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중·고등학교를 거쳐 의대, 거기서 또 서인대 대학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지나 과장이 된 지금까지 우진과 시현, 은찬은 함께였다.

그들은 대학 시절 이미 전공의 자격증을 딸 만큼 뛰어난 두뇌와 완벽에 가까운 비주얼과 보디로 흉부외과 존잘 3인방으로 불렸다.

“굿모닝!”

노래를 하듯 콧소리를 내며 의국으로 들어선 은찬이 손에 든 테이크아웃 커피를 흔들어 보였다.

“오늘은 내가 쏜다!”

“웬일이야?”

우진이 시큰둥하게 말하며 은찬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커피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품을 길게 하며 기지개를 켠 시현도 커피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를 보고 은찬이 시현의 옆에 찰싹 들러붙으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뭐야, 뭐? 간밤에 엄청 뜨거운 밤을 보내셨나? 왜 이렇게 피곤해하지? 차시현답지 않게?”

은근한 은찬의 눈빛에 야하게 놀리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시현이 은찬을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늘였다.

“궁금해?”

“응.”

“그럼 오늘 나한테 당직 넘기고 네가 대신 우리 집에 가라.”

“응?”

“너랑 딱 정신 연령 비슷한 기저귀 찬 애가 있을 거야. 긴긴밤 심심하지 않게 해 줄 거니까, 가서 직접 뜨거운지 차가운지, 화끈한지 열나게 피곤한지 경험해 봐.”

시현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은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은찬이 슬그머니 일어나 우진의 옆자리로 왔다. 그러곤 조용히 제 몫의 커피를 들고 빨대를 쭉쭉 빨아들였다.

시현은 흉부외과 레지던트 4년 차인 두진과 결혼해 어여쁜 공주님을 낳았다. 두진은 시현과 동갑이었지만, 사수를 한 뒤에 뒤늦게 의대를 들어왔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나 시현의 전략적인 작업으로 인해 결혼에 골인했다. 두진에게 시현은 자신을 괴롭히던 철천지원수였고, 시현에게 두진은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었다.

22년을 잊지 못하고 마음속에 간직해 온 첫사랑과 다시 조우한 날, 시현은 두진을 꼭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고 결국은 그것을 실천했다. 여전히 둘은 닭살 돋을 정도의 애정 행각을 벌여 의국을 닭장으로 만들고 있지만, 초보 부모로서의 생활은 무척 고되어 보였다.

모든 것에 능한 시현이 저 정도인 걸 보면, 부모란 흉부외과에 버금가는 극한 직업인 것 같았다.

괜히 말 잘못 꺼냈다가 코 꿰여 보모 노릇을 할 뻔한 은찬이 간담을 쓸어내렸다. 조용히 커피를 들이켜던 은찬이 생각한 것이 있는지 우진에게 속닥거렸다.

“난 뜨거운 신혼 보내고 늦게 애 가질 거야.”

“그게 될까?”

우진이 전혀 가망 없어 보인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 도사린 공포에 우진이 무심하게 툭 폭탄을 투하했다.

“애인 부친이 네 물건이 아주 튼실하다고 장담했다며. 씨알이 굵어서 자손은 쑥쑥 잘 낳겠다고.”

“그래도 조심하면 되지.”

“그러든가.”

심드렁한 우진의 말이 어째 더 무서웠다. 그런다고 과연 그게 마음대로 될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과연, 손주를 엄청나게 바라고 계신 은찬의 부모님이 그냥 두고만 계실지도 의문스러웠다.

그의 애인이 1층 카페 돌핀에 있고, 부모님인 병원장과 이사장님은 최고층에 있었다. 그들이 협력하면 은찬의 꿈은 글쎄…….

“닭이 병아리를 키워도 닭살 행각은 계속 이어지긴 하니 절반은 이룰 수 있으려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진을 보며 우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진을 본 시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곧 둘이 닭살을 생성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 자기, 어제 많이 힘들었지?”

“자기가 더 힘들었지. 피곤한데 나까지 괴롭혀서 미안해.”

“우웅, 그게 뭐가 미안해. 뜨겁게 사랑해 준 건데.”

둘의 모습을 보며 우진과 은찬이 동시에 커피를 들이켰다.

“뜨거운 밤을 보내긴 했네.”

“잘 봐 둬. 머지않은 네 미래의 모습이야.”

“난 좀 덜하지 않냐?”

은찬이 우진을 돌아봤다. 우진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은찬이 시선을 돌렸다.

“아님 말고. 쩝.”

커피를 연거푸 들이켜며 우진은 오늘은 꼭 매운 요리를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흉부외과의 존잘 3인방 중 은찬과 시현이 각자의 짝을 찾았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애정 행각을 벌였다.

우진은 그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독신주의를 고수했다. 그들이 사랑에 빠져들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면, 우진은 취미인 요리를 통해 그것을 느꼈다.

오늘 퇴근 후 일정은 정우의 총각네 실내 포차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는 것으로 정했다.

조용히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식사를 할 수 있기를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불청객과 마주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