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빠져나간 겨울바다는 마치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처럼 황량했다. 여름 내내 북적거리던 바다는 휴식기를 맞이한 것처럼 쓸쓸함만이 감돌았다. 월명도(月明島)가 사람들에게 알려진지 이제 겨우 서너 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동화(口傳童話)처럼 한번 찾았던 사람이 또 찾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서 갑자기 관광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월명도는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맑고 투명하다고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밤하늘이 아름다워서라는 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1년 전에는 방송국에서까지 소개되기 시작했다. 배를 띄워 생선을 잡고 농사를 짓던 동네 주민들이 낡은 집을 수리하더니 민박집으로, 횟집으로 또는 식당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도시로 떠났던 이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인구도 많이 늘었다. '가유 자신 역시 서울을 떠나 이곳 월명도에 정착한 지 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는 게 가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휴일이 끝난 뒤라 그런지 커피숍의 좌석은 텅 비어 있었다. 음악을 틀고 갓 뽑은 커피를 손에 들고 창가로 향했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회색빛 바닷물의 하얀 포말이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성마른 하늘에서 울려대는 천둥과 번개소리 역시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의 답답함이 누그러졌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움켜쥔 채 가슴을 치려다말고 고통을 참으려는 듯 허공에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려뜨린 뒤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 이 끈질긴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았다.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장대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것을 보고 있던 그녀의 눈이 심하게 일렁거렸다.'“겨울 날씨답지 않게 비가 많이 오는데요.”'딸랑거리며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우산을 접으며 들어서는 홍민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홍민은 자신이 운영하는 ‘해밀’에 근무하는 유일한 종업원이었다. 주말이나 사람이 많이 찾는 여름에는 필요한 만큼 아르바이트 학생을 쓰기도 했다. '“휴가는 잘 다녀왔니?”'“네.”'홍민은 통에 우산을 꽂아놓으며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한 손을 올려 흔들어 보였다.'“우편물이 많아요.”'“대부분 청구서일 거야. 카운터 위에 올려놔.”'“청첩장도 있던데요.”'우편물을 분리하던 홍민의 말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급하게 다가갔다. 자신이 월명도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청첩장이라니……. 홍민이 내민 봉투를 받아든 순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혹 잘못 읽었나 싶어 몇 번을 확인했지만 분명 장시우였다. 결혼이라니…… 한동안 연락이 없어 해외 출장이라도 간 줄 알았는데…….'“누가 결혼해요?”'호기심 어린 홍민의 질문에 가유는 기막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시우 언니 청첩장이야.”'“네?”'“시우 언니 결혼한대.”'자신의 말에 홍민 역시 놀랐는지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많이 놀랐나 보다.”'“세상에……. 사장님,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한 달 전에 오셨을 때만 해도 그런 말씀 없으셨잖아요.”'“시우 언니가 워낙 엉뚱한 사람이기는 하지. 근데 난 별로 놀랍지 않은데……. 그것보다 너무 잘되었지 않니?”'“결혼을 이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나요? 그분 성격을 보면…….”'홍민이 뭘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닌 결혼 문제만큼은 자신 역시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글쎄……. 너나 나나 언니 속을 모르니 내가 할 얘기는 없다. 하여튼 사람 놀라게 하는 데는 뭐 있다니까. 가끔 한 번씩 폭탄을 던지는 것을 보면 형부 될 사람이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시우의 갑작스런 결정은 사실 자신조차 조금 의외였다. 이런 중대한 일을 쉽게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참! 사장님, 얘기 들으셨어요?”'갑자기 화제를 돌린 홍민의 질문에 가유는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무슨 얘기?”'청첩장의 내용물을 보려던 그녀는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혹시 동네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생겼나 싶었다.'“리조트 회사에서 땅을 보러 왔대요. 우리 동네에 근사하고 멋진 리조트가 들어설지도 모른다고요.”'“그래서? 금시초문이기는 한데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아이 참, 사장님도! 그게 아니라니까요. 이번에는 차원이 달라요.”'홍민이 유난히 흥분한 것을 보니 대단한 회사이기 한 것 같았다. 그는 월명도에 근사한 리조트가 생겨 거기에 취직하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외지에 있는 사람들보다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을 쓰지 않겠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사장님, 혹시 푸르내 라는 회사 이름 들어본 적 있으세요?”'“아니. 그 회사도 그렇다. 다른 곳도 아니고 왜 하필 월명도야? 여기에 뭐가 있다고 들어와. 바다하고…….”'“그거야 사장님 생각이죠. 저희가 보는 것하고 전문가가 보는 게 다르니까요. 솔직히 몇 년 전만해도 우리 동네가 이렇게 유명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 자신이 여기 왔을 때만 해도 관광지로 변할 줄은 몰랐다. 꼭 이번 회사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이 몇 번 현지답사를 하러 온 적은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희망을 보이고 있는 홍민과 달리, 가유는 전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제 말이 맞죠?”'그녀는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광지가 개발되고 있었다. 나쁠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너무 들떠 있는 것 아니야?”'“이번에는 예전하고 다른 것 같아요.”'“뭐가?”'“아주 꼼꼼하게 살피더라고요. 대충 훑어보던 다른 회사들과 많이 달랐어요.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는 것도 그렇고……. 저도 잘 몰랐는데 벌써 열흘째 여기에 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한 팀이 올라가면 다른 팀이 내려오고 그랬다던데.”'열흘 동안 있었다고 하는데 가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면 차라리 무심 한 게 마음이 편했다. '“오늘 현지답사가 끝났나 봐요. 내일이면 올라간다고 하던데요.”'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주는 홍민을 보고 있던 그녀는 그제야 손에 들린 청첩장을 뜯었다. 시우의 마음을 잡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본인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평가를 내릴 수 없었다. '“한번쯤 얘기라도 해주지…….”'봉투 안에서 청첩장을 꺼낸 뒤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일렁거렸다. 몸 안에 남아 있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근처의 의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사장님.”'놀란 홍민의 부름에도 눈을 제대로 치켜뜨지 못했다. 아직도…… 아직도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것일까. 이런 자신이 너무 싫었지만, 한번 일렁거린 감정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괜찮으세요?”'“……어.”'그제야 가유는 고개를 들어 걱정스레 보고 있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지만,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진 게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바깥의 파도만큼이나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예식장이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란 사실 하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게 여겨질 정도였다.'“물 한 컵만 가져다줄래?”'자신의 말에 홍민이 주방 쪽으로 사라지더니 금세 물을 가져다주었다. 눈앞에 놓인 물잔을 잡았지만 들지는 못한 채 지켜보았다. 6년 전 스스로에게 약속했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서울 땅을 밟게 될 날이 없을 거라고. 혹여 그런 날이 온다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에나 가능할 거라고.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너무 낯선 도시 같았다. 아직 채 아물지 못한 상처 때문이 아니라, 혹 자신이 서울로 올라간다면 과거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아물어 가는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사태가 올 것 같아서였다. 부모님이 서울에 계셨지만, 6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다. 철없는 딸자식으로 인해 죽을 만큼 힘들었던 분들이었다. 제발 이제 그만 서울로 올라오라는 부모님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 월명도를 떠나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얼굴이 창백하세요.”'“나 잠깐 올라가서 쉴게.”'휘청거리는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지만 발이 허공에 뜬 것처럼 힘이 들었다.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인지 숨이 막혔다. 가까스로 자신의 공간 속에 들어서자 몸 안의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간 듯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을 세우고 문에 기댄 채 얼마나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에게 만에 하나 자신의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물론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언제나 안식을 주던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자 파도 역시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를 시작하고 겨우 두세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온몸에 피곤함이 밀려왔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있었는지 모른다. 핏기가 가신 얼굴로 거울 앞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여자가 한껏 비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너무 오랜 세월 채워두었던 비밀의 문 열쇠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려 하고 있었다.'“안 돼!”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열어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열어선 안 되는데……. 죽을 만큼 세게 이를 악물었다. 참기가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흐느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헉하는 단발마의 비명을 지른 것과 동시에 바지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느껴졌다.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재빨리 휴대전화를 꺼냈다. 망설일 틈도 없이 급하게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여보세요.”'- 나다.'“언니?”'- 어디 아프니? 목소리가 왜 그래? 쉰 것 같은데…….'걱정스러운 시우의 말투에 가유는 그녀를 안심 시킨 뒤 결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라 많이 놀랐다는 말에 시우는 수줍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는 한눈에 반한 사랑도 있더라. 누가 나한테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했다면 믿지 않았을 거야.'언니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고, 상대방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우가 남자를 칭찬하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듣는 자신이 다 행복해질 정도였다.'- 이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도 보면 아주 좋아할 거야.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너무 잘 되었어요.”'- 가유야.'“네.”'- ……올 수 있겠니?'오랫동안 망설인 뒤 묻는 어조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청첩장을 보내기 전 얼마나 망설이고 고민했을지, 시우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당연히 참석해야 할 자리였다. 수화기를 붙들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풀며 명랑하게 말했다.'“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가 결혼하는데 당연히 참석해야죠.”'- 저……정말이야?'“이거 정말 서운한데? 언니는 내가 참석하지 않았으면 했단 말이에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생각해 주는 시우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때론 자신에게 부담이 될 때도 있었다.'“참석할게요.”'- 고맙다. 정말 고마워.'“별 소리를……. 언니를 노처녀에서 구해준 형부한테 고맙다는 제 말 전해주시고, 진심으로 축하해요. 올라가서 뵐게요.”'귓가에서 휴대전화를 떼어낸 그녀의 입가에 아픈 미소가 피어올랐다.''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따뜻함과 대화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딸 키우는 집보다 아들 키우는 집이 삭막하다는 말이 있지만, 아이들 키울 때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인지 솔직히 그런 기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엄마라는 자리가 줄어들자 괜히 심란하고 마음이 울적할 때가 많았다. 아침을 준비하는 아주머니를 도와주던 추 여사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아들이 셋씩이나 있어 든든하겠다는 말을 하지만 속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큰 아들인 유찬이 마음을 잡은 뒤부터 집안이 잠잠해졌지만 이 평화가 깨어질까봐 두려울 때가 있었다.'“이것 간이 좀 약한데 조금만 더 해줘요.”'아주머니에게 나물 그릇을 내밀고 추 여사는 밖으로 나와 안방으로 향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남편을 보자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3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많았다.'“식사하세요.”'자신의 말에 남편은 말없이 신문을 접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추 여사는 막 2층에서 내려오는 유찬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밥 먹자.”'“안녕히 주무셨어요.”'“너도 잘 잤니? 또 늦게 잔 것 아니지?”'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유찬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찬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그런 그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아들과 남편의 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상극이라고 했던가. 큰 아들인 유찬과 남편의 관계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식탁에 자리를 잡은 아들을 보며 그녀는 애정을 가득 담아 물었다.'“오늘도 바쁘니?”'“네.”'추 여사가 실망한 기색을 내보이자 남편인 조 사장의 얼굴에 짜증기가 어렸다. 남자가 바깥일을 하다보면 늦는 게 다반사인데 매일 저렇게 묻는다면서 화를 냈다.'“당신은 어떻게 일밖에 몰라요? 애 얼굴 상한 것은 안 보여요? 최근 4년 동안 유찬이가 제대로 쉬는 걸 본 적이라도 있어요? 아주 일에 푹 파묻혀서…….”'“남자일이 다 그런 것 몰라? 혼자만 힘들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힘들어. 제발 유별 좀 떨지 마.”'벌컥 소리를 내지른 조 사장에게 추 여사는 반박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말대꾸를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시대가 변하면 같이 변하는 게 사람이거늘, 예나 지금이나 어쩜 저렇게 똑같은지.'“최대한 빨리 오도록 해볼게요.”'“일 없다. 네 할 일 제대로 하고 들어와!”'유찬은 들고 있던 수저를 자신도 모르게 꼭 움켜쥐었다. 폭발할 것 같은데 너무 오랫동안 눌러 버릇을 해서인지 오늘 아침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안스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벌떡 자리를 차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대꾸가 없는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아버지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지만 그는 태연함을 가장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아침인데……. 언제나 그렇듯 식사시간은 침묵과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숨 막힐 듯한 공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잘 먹었습니다.”'“왜 좀 더 먹지 않고…….”'언제나 똑같은 말이었다. 최대한 활짝 웃는 얼굴로 많이 먹었다고 말씀드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짓는 미소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어머니의 굳었던 얼굴이 안정을 찾는 것을 보며 밖으로 나왔다. 자신과 아버지, 과연 누가 더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 어디에 이렇게까지 힘든 부자(父子)지간이 있을까? 가까워질 수도 없는 거리였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독립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지금껏 부모님 곁에 있는 것은 순전히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혹여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이 싫었다. 너무 많은 세월을 자신으로 인해 눈물을 지으셨다. 출근 준비를 마친 뒤 현관으로 나가자 그제야 일어난 두 동생들이 2층에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기지개를 켜며 내려오던 유현이 자신을 보더니 물었다. '“오늘도 출근해? 하여튼 형도 대단하다. 이제 회사 자리도 잡혔구만, 토요일인데 좀 쉬지 그래?”'“현장에 가기 전에 미팅이 있어.”'“너무 그러다 병 나면 어떻게 하려고? 형이 언제까지 20대 청춘인 줄 알아. 몸 생각 좀 해.”'유현의 말을 듣던 그는 피식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해방감이 전신을 에워쌌다. 집 밖에만 나서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면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형하고 아버지 보고 있으면 나랑 진이도 숨이 막힌데. 난 도대체 아버지하고 형을 이해할 수가 없어.’'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지만 늘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어머니란 존재가 족쇄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회사에서의 자신과 집에서의 자신은 한 사람이었지만 동일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휴일이었지만 사무실로 들어서자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 때문에 직원들 대부분이 출근한 상태였다. '“좋은 아침.”'자신의 인사에 여기저기서 인사가 들려왔다. 지금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은 어제 야근을 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위로의 말을 한마디 한 뒤 사무실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벗었다. 의자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직원이 차를 갖고 들어왔다.'“고마워요.”'수줍은 미소를 짓고 나가는 여직원을 보며 쌓여 있는 서류를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급하게 서둘렀던 월명도에 대한 자료가 깔끔하게 정리된 채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걸 확인한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며칠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빨리 일을 맞춰 준 여직원이 대견스러웠다. '“강 부장한테 내가 찾는다고 올라오라고 해줘요.”'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강 부장이 들어왔다. 출근하자마자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온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우연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부른 것 알고 온 거야?”'업무적인 관계가 아닌 친구로서의 질문이었다. 강 부장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니, 자신이 부른 것을 모르는 듯 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아니. 그냥 아침에 네 얼굴 보고 싶어서.”'“실없기는. 의논할 게 있어서 불렀어.”'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그의 앞으로 내밀자 강 부장은 받아들더니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월명도 거네.”'“열흘 동안 한 현지답사치고는 꽤 자세하게 올라온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글쎄…….”'긍정적인 답변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한 발자국 물러선 그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 부장이 처음부터 월명도를 마음에 차지 않아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지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평균 관광객 수 역시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특히나 유리한 조건은 다른 업체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푸르내가 내건 슬로건은 여유와 편안함이었다. 그리고 아들에게는 역사나 현장 학습을 통해 부모들에게 여유를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현지에서 찍어온 비디오를 보고 직원들과 의논을 나눠봐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한번 현지답사를 갔으면 하는데…….”'“네가 직접 가겠다는 거야?”'지금까지 늘 해왔던 일이었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유천이 직접 답사를 간다는 말에 저리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이 꺼림칙했다. 처음부터 자꾸 반기를 드는 것 같았고, 단지 유찬의 지나친 생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고 있었다.'“왜 그래?”'“아, 아니야.”'“강광수!”'그의 강한 부름에 광수는 눈길을 피하는가 싶더니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은 아니다. 지금껏 유찬이 살아온 세월의 반이 눈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불길해져 가고 있었다.'“이름은 왜 부르는데? 솔직히 나 월명도 별로야.”'“가봤구나.”'처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는지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광수는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자신만 뚫어져라 보았고 유찬은 그 눈빛을 담담하게 마주했다.'“입지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고……. 네가 뭘 생각하는지 말을 해줘야 나도 포기를 하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니야.”'“좋아. 그럼 너한테 하나만 묻자.”'광수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뭐가 그렇게 힘이 드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던 머리카락을 긁기 시작하더니, 나직한 말투로 험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내가 반대하면 그만둘 거야?”'“그게 무슨 소리야?”'“말 그대로야.”'“현지답사 하고 나서 결정을 내릴 거야.”'“유찬아, 꼭 그렇게 해야겠냐?”'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광수가 이렇게 나오자 점점 더 자신의 생각은 확고해 지고 있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돌리지 말고 해. 이번 일에는 평소 너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잖아. 이유 없이 반대하는 것도 이상해. 평소 다른 직원이 입지 조건 발표하면 제일 먼저 장소부터 봐야 한다고 서두른 사람이 바로 너잖아.”'광수는 자신의 말에 아무 말 없이 잠시 보고 있더니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런 그의 일련의 모습이 자신을 화나게 했다. 무엇보다 이상하게 요 며칠 녀석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피차 언성을 높여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스위스 호텔에서 점심 미팅 있는 것 잊지 않았지?”'고개만 끄덕일 뿐 대답은 없었다. 광수가 나간 뒤 그는 앞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일을 빨리 마무리 지은 뒤 그는 호텔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운전을 하고 있는 광수의 표정이 아침과 달리 밝아진 것 같았다. 차 키를 도어맨에게 내민 뒤 밖으로 나오는데 바로 뒤에 검은 세단이 멈추더니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내리는 게 보였다. 앞장 서 들어가는 광수를 따라 들어가던 그의 눈빛이 가늘어지면 등줄기가 자신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내밀며 신부를 따라가려는데 광수의 목소리가 들렸다.'“실장님?”'“…….”'스스로 느끼기에도 자신의 눈빛이 멍한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낯익은 얼굴, 벌써 인연이 끊어진 지 5년, 아니 6년인가? 나이가 어떻게 되었지? 서른이 넘었을 텐데……. 이제 결혼을 하는 건가?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봤어.”'“네?”'“저 신부,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중얼거리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광수의 눈동자가 걱정스러움으로 흐려지는 게 보였다. 잘못 본 거라면, 아니 제대로 본 거라면…….'“미팅 시간 다 되었습니다. 나중에 보셔도 되지 않습니까?”'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잡아끄는 손길에 미팅 장소로 향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그마치 6년이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당장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잘못 보았을 거란 생각 사이에서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무슨 일이야?”'“시우 누나.”'눈에 띄게 굳어지는 광수의 표정을 보지 못한 그였다. 갑자기 시우 얘기가 왜 나왔느냐고 다그치는 광수의 말투에 조금 전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시우 같다고 대답했다. 유찬의 대답에 광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 누나 결혼한 지가 언젠데. 네가 잘못 봤을 거야. 사람 얼굴 한 번 봐도 잘 기억하는 녀석이 어째 이런 실수를 하는 거야? 네가 아는 척했더라면 괜한 오해 살 뻔했잖아.”'“정말이야?”'“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해?”'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광수는 절대 그럴 친구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 리조트 입지건 때문에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진 탓이라 생각했다. 평소에는 하지 않을 실수를 할 뻔했다는 생각에 웃으며 넘어갔지만 실상 그것은 겉모습뿐이었다. 머릿속은 폭풍처럼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언제 미팅이 시작됐고 끝이 났는지 통 기억이 없었다. 집중을 해서 듣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는 말을 놓치고 있었다. 힘겹게 미팅을 끝낸 유찬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회의 시간은 생각했던 것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렸고 정신이 전혀 없었다. '“괜찮아?”'그가 집중하지 못한 것을 알아챈 광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얼버무리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그의 생각은 먼 곳을 헤매고 있었다. 과거가 없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가 없이 미래도 없다고…….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잊었다고 생각했다. '‘아니지. 조유찬, 한 번도 잊은 적 없잖아.’'내면의 성난 음성에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한때의 사랑이었고 유희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누군가를 이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적이 없었다. 아마 그런 상대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개망나니, 지독한 놈, 인간 말종……. 자신을 칭했던 수많은 수식어들을 잊고 산지 5년이다. 조유찬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쓰레기.’'그만큼 자신은 막무가내로 인생을 살았다. 한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익숙하지 않은 통증이 머릿속을 가로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지끈거리는 통증이 시야를 가리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몇 초, 아니 찰나였다. 태어나 난생처음 그렇게 빨리 로비를 향해 달린 적이 없었다. 그녀다. 분명히…… 가유…… 송가유…… 그녀였다. 입 안에서 쉼 없이 이름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달리면 잡을 수 있었다.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그녀를 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악의에 찬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아아악!”'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은 것도 알지 못한 채였다. 다급하게 쫓아온 광수가 잡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6년 동안 억눌러두었던 분노의 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눈에 띄면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죽을 거라 매일매일 칼을 갈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증오의 싹은 죽지 않고 계속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파괴되어 있던 영혼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여자이면서 그 전보다 훨씬 더 무섭게 파괴해버린 여자였다.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기로 했는데 가슴 저 밑바닥에서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 그녀에 대한 미움을 그는 더 이상 제어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빛을 바라본 광수가 헉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집어 삼킨 것도 몰랐다. 유찬은 이성을 상실한 사람 같았다. 눈동자에 칼날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저승사자의 음성처럼 무거운 목소리가 나왔다. '“내 인생을 파괴한 송가유……. 가만 안 둬.”''프롤로그'일장'이장'삼장'사장'오장'육장'칠장'팔장'구장'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