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몸의 오감(五感)이 몸 안에서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모든 감각에 색깔이 부여된다면, 지금 이 순간 오감은 색깔이 없었다. 충격이 크다 보면 감각을 느끼거나 생각을 잊어버린다더니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지금 처음 알았다.'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갑자기 숨이 가빠오자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암흑 같았던 시야에 빛줄기가 보였고, 그제야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정신이 돌아왔군.”'속삭이는 소리에 몽롱했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갔던 감각들이 폭풍처럼 거칠게 몸 안의 감각을 깨우기 시작하자 충격으로 몸이 흔들렸다.'그런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부축하기 위해 뻗은 손을 보며 본능적으로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 움직임에 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휘더니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지금껏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한 적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가 낯설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반응을 살피려는 날카로운 시선에서 헤어 나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나가봐야겠습니다.”'“아직 우리 얘기 안 끝났잖아.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아.”'“전 더 이상…….”'자신답지 않게 말끝을 맺지 못했다. 무엇보다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캐내려는 듯한 자신의 시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를 보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처음 보는 사람처럼 넓은 이마 사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지나 날카로운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에 잠시 시선을 멈춘 뒤 목으로 시선을 내렸다.'이제야 여느 날과 달리 여유로운 느낌이 들었던 이유를 알았다. 흐트러지는 것을 싫어했던 그가 오늘은 묘하게 접근하기 쉬운 사람처럼 보였다.'“처음 보는 사람처럼 너무 빤히 보는군.”'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가까이 다가갈 수도, 시선을 마주칠 수도 없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다 못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것 같았다.'“맞아요. 처음 보는 사람 같아요.”'“서운한데?”'“지금 장난칠 기분 아닌데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더니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그가 무척이나 화가 났을 때에만 나타난다는 것을 최근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저 무심코 지나칠 상황이었지만 아윤은 그에 대해 자신도 모르는 순간 속속들이 파악해버렸다.'“다른 것도 아닌 청혼을, 내가 장난으로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그가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에게 장난을 칠 수 없다는 것도. 오래전 한가로운 시간에도 소파에 편하게 누워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책과 경제지를 읽었고, 피곤하다고 할 때조차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상대로 장난을 칠 거란 생각은 예전에 버렸다.'“대답 안 할 건가?”'자신의 답변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조심스럽게 가로저었다. 최소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제 답변, 누구보다 사장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몰라.”'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채찍 같은 음성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하지만 더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꿈을 꾸지 않는 게 좋았다. 가끔 꿈꾼 적은 있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부터 꿈은 꿈일 때가 아름답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여기까지였다.'“이만 나가보겠습니다.”'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가려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목소리가 들렸다.'“그렇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되지. 난 쉬운 일은 안 해.”'“협박하지 마세요.”'“협박이라고 했나? 좋아,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하지. 내게 싸움을 건다면 기꺼이 상대해주겠어.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기억하고 덤벼. 싸울 때 난 내 목을 걸 거야. 나하고 싸울 생각이라면 싸움판에 무엇을 걸지부터 생각하고 덤벼.”'전부를 거는 사람이라…… 결코 겁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진태진이 무섭고 두려웠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 자신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운명의 여신은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왔다고 했지만, 자신은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신(神)이 왜 그와 자신을 다시 만나게 했는지 미치도록 궁금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인간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이 미친 운명이, 신이 만들어놓은 마지막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이 잔인하고 지독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와 자신은 절대 하나로 엮일 수 없었다.'마른 입술을 축이며 최대한 감정을 감추고 말문을 열었다. '“안 되는 일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면 자칫 모든 게 틀어지게 되어 있어요.”'“네가 승낙하면 모든 것이 바로잡히게 되어 있어.”'“어떻게요? 아니요, 그럴 수 없다는 것, 너…… 아니, 사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그를 부르는 호칭에 안색이 굳어졌다. 철저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확실하게 경계선을 그으려는 자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세상은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있다. 진즉에 끝내야 했는데…… 처음부터 가벼운 관계로 끝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해 인연의 끈을 예까지 끌고 오고 말았을까.'“넌 내가 원하는 답변만 해주면 돼.”'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태세였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에게 자신은 어울리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그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응시했다. 자신이 어떤 답변을 할지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 역시 그가 쉬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게 분명했지만, 자신의 답은 하나였다. 오래전에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산산조각 났다. 더는 충격을 견딜 수 없었다.'“싫습니다.”'조금 전까지 여유 있어 보이던 그의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오래전 철저하게 감정을 감추고 두 사람은 서로의 합의하에 관계를 맺어왔다. 그가 이곳의 최고 경영자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이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거였다. 여기서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우리 처음 만났던 날 생각나요? 그때 그랬죠? 한 번이라고, 두 번은 안 된다고. 구질구질하게 여자와 엮이는 것 싫으니까 한 번에 끝낼 수 있으면 고려해보겠다고 직접 말했는데, 기억하세요?”'“그래.”'“우린 그런 관계예요. 육체적으로 탐하는 사이, 거래로 이루어진 사이. 우리의 끝은…… 알다시피 끝내는 거예요. 여기까지만 해요. 바로 눈앞이 벼랑 끝인데 바보처럼 거기까지 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죠. 사표 제출할 테니까 바로 처리해주세요.”'끝났다. 천천히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천 미터를 뛴 것처럼 가슴이 떨렸고 호흡이 거칠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지었지만 그게 보는 이로 하여금 얼마나 안타까운 기분이 들게 하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쉽게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지금부터 그런 생각 버려.”'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다음 말을 이어갔다.'“이 진태진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내 나이, 지위에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 그리 쉽게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한 번은 내 곁을 떠나게 두었지만 또 잡힌 고기를 놓아주는 바보는 아니야. 지금 너는 네 얘기를 전부 끝냈지만,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어.”'“듣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란 사람과 난 절대 어울릴 수도, 어울려서도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거예요. 우리의 첫 만남이 결코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만에 하나…….”'“내가 소문을 무서워할 사람으로 보이나 본데, 어떡하지? 실망을 시켜야 할 것 같군. 내가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정아윤 너야, 다른 여자가 아니고.”'똑똑 부러지는 말투, 그따위로 내게서 벗어날 생각이라면 아예 꿈도 꾸지 말라며 협박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기 전부터 지끈거리던 두통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는 싫었다. '“생각해봐.”'“생각해볼 필요도, 가치도 없어요.”'더 이상 말이 길어진다면 언쟁으로 번질 것이 뻔했기에 그녀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돌리기도 전에 바로 세워졌고, 어느새 양팔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소유욕과 독점욕으로 불타는 눈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아 두려웠다. 이럴 때의 그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서운 것은 그에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자 정신이 아득했다.'“안 돼요.”'“내가 멈출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품 안에 꼭 안았다. 벗어나기 위해 가슴을 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벽이 손에 닿은 느낌이었다. 벗어나야 했다. 혼자 받는 고통은 상관없지만 자신으로 인해 그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 지금은 아파도 시간이 지나면 그 역시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 확신했다. 세월이 흘러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태연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걸로 만족했다. 어떻게든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어야 했다.'“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당신이 날 어떻게 대했는지 잊었어? 이제 와 결혼해달라고? 당신, 미친 거야. 제발 정신 좀 차려!”'“미친 사람은 미친 짓을 하지. 하지만 정상인 사람은 정상인 짓만 해. 자꾸 날 밀어내려고 하는데, 어림없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정아윤이란 여자와 결혼해.”'“미쳤어. 우린…….”'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분노를 가득 담은 키스에 입 안이 얼얼했고, 혀가 빠져나갈 것 같았다. 폭풍처럼 몰아붙일 때는 있었지만 이렇게 난폭하게 군 적은 없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야 했다. 옷차림이 흩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그…… 그만 해요.”'“멈추게 하려면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해.”'“안 된다고 했어요.”'이 사람, 화가 아주 많이 났나 보다. 머리채를 뒤로 잡아채 비명을 지를 때까지 잡아당겼다. 사무실이라 참아보려고 했지만 너무 아팠다.'“질러봐.”'잇새를 악물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비명을 질러 비서실 직원 중 하나가 사무실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럴 경우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얼굴에 피가 몰리면서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끝은 언제나 내가 이겨.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본데, 네 한계는 여기까지야.”'“아…… 안 돼. 제발 그만 해요!”'커다란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여성에 그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남자와 여자의 속궁합이 중요하다는 말, 너도 들어봤지? 우리가 얼마나 잘 맞는지 알잖아. 난 언제나 너란 여자한테 미친 짐승이었어.”'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잡힌 머리가 아팠고,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는 그가 무서웠다.'“시간을…… 줘요, 1주일만.”'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자신을 놓아준 것을 알았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기 위해 잇새를 악물었다.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그렇게 미친 듯이 떨었을까?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은 그녀는 옷매무새를 바로잡은 뒤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등 뒤로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며.'''프롤로그'1장'2장'3장'4장'5장'6장'7장'8장'9장'10장'1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