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한 움직임, 군대의 사열을 보는 착각마저 들 정도다. 이제 겨우 1년, 사장이란 직함을 단 운우의 눈에는 귀찮음이 역력했다. 뒤따른 수행원은 그가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았다. 닫힘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책상에는 일주일 동안의 공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류더미가 쌓여 있었다. 올라온 보고서와 함께 결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자 바짝 조여 있던 신경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당장 급한 서류가 뭡니까?”'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비서실장에게 묻자 그는 전화로 업무전달을 했기 때문에 당장 급한 것은 없다고 했다.'“잠깐 쉬시는 게…….”'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운우는 의자에 앉았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일을 하다 보니 목도 뻐근하고 눈도 아릿했다. 엄지와 검지로 눈을 지그시 눌러 안마를 하던 운우는 목이 답답해 넥타이를 잡아 뺐다.'몸은 피곤하다고 쉬라 말하는데 벌써 몇 달째 잠다운 잠도, 휴식다운 휴식도 취하지 못했다. 잠에서조차 괴롭히는 그녀를 몰아내기 위해 쉼 없이 일에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다 최근 들어 동생인 운영의 결혼 재촉이 신경을 자극했다. 어머니와 할머니도 서두르고는 있지만, 정작 당사자가 소극적이다 보니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오빠를 가정에 묶어 놓을 여자는 없을 것 같아.]'걱정스러운 운영의 말에 운우 자신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여자에게 인생을 희생할 정도의 아량이 그에게는 없었다. 중역들이 독신인 자신의 현재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음 한편으론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 줄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가슴을 움켜잡더니 의자를 세게 밀치며 일어섰다. 갑자기 파고든 고통은 그의 전신을 휘감았고 시야까지 흐리게 했다. 잊었다. 몇 달 전 일이었고 기억 속에서 지웠다 생각했는데 징그럽게도 그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당신을 죽여 버리고 싶어.]'온 몸을 타고 울리는 목소리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자신과 영모의 눈앞에 영원히 나타나지 말라 일렀지만 정말 약속대로 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코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것은 무슨 조화속인지…….'운영의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미움과 증오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가까스로 몰아내며 손을 들어 와이셔츠 주머니를 뒤쳤지만 찾고 있던 것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담배를 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끔 지금처럼 금단현상이 찾아왔다.'창가로 향하자 바로 맞은편 건물 위에 있는 태양이 보였다.'그녀를 처음 보았던 곳은 3년 전 화려한 조명등이 빛나는 클럽에서였다. 클럽이란 특성 때문이었는지, 평소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그에게 그녀가 싸구려 여자처럼 보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너그러운데 그녀에게는 예외였다. 어쩌면 동생 운영의 말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싸구려…… 운우는 세경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단정 짓고 있었다. 남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때문에 그런 느낌을 점점 더 확신했다.'클럽 안에 있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 역시 이리저리 화려한 불을 찾아 날아다니는 불나방일 거라 제멋대로 단정지어 버린 탓도 있었다. 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여자처럼 보였는데…… 어이없게도 판단 미스였다.'[시트에 혈흔이 있었습니다.]'운영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들었다.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신경을 썼더라면…… 지독한 여자였다. 비명 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았기에 처음일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자신의 분신이 그녀 안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였다. 그날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에 두 사람 모두 취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건 자만이었다.'[영모에게서 떨어져!]'[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차갑고 도도한, 그러면서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목소리에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말하면 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귀를 막고 살았던 사람처럼 철저하게 무시해버렸다. 난생처음 당하는 무시였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신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지 잘 알고 있었다.'‘내 눈에 띄지 마라.’'속마음은 그랬지만 실상 자신조차 문제의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신세경…… 그녀는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였지만 아무리 목이 마르고 숨이 막혀도 마셔서는 안 되는 독이었다. 그걸 몰랐다.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장님 댁에서 전화 왔습니다.'비서실 여직원의 말에 운우는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네, 차운우입니다.”'- 에미다.'귀국한 소식이 벌써 집으로 전달되었나 보다. 도착 시간을 알리기는 했지만 먼저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죄스러운 마음이 일었다.'“10분 전에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그의 말에 어머니 임 여사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부모 자식 간 전화는 업무적인 전화처럼 받지 말라는 주의를 매번 들었지만 수년간의 버릇 때문인지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갈 거니?'“조 원장님이 별다른 차도가 없다고 하셔서 일 끝나고 들러 볼까 하고요.”'- 출장 가서도 병원으로 전화했다면서?'“네.”'한숨 소리가 들렸다. 운영의 결혼식 약속을 잡고 얼마 되지 않아서 차 회장은 쓰러지고 말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자신에게 그런 날이 올 줄 아셨는지 주변정리를 미리 해놓으셔서 경영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후계자 수업을 착실하게 쌓아 왔기 때문에 일처리가 능숙해 중역이나, 이사들에게서 일에 대한 불평은 없었다.'처음 한동안은 금융권뿐 아니라 각 증권사들의 애널리스트들이 운우의 경영 능력을 의심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투자에 대한 견해를 내놓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된 사이 이사진이 그를 옹호하자 그들은 금방 말을 바꿨다. 큰 변화가 없을 거라는 전망과 신용 등급 역시 차 회장이 운영할 때와 같은 등급을 유지한다는 발표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럼 몇 시에 퇴근할 거니?'“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할머니가 기다리신다.'수화기를 내려놓은 운우의 표정에 별다른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미소는 그가 얼마나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지 보여주고 있었다.''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소개팅 날짜가 되자 움직이기 싫었다. 외출을 싫어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국영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거실에서 감독을 하기 시작했다.'“빨리 좀 해.”'바쁘게 재촉하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채비를 서둘렀다. 몇 달 만에 하는 화장인지, 주위에서 부쩍 까칠해졌다는 말도 그렇고 최근 일주일 사이에 이상하게 입맛도 없고 당기는 게 없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일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잠이 부쩍 는 것이 계절 탓인가, 화장도 잘 먹지 않아 고생은 했지만 그나마 좀 봐줄 만했다.'“좀 찍어 발랐다고 제 나이로 보이네.”'“뭐야?”'“솔직히 누나, 서른 중반 훨씬 넘은 것처럼 보이는 거 알아?”'“이게…… 이래봬도 밖에 나가서 서른 안 되었다고 해도 통해.”'“말도 안 돼. 그 사람들 다 눈이 삐었나 보다.”'“네가 심사위원이야?”'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우스갯소리로 묻자 국영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평생 노처녀로 늙어죽을 거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잔소리가 시작되면 몇 시간이라도 좋은 녀석이라 손을 들어 제지했다.'“스톱! 너 자꾸 이러면 안 나가는 수가 있어.”'“약속 다 해놓고 펑크 내면 나중 일 감당할 수 있다는 소리네!”'“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무슨 그런 험악한 말씀을. 자, 어디 제대로 한번 봅시다.”'이리저리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청소도 좋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오케이.”'문단속을 하고 밖으로 나오자 국영이 차까지 대기해 놓고 있었다. 이제와 안 간다는 소리도 못하고 꼼짝없이 가야 했다.'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나들이 차량으로 도로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도로 사정으로 보아 제 시간에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많이 늦을 것 같다.”'초조한 듯 핸들을 톡톡 내리치는 국영 역시 시간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었다.'“전화 해봐.”'“안 받아.”'“설마 바람맞히는 것 아니지?”'“그럴 사람 아니야.”'장담은 했지만, 대답에는 영 자신이 없어 보였다. 초조해 하는 국영을 보자 괜히 덩달아 긴장을 해서인지 평소 하지 않던 멀미까지 났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자신의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누나 괜찮아?”'“몰라, 토할 것 같아.”'“여기서?”'조금만 움직여도 구토가 치밀어 올라오자 세경은 최대한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창문을 열자 그나마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니 마음이 편해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위(謂)는 어떤 상황에서도 끄떡없다고 생각했는데…….'“나오기 싫은 자리 억지로 가서 그렇잖아.”'힐끔 쳐다보는가 싶더니 운전에 열중했다. 하지만 때때로 신경이 쓰이는지 안정을 찾지 못하는 국영을 겨우 안심시킨 뒤 세경은 눈을 감았다. 최근 몇 달 동안 겉으로 편한 척했지만 사실 영모 결혼식 전부터 신경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영모의 결혼식이었다. 그 후 집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잔인하게 얘기하던 남자의 말이 가슴에 박혀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남자 따위 잊고 살아도 된다 생각했고, 이 넓은 서울 하늘 아래서 그와 만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것 같았다.'“누나?”'조심스럽게 어깨를 잡고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자 호텔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기운 없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국영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을 바로 했다.'“짜식, 겁먹었구나?”'“괜찮아?”'이마에 살짝 손을 가져다 대더니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안색을 살폈다.'“열은 없는데…….”'“멀미하면 열난다는 말 너한테 첨 들었다.”'“장난할 기분 아니야.”'정말 걱정이 되었나 보다. 여차하면 약속도 취소하고 갈 것 같아 괜찮다고 달래자 안심이 되는지 미소를 지었다.'“주차하고 올 테니까 안으로 들어가 있어.”'차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는 바람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고 누군가 빠르게 잡아주었다.'“세경아?”'반가운 소리였고 혼란스러운 가슴을 진정시켜 주는 목소리였다.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눈을 뜨자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말간 눈이 보였다. 호수에 물이 말라 육지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입 안이 바짝 말라 혀끝이 갈라져 버린 것처럼 세경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입술을 축이며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안녕.”'잡힌 손을 빼며 손을 흔들자 우습다는 듯 바라보더니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았다.'“괜찮아?”'“음, 잠깐 어지러워서…….”'“또 날 새웠구나?”'그것 외에는 이렇게 현기증이 생길 일이 없다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응.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형님하고 점심 먹고 이제 집에 가는 중이야.”'이상한 기운은 역시 그 남자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가슴 안쪽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그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영모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게 만들었다. 역시 언제나 승리자는 호기심이었다. 영모의 아내, 그리고…… 세경은 제멋대로 이리저리 흩어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입 안 속살을 세게 문 채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살기 가득한 눈동자는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 묻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지독한 한기를 불러왔다.'“인사해. 아내인 차운영, 그리고 이쪽은 우리 처의 오빠인 차운우.”'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영모의 말에 운영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며 세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영모 친구 신세경이에요.”'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내밀자 운영이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기분 탓인지 손을 잡는 그녀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커피숍 쪽을 보며 말했다.'“가봐야 돼.”'“나중에 또 보자.”'“……그래.”'말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느 틈에 따라왔는지 귓가에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착각은 자유라고 한다더니…….”'그의 손이 팔을 잡으려는 순간, 국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천사가 부르는 소리 같았다.'“신세경 씨…….”'다른 사람이 들으면 연인을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겠지만 세경은 국영이 장난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위급상황에서 구해준 국영이 너무 고마웠다. 몸을 틀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뭐야, 빨리 오지 않고…… 주차 잘했어?”'“당연하지, 갑시다.”'국영이 팔짱을 끼려고 하는데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불나방은 불을 좋아한다지?”'세경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팔짱을 끼고 있는 국영의 손을 풀었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것을 보며 살짝 윙크를 한 뒤 약속 장소에 가 있으라 말했다. 국영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쯤에야 세경은 운우를 보며 빈정거리듯 말했다.'“사람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게 그쪽 취미인 것 같은데…….”'세경은 운우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재미있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당신과 같은 세상에 사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사람은 나야. 차운우, 아무 여자한테나 아랫도리 쑤시지 말고 잘 간수해.”'그의 어깨에 팔을 올린 뒤 툭툭 쳐주며 세경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태연한 척 가만히 있던 그가 팔을 잡아 뒤틀자 고통이 엄습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것은 불행하게도 그녀가 아닌 바로 운우 자신이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고 많은 호텔 중에서 왜 자신이 선택한 호텔에 그녀가 나타났을까?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혹시 자신의 스케줄이 도난당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신세경이란 여자와는 지독하게 엉켰다 생각했는데 끝까지 속을 썩였다.'화사하기가 봄꽃처럼 아름다운 게 있을까. 차에서 내린 여자의 미모에 시선을 돌릴 틈도 없이 영모의 품에 쓰러지려는 여자가 세경임을 안 순간, 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다. 감정 없이 대하는 그녀와 달리, 동생인 운영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다.'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다른 남자가 있었고, 한참이나 앳되어 보이는 남자와 있는 그녀를 보자, 사라지려던 분노가 역류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눈엣가시였다.'“잘난 척하지 마!”'“차운우 씨, 당신하고 더 할 말 없으니까 이 손 놔주시죠.”'“겁나는 게 없나 보지?”'“다 잃었으니까.”'그제야 운우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투명한 유리알이었다. 마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그대로 보일 것 같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얼굴에 손을 대려는 순간 그녀가 더러운 것이 닿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피하는 것을 보며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뭔가 말하려던 세경의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혼란스러움이 엄습했다. 처음부터 …… 그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자신을 놓았는데 어쩌면 운우 자신이 그녀를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세경은 영모와 절친한 친구사이라고 했지만, 운우는 남녀의 우정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불륜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시선을 돌렸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영향력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 순간 미친 듯 뛰고 있는 심장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그녀였다. 제멋대로 주무르고 문지르고 집어던지며 갖고 놀고 있었다.'이런 자신의 생각에 기분이 이상하고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오래전 기억조차 없다 생각했지만 운우는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녀는 깔고 들어왔다.''“영모하고 잘 아는 사람이면서……!”'세경이 대뜸 치고 오는 반말을 그는 비웃었다.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시선을 보더니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속물!”'그 말 한 마디에 어이가 없고 기도 막혔다. 뭐 이런 여자가 있나 싶었다. 그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상대는 자신을 모르지만, 자신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우월감도 있었다. 너무 쉽게 깨트려 버린 것 때문에 화는 났지만 무시하는 게 훨씬 편했다.'“꺼져.”'눈초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믿을 수 없었다. 경쾌한 웃음에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무릎까지 올라온 부츠와 짧은 미니스커트, 다른 여자가 입었으면 촌스러울 것 같은 노란색의 탱크 탑을 입은 모습으로 무대에 올랐다.'“저 계집애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친다.”'누군가의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다. 춤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은 그것이지만 끝까지 비웃었다. 세상에 꺾을 수 없는 꽃은 없었다. 운우 자신이 볼 때 그녀는 곧 상품이었고 인위적인 냄새가 나는 조화였다. 살아있기는 하지만 말랐고, 색상은 아름답지만 생기가 없는 그런 가짜.'“싸구려처럼 노네.”'입 안으로 술을 털어 넣으며 하는 소리를 들었나 보다. 찰나, 몸놀림이 흔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었다. 신발을 벗어 던졌고 스타킹을 벗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미소까지 지었다. 그녀의 눈에 어린 냉소를 그는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으니까.'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춤을 추었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와우! 모처럼 신나게 놀았다.”'세경이 탁자 위에 놓인 맥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자, 그녀의 목줄기를 따라 가슴 쪽으로 흘러내리는 갈색 액체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은 혼자만이 아니었다.'“눈 내리 깔아라.”'그녀의 한 마디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고 친구들은 그런 게 어디 있냐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것은 독기였다.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머리끝까지 잠식해 들어와 결국은 사람을 뻣뻣하게 굳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독. 그녀에게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리들과 섞이는 것을 보며, 운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운우는 그녀를 또다시 시험하고 말았다. 영원히 연결 되지 않은 채. 혼자 착각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더라면 이런 비참한 기분을 느낄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즐거워야 할 점심시간이 지옥으로 바뀐 것은 그녀 탓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목이 타는 갈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뜨거워졌다.''더러운 개자식, 몇 달 만에 나온 세상이었는데 하필 재수 없이 차운우와 부딪치다니…….'세경은 오늘 하루 소개팅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그대로 집으로 오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주입시킨 책임감 때문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본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일부러 밝게 웃었고,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다를 떨었다. 상대방은 자신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본인은 반대의 기분을 느끼며 시간의 흐름을 재촉했다.'집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들어온 지 이제 막 한 시간이 지났다. 심신이 지쳤는지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고 그대로 모든 것을 다 토해버렸다.'“어쩌다가 내가 그런 자식을 알아가지고…….”'그녀는 입을 닦고 밖으로 나와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이런 한가로움이 얼마나 좋은지…… 밤낮 숫자로 머리를 쥐어 짜다보니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순전히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누굴 탓할 수조차 없었다. 따스한 햇살 탓인지 아니면 피곤함 때문인지 얕은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잠시 후 귓가를 간질이는 뭔가에 눈을 뜨자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국영의 시선이 보였다.'“입에 침 좀 닦아.”'인상을 찡그리며 말하는 국영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로 팔을 가져가 문질렀다.'“정말 더러워. 이런 누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운으로 알아야 돼.”'“몇 시나 된 거야?”'“7시.”'“해가 많이 길어졌다. 아직도 환한 것 보니까.”'“노인네 같은 소리만 하네.”'“네가 나 노인네라며?'흔들의자에서 내려서는데 여지없이 현기증이 밀려왔다. 최근 들어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끼니도 잘 챙겨먹는데…….'“괜찮아?”'국영이 재빨리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안심시키듯 고개를 끄덕였다.'“철분이 부족한가? 아니면 봄이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어지럽지?”'“갑자기 왜 그래? 사람 무섭게.”'‘아, 요 녀석 봐라.’'세경은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밥도 하기 싫고, 뭔가 시켜 먹기는 더 싫었다. 머리에 손을 대며 더 어지럽다는 시늉을 하자 정말 겁을 먹었는지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침대에 눕혔다.'“누나?”'“어.”'“배고픈 것 아니야? 아니지, 낮에 잘 먹었잖아. 정말 괜찮은 거야? 아무래도 이상해. 병원에 가야 하지 않을까?”'국영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쏟아내는 말에 기분은 좋아졌지만 정신은 없었다.'“약간 어지러울 뿐이야. 금방 괜찮아질 것도 같은데…….”'몸을 돌리며 눕자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이것저것 쉼 없이 물어오기 시작했다.'“귀찮아.”'손을 들어 녀석의 입을 막는다고 했지만, 방금 전 잠에서 깨었는데도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생리 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이렇게 어지럽고 잠을 이기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누나?”'흔들어 깨우는 국영의 손을 제지하며 이불을 잡아 당겨 얼굴을 가렸다.'“더 잘 테니까 방해하지 말고 집에 가.”'“정말 괜찮겠어?”'“네 목소리가 더 정신없게 들려.”'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 당겨 주었다. 국영이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까지 듣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깊게 단잠을 잤는지 눈을 떴을 때에는 주변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세경은 손뼉을 쳐 스탠드를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새벽 2시?”'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깊이 잠이 들었어도 그렇지…… 세상에, 어쩌자고……! 벌떡 몸을 일으킨 세경은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미쳤지! 미쳤어! 소리를 연신 내지르며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한번 가버린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배도 고프고,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세경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밀치자, 바로 옆집의 국영이네도 불이 다 꺼져 있었다. 멀리서 진순이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애인인 진돌이를 부르는 소린지도 모르겠다.'“배고프다.”'머리 위로 손을 길게 뻗어 올리며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 먹을 생각으로 부엌에 들어갔는데 식탁 위에 상포가 씌어 있고 그 위에 하얀 쪽지가 곱게 접혀져 있었다.''- 누나, 10시에 왔는데 자고 있네. 엄마가 누나 아프다고 했더니 이것저것 반찬 해주시고 나가셨어. 맛있게 먹고, 힘내. 누나는 건강할 때가 제일 예뻐.''“자식, 그래도 나 생각해주는 녀석은 이 녀석밖에 없네.”'상포를 제치자마자 입에 침부터 고였다. 언제 그 짧은 시간에 이 많은 것을 준비하셨을까. 삼색 나물에, 미역국까지…… 너무 감격스러워 렌지에 국을 데우고 밥통을 열었다. 국영이 아주머니한테 꽤 졸랐나 보다. 입에 가득 고인 침을 삼키고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금방 해 치우고, 나물에 고추장을 비며 먹는데 이 맛이 예술이었다.'“아아아앙……! 너무 맛있어, 미치겠다!”'발까지 동동 구르며 누가 빼앗아 먹을까 입 속에 연거푸 집어넣었다. 밥 두 공기를 단숨에 해치우고 부른 배를 다독이며 소리 나게 트림까지 하고 나자 그제야 모든 게 똑바로 보였다. 세상에 누가 이 새벽에 먹는 비빔밥의 참맛을 알까. 행복에 젖어 의자를 밀치고 일어선 순간 와락 치민 구토에 세경은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갔다.'방금 전 먹은 음식부터 시작해 계속 토하고 또 토해 결국 힘을 다 소진하고 말았다. 그제야 두려움이 밀려오며 세경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긴장해서…… 일이 너무 많아서…… 신경성이라고 수많은 이유를 가져왔지만 어느 것 하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 못했다.'‘설마?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런 일은……!’'하지만 세경은 잊고 싶었던 그날 저녁의 일이 떠오른 순간 또다시 밀려온 욕지기에 그대로 토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다랗게 떠졌고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오, 하느님 안 돼요. 이럴 순 없어요!”'비명에 가까운 절규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뚜렷했고 그녀의 눈은 점점 크기를 더해가고 있었다.'''프롤로그'1장'2장'3장'4장'5장'6장'7장'8장'9장'10장'11장'1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