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쯤 걸릴 거라던 준우는 1시간이 다 되도록 안 나타나고 있었다.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바는 창문 쪽 야경이 기가 막혔다. 한주는 창 옆자리에 앉아 알콜이 안 들어간 칵테일 한잔을 시켜놓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저렇게도 예쁜데……가까이 들어가 눈앞에서 보면 말도 못하게 지저분할 도시의 거리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저렇게나 이쁘다. 한참 야경을 내려다보던 한주는 시계를 한번 보고 한숨을 쉬며 다시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준우가 입구에 나타났다. 입구에 서서 한주를 찾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한주는 넋 나간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정색 슈트에 흰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준우는 전에 TV 에서 봤을 때처럼 한주가 아는 이준우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스크린에서 툭 튀어 나온 인물 같다. 어두운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로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은지 선글라스를 벗어서 손에 들고 한손을 슬쩍 이마에 얹어 얼굴을 가리고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한주와 눈이 마주쳤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하고 성큼 성큼 준우가 한주 쪽으로 걸어왔다.'“미안해요. 좀 늦었죠.”'앞자리에 앉으며 준우가 별로 미안하지 않은 기색으로 말했다. 이 남자, 오늘 왜 이러나. 옷차림도, 분위기도 생소해서 한주는 준우가 낯설었다.'“밤에 무슨 선글라스예요.”'한주가 어색한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툭 던졌다.'“웃긴 거 나도 아는데……그렇다고 맨 얼굴로 다니는 건 더 번거로워서요.”'웃지도 않고 준우가 대꾸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한주가 마시는 게 뭔지 묻고 같은 걸로 달라고 했다. 주문한 칵테일이 올 때까지 둘은 말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주는 괜히 만나자고 했나 후회를 하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어젠…….”'더 참지 못하고 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잘 들어갔어요?”'한주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준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준우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저 미소가 정말 나를 향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준우 씨는 잘 들어갔어요? 사실 난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 생각이 잘 안 나요.”'“나야 뭐.”'“아예 생각이 안 나는 건 아니고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데……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경선 언니도 취해서 기억 안 난다고만 하구요.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그 정도로 술이 약하지 않은데 어제는 많이 취했었나 봐요.”'준우는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 다리를 꼬고 앉아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한주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알콜이 없는 칵테일이라더니 알콜이 들어 있었나. 한주는 자꾸 가슴이 화득거려서 준우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단추를 너무 푼 게 아닌가 싶은 가슴께로 자꾸 눈이 가고, 얼굴을 똑바로 보면 자꾸 실제였는지 꿈이었는지도 확실치 않은 키스가 떠오른다.'“네. 많이 취한 것 같았어요.”'한참 만에 준우가 대답했다.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손목만 움직여 칵테일 잔을 잡아 입으로 가지고 가는 동작이……관능적이다. 한주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정말 무알콜이 아니었나 봐.'“그래서, 암튼, 혹시 내가 실수한 건 없었어요?”'“글쎄요.”'“그럼 이걸로 혹시 실수한 게 있었더라도 이해해 주는 걸로 알게요.”'누구 맘대로? 준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이해는 내가 한다고 해야지 왜 강한주 씨 마음대로 이해해 주는 걸로 알아요?”'“그럼 이해하겠다고 말해 주세요.”'준우가 말 그대로 씨익 하는 미소를 지었다.'“뭔가 본인이 한 실수 중에 기억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일단 한번 말해 보세요.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때 대답할게요.”'“기억……이 안 나요.”'이 앙큼한 여자 같으니라고. 준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기억이 안 난다고?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사실 여기 도착해 처음 한주의 얼굴을 봤을 때만 해도 과연 한주가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당시에도 제정신인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확신이 들었다. 기억하고 있구나.'“일단 취해서 정신 못 차렸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사과할 거리는 되는 것 같으니까. 미안해요.”'대답 없이 빤히 쳐다보는 준우의 시선을 받아내기가 힘들어 안절부절못하던 한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바쁜데 그냥 전화로 말할 걸 그랬나 봐요. 늦었는데……나가죠.”'준우가 두말없이 따라 일어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앞만 쳐다보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주는 얼른 먼저 발을 디밀었다. 준우가 천천히 뒤따라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한주는 오른쪽 벽에 붙어 문만 쳐다보고 서 있었다. 준우는 뒷벽에 등을 기대고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다. 한 층을 내려가 식당가가 있는 층에서 문이 열리자 갑자기 우르르 사람들이 밀려 들어왔다. 준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사람들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사람들의 기세에 한주가 뒤로 밀리자 준우가 팔을 뻗어 한주를 잡아 벽 쪽으로 밀고 그 앞을 막아섰다. 졸지에 한주는 등이 벽에 붙은 채 준우의 팔 안에 갇혀 마주 본 자세가 되었다. 눈앞에 준우의 가슴이 있었다. 풀린 단추 사이로 보이는 맨살, 화장품 냄새인지 향수 냄새인지 모를 냄새와 섞여서 코끝을 간질이는 체취, 이마 위에 닿는 숨……고개를 돌려 피해 보려고 하지만 피할 곳도 없다. 엘리베이터는 열렸다 닫혔다, 를 반복하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1층에서 또 한 번 우르르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문이 닫혔다. 한주가 누른 층은 주차장이 있는 지하 2층이다. 한주와 준우만 남은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준우의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들린다.'“어떻게……어떻게 나하고 한 키스가 기억이 안 나?”'놀란 한주가 고개를 들자 준우의 입술이 한주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그래, 이거였다. 이 감촉. 이 부드러운 입술의 느낌. 그래, 꿈이 아니었구나. 감질나게, 너무나 감질나게 준우는 입술만 댔을 뿐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왜 이래, 정말. 한주가 준우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매달릴 뻔했을 때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준우의 입술이 한주에게서 떨어졌다.'“아직도 기억이 안 나요?”'잔뜩 잠겨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준우가 물었다. 한주는 고개만 아주 조금 흔들어 보이고는 양손으로 엘리베이터 벽에 붙은 손잡이를 꼭 잡고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준우가 피식 웃더니 뒷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그러니까 왜 거짓말을 해요. 뻔히 들킬 걸.”'그 말을 남기고는 휙 돌아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한주는 준우가 저만큼 걸어가고 난 후에야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팔을 넣어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왔다. 준우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자기 차를 찾아 문을 열고 올라탔다. 한주가 자리에 우뚝 선 채 쳐다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그대로 시동을 걸어 차를 빼고 천천히 출구를 향해 차를 움직였다. 사이드 미러로 한주가 자기 차에 올라타는 걸 확인하고 준우는 속도를 높였다.'“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인정하게 만들어 준다. 두고 봐. 자기 발로 나한테 뛰어오게 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