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온다. 수안…….'바다를 등지고 얼굴에 엷은 그늘을 드리운 채로. 목표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로. '나는 그가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모가 넌지시 말을 꺼낸 건 어제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나는 예감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저 바다를 등에 업고 내게로 걸어오리라는 것을.'내 앞에 와 선 그는 4년 전의 얼굴보다 우아해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 속엔 휘몰아치던 폭풍우 대신 막막한 호수가 고여 있다.'“은유.”'목소리는, 지극히 태연하다.'“수안 오빠.”'나도, 평온하게 대답했다. 옅은 미소도 지었다. 그가 오지 않는 동안 수도 없이 상상하고 연습해온 일. 그러므로 오늘의 이 담담한 해후는 감쪽같았다.'“키가, 자랐네.”'“설마.”'“1센티.”'열아홉 살 이후로는 키를 재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가 떠났던 그 해에 늘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 그가 언급한 숫자가 3이나 5나 10이 아니어서. 꼭 1센티여서 그렇게 느껴진다.'“생각하지 마.”'낮고 단호한 어투. 이따금 날선 두려움을 떠안기곤 하던 이 어조. 그가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한다.'“무슨?”'“부정하기 위한, 쓸데없는 온갖 핑계거리들.”'“그러지 않았어요.”'그의 눈가에 실금이 생겼다.'“1센티쯤 자랐을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왜, 말을 높이지?”'모르겠다. 말끝이 왜 가지런하게 내려앉는지. 가슴 저 깊은 곳에 묻어둔 두려움 때문에? 4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공백을 일깨우려고?'나는 가장 상식적인 변명거리를 고른다. '“아홉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존대하는 건 당연하잖아요.”'“처음부터 그랬지.”'처음. 내가 열여섯 살이던 그 여름날. 이모 손을 잡고 이곳으로 처음 오던 날. 그래, 처음부터 그는 나보다 아홉 살이 위였다. '“알아요.”'“그런데?”'“그땐, 내가 어렸으니까.”'“지금은?”'“지금은……. 지금은 수안 오빠도 서른이 넘었고, 그러니까 아무래도 예전처럼 그렇게 편하게는 못…….”'“불편해?”'내 말을 끊고 들어오는 물음이 돌팔매 같다. 내게 꽂힌 그의 눈빛에서 4년 전의 그 맹렬한 적의를 본다. 연을 단칼에 잘라 없애는 포악한 그 어둠을 본다. '나는 그를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슬리퍼 밖으로 삐져나온 발톱들이 철없이 풋풋하다. '“노은유.”'응? 하고 싶은데, 네, 라는 대답이 튀어나올까 봐, 나는 입술을 꾹 붙여버렸다.'“잊어.”'그의 목소리가 단정하다 못해 싸늘하다. 나를 떠난 그의 시선은 바다 쪽으로, 아주 멀리 던져져 있다.'“잊었어요.”'내 거짓말은 달콤하지 않고 못 견디게 쓰다. 그를 위해 오래 준비해 왔음에도 그렇다. '“잊었어요.”'쓰디쓴 되새김. 그의 눈길이 바다로부터 내게로 돌아왔다. '이제 내가 바다를 바라볼 차례다. 머리와 이마에서, 콧잔등과 입술에서, 턱과 목덜미에서, 그의 집요한 눈길이 느껴진다.'그 눈길에 대해 시침을 떼는 일에도 여전히 익숙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두근거린다.''~~~ ~~~ ~~~''자박자박.'내 발 아래에서 잔돌들이 부딪는 소리가 적요를 깨뜨렸다. '자갈이 촘촘히 깔린 통로를 둥그렇게 돌아나가자, 펜션 건물을 올려다보고 서 있는 그가 보였다.'옆으로 비스듬히 비켜 서 있어서일까. 그의 실루엣이 한결 날카로워 보인다.'“수안 오빠.”'그가 나를 돌아보았다.'“준비 다 됐어요. 가요.”'자박, 자박, 자박.'좁은 길을 거슬러 그가 내게로 다가오는 소리.'나는 보온 도시락을 감싼 보자기의 매듭을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뭐야?”'“전복죽이에요. 이모가 좋아하세요.”'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오는 그에게 나는 황급히 말했다.'“무겁지 않아요.”'도시락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손끝이라도 스칠까 봐 미리 차단한 것인데, 그는 더 재촉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공존하는 두근거림은 밀물과 썰물처럼 언제나 한 몸이다. '나는 그를 앞질러 총총 걸음을 옮겼다. 묵묵히 걷는데 목이 뻐근했다. 한 걸음 뒤에서 그림자처럼 따르는 그, 시선 때문이다. '건물 뒤편에 세워둔 낡은 밴까지 이르러서야 나는 그에게로 돌아섰다.'“변한 게 없군.”'지금 그의 눈길이 내 어깨를 지나 밴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찰나의 혼란을 감추는 것도 감쪽같이.'“그래도 아직 씩씩해요.”'그의 눈빛이 내게로 온다. 고요히 머무른다. 눈동자 속 깊은 호수가 반짝인다. '“차 말이에요.”'그가 다시금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크고 강인한 손. 그러나 오래도록 화석으로 남아야 할 비밀을 간직한 손. '빈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말했다.'“키.”'“내가 할게요.”'그가 품은 두 개의 깊은 호수 사이에 사선이 그어진다.'“할 줄 알아요, 나.”'“못 한다고는 안 했어.”'“잘해요.”'“그럴 테지.”'“잘한다니까요?”'“알았어.”'선선히 긍정하면서도, 내 앞에 내밀어진 손은 전혀 물러날 기색이 없이 완고하기만 하다.'“수안 오빤 어딘지도 모르잖아요.”'“알아.”'입을 막듯 결론을 내려버리는 저 태도. 그리웠던 것 같다. 내내.'나는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다섯 개의 손가락들이 키를 꽉 움켰다. 내 안의 무언가가 조그맣게 오그라들며 마침내 가두어진 느낌.'“해담 요양원이라고, 분교 지나서 과수원 방향으로 쭉 들어…….” '“안다고 했지.”'“길은 모를 거 아니에요.”'“알아.”'정말, 알고 있는 거다. 나를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요?”'내 물음은 저항에 가까웠다. 흐린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돌멩이 하나를 툭 떨어뜨리듯 대답했다.'“가 봤으니까.”'나는 말문이 막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가 이모에게 다녀갔었다. 나를 만나지도 않고. '이럴 때, 뒤통수를 후려치듯 왈칵 몰려드는 이런 마음을 배신감이라 표현해도 되는 걸까.'“언제…… 언제요?”'떨리는 내 목소리는 이미 차에 올라앉아 있는 그를 조금도 건드리지 못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내 안에 흐르는 어떤 마음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