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비극, 운명의 시작 ''''1996년 1월. ''올려다보는 것조차 힘들만큼 높은 건물 옥상에는 조금 전부터 한 남자의 움직임이 의심스럽게 포착되었다. 남자는 선글라스 속에 눈빛을 감추고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그곳에는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케이크를 사들고, 막 베이커리를 나서고 있었다. '남자는 품속에 감춰두었던 40밀리 구경 슈투름루거 자동권총을 꺼내들고 조준을 했다. 탄은 오직 한 발뿐이었지만, 그는 좀처럼 긴장 하지 않는 듯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순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섬뜩하리만큼 정지된 그의 포커페이스에서는 실수의 여지도, 긴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피슉. '소음기가 장착된 소리 없는 사격이었지만, 갑작스러운 피의 분출로 주위 일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사내의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옥상 위의 킬러에겐 눈을 두지 않았다. 분주한 거리와 달리, 허전하기 그지없는 옥상 위의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는 듯, 유유히 건물 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신고를 하는 사이, 남자는 이미 군중들의 틈에 서서 여유롭게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죽음의 문턱에서 헐떡이던 사내가 기어이 숨을 거두자, 남자의 입가엔 섬뜩할 정도의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잔인한 감흥은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임무완수의 감흥에 젖어있던 그 순간, 남자는 뒤통수를 자극하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마치 전류가 흐르듯 온 몸을 타고 전해지는 싸늘함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수많은 군중들 사이로 한 소녀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의 기분 나쁜 소름에 오싹해지고 말았다. '소녀는 다름 아닌 죽은 사내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죽은 사내를 끌어안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오열과 함께 소녀는 펑펑 눈물을 쏟으며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기 가득한 눈빛을 선글라스 안에 감추긴 했지만, 세상의 끝과 마주친 듯 슬픔에 잠긴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남자는 아찔해졌다. 아주 잠시였지만, 남자는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무섭게 뛰는 심장을 제어시켰다. 그는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건물 옆에 세워 두었던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한 시 바삐 그곳을 벗어났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거라.” '소녀는 케이크를 사오겠다는 아버지의 손을 도무지 놓기가 싫어졌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냘픈 소녀의 어깨를 감싸 쥔 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이 보이질 않으니 그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져 갔지만, 한기가 느껴질 정도의 불안함은 열일곱 소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투정으로 여겨지는 듯 했다. '“아빠, 우리 그냥 집에 가면 안돼요?” '“녀석, 오늘이 네 생일이잖니.” '“케이크 말고, 미역국 먹고 싶어요, 미역국.” '“허허, 변덕꾸러기 같으니라고. 작년까지만 해도 미역국 말고 케이크가 먹고 싶다더니.” '“생각이 바뀌었어요. 오늘은 그냥 미역국 먹을래요, 아빠. 미역국 끓여 주세요.” '“원 녀석도, 걱정 마라. 이번 생일에는 미역국도 끓여주고, 맛있는 케이크도 사주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