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거든. 다 같이 하는 회식이긴 한데, 그래도 이왕이면 친구보단 새로운 인연이 낫지 않겠어? 시환아, 이 누님이 네 곁에서 떨어지길 원한다면 오늘 일이 벌어지길 빌어다오! 하하하하!’'해외로 나가겠다 길래 넓은 아량으로 보내줬다. '잡을 여력도 없었지만.'경찰이 되겠다는 것도 봐줬다. '찍소리도 못했지만.'그런데 이젠 남자라고?'어이, 어이, 강도경. '이건 좀 심하잖아!'잘못이 있다면 강도경이란 여자에게 제 마음의 20분의 일도 들어내지 못하는 윤시환에게 있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경에게 숨기고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환은 적어도 30분의 일 정도는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윤시환의 기준에서.'제 사랑을 깨달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시환이 풍기는 날카로운 분위기와 또 그 못지않은 강한 인상 때문에 학창시절부터 철부지에다 거의 남자 같았던 도경과는 다르게, 그는 유독 여학생이며 남학생이며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시환의 곁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오직 단 한 사람, 강도경 뿐이었다. 왜냐고 물으면 도경은 '친구니까'라고 대답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윤시환이라는 남자는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어왔기 때문에 자신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일종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같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시환과 가까워지기 위해 수많은 여학생들이 그의 곁을 맴돌았지만 시환은 그들의 존재를 본 체 만체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가 학교 내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도경이 유일했다. 한번은 시환과 거리낌 없는 말과 행동을 주고받는 도경이 미워 일명 시환의 '팬클럽'이라는 여학생들이 집단으로 도경을 폭행하기 위해 계획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발칙한 계획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묻히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계획을 미리 알고 온 시환이 여학생들을 거의 죽일 듯 노려보며 그녀를 건드리기만 한다면 여자라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해버리고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도경과 시환의 고등학교에선 유명한 일화였다. 물론, 철저하게 입막음을 해놓은 시환으로 인해 도경은 아직까지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시환이 도경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건 그 일 하나가 아니었다. 도경이 태권도 연습을 하다가 다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지리 필기시험을 치고 있던 윤시환이 어찌 알았는지 시험 도중 뛰쳐나가 그녀를 응급실로 데리고 간 사건이라던가, 다른 여자애들이 주는 '러브 초콜릿'은 받자마자 밟아버리거나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면서 강도경이 주는 '우정 초콜릿'은 안준다는데도 억지로 받아낸다던가, 도경의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백을 하는 여자애를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과감하게 무시하거나 아님 모욕을 주면서 도망가게 만들어버린 것과는 달리 웃으며 정중히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말했다던가 하는. '잘만 생각해보면 시환이 도경을 좋아한다는 사실 정도는 아무리 눈치가 없는 여자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들이 많았지만 눈치에 '눈'자도 존재하지 않는 둔탱이 강도경은 '친한 친구니까'란 이유 하나로 모든 상황에 대한 의문점들을 해결해버렸었다.'그 후로 10년간, 둘 사이엔 발전할 기미가 보이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존재했으나 언제나 도경의 제로에 가까운 눈치와 유독 도경 앞으로만 가면 콩알만큼 작아지는 시환의 소심함 때문에 오래되고 가족 같은 친구 이상은 절대로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다를 거라 생각했다. '아니, 달라져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3년간 그녀를 떠나보내며 잊기 위해 조직이란 곳에 몸을 실었으나 그가 '조직 보스'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그녀에게 제대로 된 고백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시환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번에 돌아온다면, 이번에 돌아온다면 반드시……. '매해가 지날수록 그녀를 향한 제 갈증이 도통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경이 한국을 떠난 지 5년째가 되는 날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 고백을 할 것이라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상황에 도경이 돌아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그도,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당황했지만 도경의 앞에선 드러낼 수 없었다.'그리고 한 달. '도경이 경찰이 되겠다며 시환에게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을 하고 난 후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비록 내키진 않지만 경찰이 된 그녀를 축하해주기 위한 축하파티 자리를 만들어 고백을 하려는 야심찬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시환이다. 게다가 민준에게 말해 신조파의 말단 조직원들에게까지 한동안은 움직이지 말고 쥐죽은 듯 지내라는 명까지 내렸었는데 남자라니. 미치고 환장할 따름이다. '“기회 따윈 없는 건가…….”'항상 그랬다. '잡으려 다가가면 부리나케 도망가고, 잡았다싶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끊겨버린 핸드폰을 한동안 꽉 움켜쥐던 시환은 근처의 소파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