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5일 토요일.'평소엔 오 분은 울려야 간신히 듣는 그 소리가 오늘은 왜 이렇게 잘 들리는 걸까. '환청이다. 환청이 분명하다. 어제저녁 틀림없이 알람을 꺼두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눈꺼풀이 꿈틀거린다.'시현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설마 하는 마음에 머리맡을 더듬거려 휴대전화를 찾았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이 부셔 채 뜨지 못하는 눈을 찡그린다. 휴대전화 모서리 부근을 더듬거려 버튼 하나를 꾸욱 누르자 액정에 불이 들어온다. '그와 똑같은 사진, 똑같은 문구를 한 휴대전화 배경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연인이라고 할 만한 다정한 남녀 사진 밑으로 <시현♡재효>라는 낯간지러운 문구가 쓰여 있다. 그 사진에 눈길을 줄 겨를 없이 액정의 가장 상단 오른쪽에 작게 쓰여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7시 58분.'평소 출근을 위해 일어나야 하는 시간보다도 2분이나 더 일찍 일어났다. 크리스마스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약속도 없이 집에만 있어야 하는 신세에 다른 날보다 빨리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젠장. 시현은 제 스스로 일찍 일어난 것이 영 불만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으으으으.”'뜻 모를 신음 소리를 내며 시현은 귀찮다는 듯 휴대전화를 팽개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도록, 세상과 단절되어 아침이라는 걸 잊고 다시 꿈나라로 향할 수 있도록.'하지만 알람 소리도 없이 늦잠도 자지 않은 여느 날과는 확실히 다른 오늘, 정신은 더욱 말똥해진다. 평소엔 일어나 욕실로 향하여 양치를 하면서도 눈을 감고 있고 이따금 변기에 앉아서 졸기도 하여 자신이 유달리 남들보다 잠이 많은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자신이었는데.'시현은 결국 이불을 가슴팍까지 거칠게 내리고 눈을 부릅떴다.'“후우!”'천장의 한가운데, 두 개가 나란히 꽂혀 있어야 할 형광등이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깜빡거리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기에 신경이 쓰여서 갈아야겠다며 빼둔 것인데 아직까지도 이 모양인 것이다.'사실 대한민국 성인의 대다수가 그렇듯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규칙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그녀에게 형광등의 부재로 인하여 방 안의 밝기가 어두워진 것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다. 아니, 외려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화장대는 너무 눈이 부셔서 눈 화장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으니 조명이 조금이라도 어두워진 것은 생활을 좀 더 편하게 해주었을지도.'“마트에 가야겠다.”'어차피 정신은 말똥말똥해졌고 마트는 꼭 가야 하니, 아침 먹기 전 밥맛도 좋아질 겸 운동 삼아 장을 보기로 했다.'어제 엄마 순희가 여행 가시면서 커피가 다 떨어졌다고 하셨고, 스킨이랑 폼 클렌징도 떨어져 가니 미리 사둬야겠고……. 시현의 머릿속에 사야 할 것들이 하나둘 줄지어 떠올랐다.'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8시가 지나고 있었다.'“어으, 춥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등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오래된 주택이라 외풍이 제법 센데다가 밤새 보일러의 온기도 없이 있었으니 전기 매트를 깔아 놓은 침대 속이야 따뜻해도 그 외에는 절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제 팔을 껴안고 욕실로 향하여 대강 눈곱을 떼어내고 양치를 한 시현은 습관처럼 모닝커피를 마시려고 부엌 조리대의 커피 메이커 앞에 섰다. 그리고 조리대 바로 위에 서랍을 열어 커피를 찾아 손을 뻗던 순간 시현의 입에서 외마디 탄식이 흘러나왔다.'“아!”'부부 동반 여행을 가시기 전, 커피가 없다고 말한 어머니, 순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마트에 가서 살 물건들을 생각하면서 방금 전에도 똑 떨어졌다며 커피를 떠올리지 않았는가.'“으그! 붕어도 너 같지는 않겠다…….”'서랍을 닫으며 중얼거리는 시현의 말투가 자조적이었다.'시간이 너무 짧아진 기억력의 원인을 찾아보지만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그저 바빠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녀가 정신 바짝 차리고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소소한 일들은 잊고 사는 것뿐.'순희가 겨울에 좋다고 입에 달고 사는 유자차라도 따끈하게 데워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여는 찰나 방에서 벨소리가 들려온다. 시현은 재빨리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불을 들춰 휴대전화를 찾아내 액정을 확인했다. 아버지, 춘환이었다.'“아빠!”'시현의 활기찬 목소리에 춘환은 그녀가 잠을 자다 받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다.'[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일찍 깼나 보네?]'“응. 아빠는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새벽에 일어나서 온천에 몸 좀 담그고 왔어. 이제 막 숙소 와서 아침 먹으려고.]'“아, 그래요? 따숩게 입고 가신 거죠?”'[네 엄마가 너무 껴입었다고 덥겠다고 했는데, 어제 애인 전화 받느라 배웅도 못하더니 아빠가 뭐 입고 갔는지도 모르는구나?]'시현이 애인이 생긴 뒤로 춘환은 이렇게 종종 그녀의 마음을 시험하듯 질투를 하는 척을 했다. 그것이 귀엽기도 하면서 아들인 강우보다 자신을 더 아껴 주던 그를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에 시현은 새삼 마음이 짠해져 왔다.'“죄송해요. 그 사람 외국에 있어서 전화 통화하기 어렵다는 거 아빠도 알잖아요. 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었어. 배터리가 똑 떨어져서 충전기에 막 꼽은 터라 엄마, 아빠 배웅하려면 충전기 빼고 전화 받아야 해서 그랬단 말이에요.”'[흥. 말이나 못하면…….]'“에이! 크리스마스에 애인 타지에 보내고 혼자 방콕이나 하는 딸 불쌍하지도 않은가. 이해 좀 해줘요, 응? 아빠아아앙.”'수화기 너머로 잠시 말이 없었지만 자신의 애교에 춘환이 미소를 지그시 짓고 있으리라는 걸 시현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런데 엄마는요?”'시현이 화제를 바꾸자 춘환도 좀 전까지의 대화를 잊고 즉각 대답을 해준다.'[옆에 있지. 온천하고 와서는 몸이 노곤하다고 오자마자 곯아떨어졌어.]'“후후. 그래요? 아빠도 옆에서 같이 주무시지.”'[괜찮아, 아빠는. 밥 꼭 챙겨 먹어라.]'춘환이 전화를 건 용건이 이제야 나온다. 시현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네. 아빠두요. 엄마랑 재밌게 놀다 오세요.”'[그래. 그럼 내일 보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