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왁자함에 은휘는 그 길로 뒤돌아 나가고 싶었다. 며칠 전. 대학 시절부터 아니, 지금까지 거의 유일한 친구인 이준의 애절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발걸음하지 않았을 대학 동창 모임이었다.

꼭 필요한 기업인의 모임도 아닌 이런 모임에 절대 나타나지 않는 자신을 두고 술김에 데려올 수 있다는 내기를 걸었다며 다 죽어가는 얼굴로 자신을 찾아왔던 이준을 노려보는 은휘였다. 오늘 이곳에서의 어마어마한 술값을 책임지기로 했는데 이번 내기에서 지면 넘쳐나는 카드 값 때문에 아마도 어머니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준의 애원에 넘어간 자신이 바보였다.

자신이 들어섬과 동시에 승자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이준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와 반대로 자신의 등장으로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낭패감까지 동창들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는 것은 꽤 나쁘지 않았다. 학창시절 자신의 등 뒤에서 온갖 욕을 해대던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유쾌했다. 다만 그 후 이준이 승리자가 되어 동창들 사이를 배회하는 동안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은밀하게 몸을 슬쩍슬쩍 들이대며 곁을 맴도는 여자들의 코를 찌를 듯 독한 향수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도대체 이런 모임들은 왜 하는 것인지 은휘는 진심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조용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빌어먹을 자식. 나를 이런 곳에 밀어 넣고 본인은 아주 좋아 죽는군. 아주 죽었다고 복창해라. 내가 이 복수는 꼭 해주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여자들을 겨우 떼어놓은 은휘는 와인 바의 구석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깔깔거리는 동창들의 모습을 보며 은휘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가 저렇게들 재미있을까?’

곁을 지나치는 웨이터를 불러 세운 은휘는 진한 커피 한 잔을 부탁하고 피곤한 눈을 꾹 눌렀다. 그의 뜻대로 휘둘러지지 않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너구리 같은 권 이사와의 싸움은 다른 일보다 몇 배 더 피곤했다.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일으킨 창립 멤버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권 이사였지만 실상은 일에 미친 아버지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하며 편안하게 지금의 자리까지 편승해왔던 권 이사가 정말 가당치도 않게 자신의 것을 탐내고 있는 것이었다. 은휘에겐 아버지가 아꼈던 회사가 뺏기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것을 내어줄 만큼 바보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편하게 숨을 쉴 곳이 단 한 군데도 없군.’

떠들썩한 분위기에 시연의 작은 몸이 더욱 작게 움츠러들었다. 이 무대에 서기까지 성준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절대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었다. 마음으로는 언제나 주인공이고 싶었지만 사람들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손을 이끌고 무대로 나가 피아노 앞에 앉은 성준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시연의 두 다리가 긴 스커트 속에서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에게 괜찮다며 애써 위로하고 있었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듯 여전히 두 다리와 마이크를 잡은 두 손은 미칠 듯이 떨리고 있었다.

잠시 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시작되자 시연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주인공이었지만 그것을 두 눈에 담아 느낄 만큼 담대하지 못했기에 그저 성준에게 피해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만으로 익숙하게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시연이 노래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작은 무대 위로 향하기 시작하자 반주를 하는 성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까다로운 손님들이 온다며 피아노 연주를 부탁하는 민수의 말에 시연을 떠올린 성준이었고 오늘이 바로 그 부탁으로 만들어진 무대였다.

마이크를 잡은 두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두 눈을 감고 노래에 집중하는 시연이라는 보석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며 조심스러운 그녀의 날갯짓에 사람들을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멋지게 날아올라 보자.’

머리가 울리도록 시끄러웠던 소리가 잦아지면서 들려오는 청명한 목소리에 은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중앙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때문인지 무척이나 작아 보이는 여자는 두 눈을 꼭 감고 꽤 먼 거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동아줄인 양 꼭 잡은 채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추어로 보이는 여자의 몸짓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는 그 어떤 가수보다 훌륭했다.

노래가 끝나자 한 번도 뜨지 않았던 여자의 커다란 두 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낌없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의 커다란 눈에서 반짝거리며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고 그런 여자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반주를 했던 남자가 여자의 손에서 마이크를 빼내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