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태양 아래 초록 잎이 풍성한 나무가 더욱 싱그럽게 보였다. 자신의 짝을 찾아 요란하게 구애를 하고 있는 매미들도 여름을 생기 있게 했다. 올 여름은 유독 더웠다. 영희는 레이스 달린 하얀 양산을 접고 세 평도 안 되는 작은 공원에 들어섰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그늘이 하얀 벤치 위에 살짝 드리운 작은 공원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낮 시간대에 오면 인적도 드물고 적막해서 딱 로맨스 소설을 읽기 좋은 곳이었다.'영희는 사람의 손때가 탄 하얀 벤치에 앉아 이니셜 책갈피를 벤치에 올려놓고 손에 든 로맨스 소설을 펼쳤다. 두어 장 읽었을 뿐인데 뒷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소설에 빠진 영희는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감동으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인 작가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잘생기고 돈 많고, 성격까지 좋은 남자 주인공의 순애보적인 사랑과 예쁘고 당당한 여자 주인공의 열정적인 사랑. 무엇보다 저에게 없는 여자 주인공의 당당함이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처음에는 반 정도만 읽고 집에서 읽으려고 했는데 손이 제멋대로 다음 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영희는 마지막 한 페이지까지 꼼꼼히 읽고 만족의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등을 기댔다.'“하아, 좋다. 왜 이런 사랑은 로맨스 책에서만 존재하는 걸까…….”'영희는 텅 빈 공원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솜사탕 같은 구름을 올려다봤다. 그녀가 바라는 건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로맨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예쁜 사랑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멋지고 한순간에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남자는 왜 로맨스 소설에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로맨스 소설의 여자 주인공처럼 예쁘지도, 당당하지도 않아서 멋진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통. 통. 통. 영희는 로맨스 소설 속 이야기에 빠져서 못 들었던 리드미컬한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작은 공원 맞은편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떤 키 큰 남자가 혼자서 농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과 너무 멀어서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는 꽤 열심히 농구를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 동네 사람들이 다들 여행이라도 떠났는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동네가 쥐죽은 듯 했다. 시끄러운 서울 한복판에 있는데도 서울이 아닌 조용한 시골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소음과 단절이 되면서 그녀와 농구하는 남자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 자신을 이어주는 듯한 통통 튀는 농구공 소리.'남자가 갑자기 골대에서 멀어지더니 근사한 폼으로 높게 점프를 해 3점 슛을 쏘았다. 농구공은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며 그림같이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만 보던 3점 슛이 눈앞에서 재현되자 영희는 몸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너, 너무 멋있다. '영희는 농구 선수들에게 왜 소녀 팬들이 많은지 이제야 깨달았다. 통통 튀는 농구공 소리에 따라 그녀의 가슴도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있어서 남자의 얼굴은 희미하게 보였지만 잘생겼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건장한 몸매에 키가 큰 남자는 금방이라도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돼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금방 읽었던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영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남자가 농구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면서 제멋대로 그에 대해서 추리하기 시작했다. 농구 선수일까? 농구하는 모습이 아마추어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농구 선수를 본 적이 없어서 알쏭달쏭했지만 왠지 농구 선수일 것 같았다. 공을 튀기던 남자가 멀리서 뛰어와 무릎을 구부렸다 펴면서 덩크슛을 시도했다. 영희는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남자가 공중에 떠 있는 짧은 순간을 지켜보았다. '농구공이 골대에 무사히 들어가고 남자가 골대에 매달리자 영희는 순간적으로 환호성을 내지를 뻔 했다. 진짜 농구 선수인 모양이다. 너무 잘하지 않는가. 영희는 자신이 성공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농구 선수 같은데 사인이라도 받아야 할까? 사인 받겠다고 다가갔는데 이름도 모르면 실례지 않을까? 연예인을 좋아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들뜨기 시작했다. 햇볕을 너무 많이 쬔 건지, 덩크슛을 본 흥분 때문인지 영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책을 들고 안절부절못한 영희는 사인 받을 용기가 없어 조금만 더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남자에게 시선이 뺏긴 채 멍하니 있던 영희는 드리블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뒤돌아보자 재빨리 책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남자의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먼 거리이니까 그도 제 얼굴을 못 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도 왠지 그가 보고 있을 것 같아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남자가 뛰어와 왜 훔쳐봤냐고 따진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영희는 여전히 한 손으로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연방 손부채질을 했다.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더운 열기가 휩쓸고 지나갔다.'공원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목이 많이 마를 텐데 음료수라도 미리 사놓을 걸. 진짜로 오면 뭐라고 해야 하지? 농구하는 모습 잘 봤어요. 아니, 멋있었어요. 이건 너무 고등학생 같잖아. 영희는 남자가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떨렸다. '일 분이 하루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영희는 얼굴을 가렸던 책을 조심스럽게 무릎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여전히 이쪽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리고 있는 듯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뒤통수가 따끔거린 영희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하나, 둘, 셋에 고개를 드는 거다. 아니, 셋은 너무 빠른가. '고개를 드는 것도 소심한 성격이 제동을 걸었다. 결국 열까지 세고 살짝 고개를 든 영희는 텅 빈 운동장을 보았다. 없다. 벌떡 일어난 영희는 운동장을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돌아갔는데 혼자서 그가 다가오지 않을까 설레고, 조바심을 낸 것이다. 자신의 우스운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안 들킨 것만으로 다행이었다.'허탈함에 힘이 빠진 영희는 고개를 들어 물감을 칠해놓은 듯 선명한 파란 하늘을 올려다봤다. 좀 전까지만 해도 무거웠던 고개가 금방 들렸다. 뭐, 이것도 좋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 나쁘지 않았다. 정말 로맨스 소설 속 상황이라면 그 남자가 앞을 지나갔을 것이다. 자신이 실수로 뭔가를 떨어뜨리고 남자는 그걸 주워주면서 말을 걸었겠지. '진부하지만 그게 바로 클래식이다. 그리고 그 남자와 인연이 이어졌을 것이다. 영희는 싱긋 웃으면서 책과 양산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농구하는 남자를 보면서 만들어 낸 꿈같은 상상은 허탈했지만 달콤하기도 했다. 로맨스 소설은 현실과 다르다는 걸 또 한 번 느끼면서 영희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수돗가로 달려간 하재는 찬물을 틀어 땀범벅이 된 얼굴을 씻어냈다. 얼음장 같은 시원한 물이 얼굴에 붙어서 끈적이던 땀을 훔쳐갔다. 더운 날 농구로 땀을 내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었다. 한바탕 땀을 빼고 나면 고등학교 때 다친 무릎이 쑤셨지만 며칠 지나면 거뜬해졌다. 고등학교 때처럼 선수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취미로 하는 거라서 무릎에 심하게 무리가 가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시절 의사에게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재는 충격으로 모든 걸 놓았었다. 하루하루 고역 같았던 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확실히 옛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시간이 약이라고, 고등학생이 인생을 걸만큼 사랑했던 농구는 십 년이 지나자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변했다.'하재는 아예 수도꼭지 밑으로 머리를 묻고 머리카락까지 씻은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얼얼하게 차가운 기운이 감돌아 머릿속까지 깨끗해진 기분이었다. 얼굴에 맺힌 물방울이 쌍꺼풀진 깊은 눈매를 지나서 붉은 입술로 들어갔다. '하재는 엄지로 입술을 쓱 닦아내고 허리에 매어둔 수건으로 머리카락에 붙은 물방울을 털어냈다. 수건으로 인해 튕겨나간 물방울들이 반짝거리며 그의 주위로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씻는 동안 내려놓은 농구공을 집어든 하재는 농구할 때부터 신경 쓰였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농구를 하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든 하재는 하얀 벤치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푸른 녹음 사이로 파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살짝 불어온 바람을 따라서 부드럽게 유영했다. '드리블을 하다가 여자에게 시선이 뺏긴 하재는 공을 놓쳤다. 책에 가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청순가련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라니. 왠지 그녀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느낀 묘한 호기심이 그를 재촉했다. '하재는 멀리 도망간 농구공을 집어 들고 여자 쪽으로 걸어가려다가 자신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느꼈다. 이런 모습으로 갔다가는 여자가 질겁하고 도망칠게 뻔했다. 먼저 간단하게라도 씻고 나서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시원한 기분을 만끽하면서 수돗가를 떠나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하재는 여자가 벤치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여자는 사라져버렸지만 하재는 가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작은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에서 본 하얀 벤치는 세월의 흔적으로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하재는 여자가 이미 사라져버린 벤치에 일부러 찾아온 자신이 우스워 소리 없이 웃었다. 누나, 하영에게 들켰으면 분명히 일주일 치 놀려먹을 거리였다. 아니, 방심하면 안 된다. 하재는 혹시 하영이 군것질 거리를 사러가다가 자신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위를 쭈뼛거리며 둘러보았다. 다행히 하영은 보이지 않았다. '하재는 괜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서둘러 벤치를 지나치려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거리는 것을 보았다. 벤치로 다시 고개를 돌린 하재는 얇은 은으로 된 책갈피를 발견했다. 여자가 책을 보고 있었으니 그녀의 것이 아닐까? YH라고 적힌 이니셜 책갈피를 손에 쥔 하재는 조심스럽게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지만 왠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만난다면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리라. '하재는 손가락으로 농구공을 돌리면서 입가에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