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3시간에 걸쳐 서른세 명의 사건을 해결하고 법정을 나서는 판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자신의 사무실로 천천히 들어간 판사는 벌떡 일어서는 미선에게 손을 들어 올려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 곧장 자신의 개인 공간으로 들어갔다. '언제 준비해 놨는지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가지고 따라 들어온 미선이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한 유리컵을 판사에게 내밀었다.'“고마워.”'판사가 힘없는 미소와 함께 컵을 받아 들자, 미선은 한숨을 내쉬면서 한마디 했다.'“판사님, 제발 위에 항의라도 하세요. 이렇게 일하시다가는 쓰러지시겠어요.”'판사는 살짝 미소를 보이고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러고는 탁 소리를 내며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선 마치 깊은 정글 속으로 사냥을 떠났다 돌아온 아마조네스처럼 멋진 박력이 내비쳤다.'“하아…….”'미선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번에 내쉰 한숨은 아까의 짜증스런 한숨과 근본적으로 그 의미가 달랐다. 자신이 모시는 상사인 판사의 멋진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낸 것이다.'판사는 180센티미터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체격에 어울리는 호탕하고 멋진 성격을 가졌다. 그것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미선은 법원행정직 7급 공무원이다. 올해 나이 서른둘, 이 일을 무려 8년이나 해 오면서 그녀가 모신 판사만 해도 벌써 4번째였다. 그중에서 미선이 존경심을 품고 모신 판사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판사님밖에 없었다. '판사님 밑에서 일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 올곧은 성격과 공정한 판결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주변에서 암암리에 들어오는 권력의 압박과 돈의 유혹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치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다. 또 별것 아닌 케이스에도 물리적 협박이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겁을 먹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선이 조금만 더 과감했다거나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 있었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망설이지 않고 판사님을 유혹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그 충동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판사님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은 막강했다.'학창시절 여학생들로부터 꽤 구애를 받았으리라. 매일 사물함이나 책상에 초콜릿과 꽃다발이 가득하고, 쉬는 시간마다 커피며 음료수를 놓고 가는 후배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겠지. 어디를 가든 판사님 뒤로 한 부대는 될 만큼의 꼬리를 달고 다녔으리라.'미선은 판사님을 볼 때마다 그런 분이 여자로 태어난 것이 한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였다면 정말로 천하를 호령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판사님은 여자의 몸으로 세상의 정상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판사님은 그러고도 남을 만한 큰 그릇이었다.'미선은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판사님의 기다란 목덜미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꼴깍’ 하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요란한 나머지 미선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져 버렸다.'“미선 씨, 아무리 군침 삼키고 쳐다봐도 난 레즈비언이 아니랍니다.”'미선에게 가까이 다가온 판사가 그녀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미선은 다시 한 번 침을 꼴깍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벌게진 얼굴로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