀의 손길을 멈추게 했다.'“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그런데 제 여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니까요.”'“…….”'“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그 여자가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원하는 사람과 할 생각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고요.”'별하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아마, 그쪽이 나를 거절하게 된다면 나에게는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왜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지 별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자신의 사랑을 꺼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 여자가 결혼한다면 괜찮은 것이고, 아니면 그만인 것이었다. 오늘 처음 본 여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낼 만큼 하찮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제 옆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만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이유는 그 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 결혼하자는 거예요?”'“네.”'“네?”'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녀가 제대로 들었다 말하고 있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기가 막힌 일을 한두 번 겪었던 것이 아니었다. 상상 밖의 학생들, 동료 교사들, 학부형들이 의외로 많은 곳이 바로 학교였다. 그런데도 오늘처럼 기가 막힌 일은 또 처음이었다. '앞으로 몇 번 더 만나보자는 말도 아니고, 맞선 보는 첫날 결혼하잔다.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있을 수도 있을까.'“저기요. 원래 그렇게 솔직하세요?”'“네.”'“근데, 왜 사랑에는 솔직하지 못하셨어요?”'“…….”'그의 눈빛이 무척 깊어졌다. 사랑한다는 여인을 떠올리는 것인지, 사랑에 솔직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것인지 헛갈렸다.'“우리 오늘 처음이거든요, 이렇게 마주 앉은 건?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남자가 지금 결혼하자고 하네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진 않죠?”'“네.”'두 남녀 사이로 소리 없이 침묵이 찾아들었다.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는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고,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해 버리지 못하는 그녀는 또 대체 무슨 생각인지 본인들조차도 알 수 없었다.'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 제 감정을 감추려는 여자와 제 감정을 드러내려는 남자, 두 남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