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어디야? 나 지금 패션쇼장 앞에 와 있는데.”'범우가 서 있는 L 호텔 크리스털 볼룸 앞에는 각처에서 보내온 화환과 함께 ‘노애정 패션쇼’라는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에 왔어야 하는데 시간에 맞추지 못해 범우는 밖에서 형인 진우에게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얼마 전 카페 사장 몇몇과 함께 프랑스에 갔다가 진우 부탁으로 사 온 돔 페리뇽(Dom Perignon)이 들려 있었다. 와인은 1978년산으로 현지에서도 구하기 어려웠다. '금방 나온다는 진우의 말을 듣고 범우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기둥에 기대어 기다리고 서 있자니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온다. 진우인가 하고 고개를 빼어 쳐다보았으나 나온 사람은 여자였다. '전화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는 범우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약간 핑크 빛이 도는 드레스는 등이 둥글게 파이고 상체는 타이트하지만 허리에서 무릎까지 부채처럼 퍼진 귀여운 모양이었다. 여자는 꽤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고 우아한 자태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범우가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왼쪽 발목이 볼썽사납게 휘청 꺾였다. '“엄마얏!”'제 풀에 놀란 여자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몸을 추스르다 말고 휙 뒤로 돌아보았고, 범우는 자기도 모르게 기둥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복도에 있는 사람이 둘뿐이어서 민망한 상황에 눈이라도 마주쳐 여자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칫 서로가 무안해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드레스를 입고 몸 개그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 바람에 범우는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범우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단아는 빈 복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아무도 없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었나?’'단아는 금세 의심을 지우고 다시 돌아서서 복도 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휘청거리지 않게 중심을 잘 잡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다. 그녀에겐 하이힐보다 드레스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드레스를 입어서인지 마음과 달리 걸음걸이가 자꾸 뻣뻣해진다. 중요한 자리라 긴장한 모양이다. '그녀는 전화 중이었다는 걸 깜박 잊었다가 경무의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정신을 되돌렸다. '“……어? 아냐, 오빠. ……구두가 너무 높아서 넘어질 뻔했어. 킥킥. 근데 다행히 아무도 안 봤어. ……그러게. 맨발로 다니고 싶다. 너무 불편해. 으으……. 알았어. 얼른 와. 꽃다발은 준비했지? ……응. 응, 끊어.”'범우가 살짝 기둥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단아는 막 복도를 꺾어 자취를 감춘 뒤였다. 동시에 앞문으로 진우가 나왔고, 기둥 뒤에 어정쩡하게 숨어 있는 범우와 눈이 딱 마주쳤다. 형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가 수상하다며 신고하고도 남았을 것이다.'“뭐 해, 거기서?”'진우가 황당한 듯 묻자, 슬그머니 기둥 앞으로 나온 범우는 멋쩍게 손에 든 와인 상자를 내밀었다. '“아니, 뭐, 그냥…….”'“싱겁긴……. 패션쇼 보고 가려면 같이 들어가자.”'하지만 범우는 생각 없는 듯 고개를 젓는다. '“아냐. 얼른 카페에 들어가 봐야 해.”'“가, 그럼.”'“와인은 선물이야.”'“진짜? 이거 비싸게 샀다며.”'“그러니까 선물이라고.”'“내가 마실 게 아니라 노애정 선생님한테 선물할 건데 괜찮겠어?”'“이미 형한테 선물한 거니까 어떤 용도로 쓰든 그건 형 소관이지. 나중에 직원들 회식할 때 와서 카페 매상이나 올려 줘.”'진우가 싱긋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고마워.”'“별말씀을……. 갈게.”'그렇게 말하면서 범우는 공연히 복도 끝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 너머로 사라진 여자는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얼굴이 궁금했는데 호기심으로 남겨야 할 모양이다. 진우가 배웅이라도 할 셈인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기에 범우는 그만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화장실에 다녀온 단아가 복도 끝에서 나타난 것은 진우가 패션쇼장으로 다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뒤늦게 복도 좌우를 예리한 눈빛으로 살폈다. '“아무래도 이상해. 아까 꼭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누군가가 몰래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이게 무슨 우세인가. '“아이 참. 오늘, 이미지 관리 잘해야 하는데 첫 이미지가 개그가 되면 어쩌라는 거야?”'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단아는 그 앞에서 짧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봤을지 모를 누군가가 패션쇼장 안에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전의가 불타올랐다. '“어쩔 수 없지. 누군지 몰라도 생 까는 거다.”'안면 몰수하기로 마음을 굳힌 그녀는 여왕처럼 고고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