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시커먼 어둠이 고요히 존재하는 날은 홀로 떠 있는 일그러진 달조차 파고들지 못하는 지독한 어둠이 있다. '1993년 12월 27일 밤이 그랬다. '불길한 어둠의 그림자가 한남동 주택가를 에워쌌다. 휑휑거리며 우는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출구조차 보이지 않는 까마득히 긴 골목엔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었다. 마치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인양 아가리를 벌리고 혹독한 겨울바람이 일으키는 스산하고 기이한 울음소리만 토해낼 뿐이다. 딱 붙은 두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골목 입구는 음산하고 스산한 기운을 더욱 요란하게 뿜어내었다. '“야아, 지민아, 우리 돌아서가자. 이 골목 무섭단 말이야.”'막 골목 입구에 접어둔 두 그림자 중 좀 더 작은 그림자가 발길을 멈춰서 우겼다. '목소리는 이제 갓 변성기를 지났는지 앳되었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퍽치기 당한 아저씨도 있고 또 이상한 애들이 득실거린다고 네가 말했잖아. 나 무섭단 말이야. 우리 저쪽으로 돌아가자, 응?”'시시때때로 방향을 바꾸며 몰아치는 매몰찬 바람에 언 입술 근육을 움직이려니 힘이 드는지 소녀의 말은 어딘가 어눌했다. 한풍이 몰아칠 때마다 소녀의 허연 입김을 뿜어내는 작은 입에선 이빨 빠진 엉성한 말들이 앞 다투어 튀어나왔다.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들면서부터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의 바람벽을 할퀴고 지나는 바람소리는 시퍼런 날을 세운 비수와 같이 날카로워졌고, 그 음울한 소리는 어린 두 그림자에게 섬뜩한 공포를 가져다주었지만 지민에겐 익숙한 골목길이었다. 태어나서 쭉 15년을 보낸 동네라 그녀는 친구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여기서 너희 집까지가 어딘데 돌아가자고 하냐? 선경이 너 진심이야? 너도 알겠지만 큰길로 가면 이 골목길로 가는 것보다 배나 시간이 걸린단 말이야.” '지민은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어림없다는 투로 말을 받았다. '사실 그녀도 내면에선 갈등을 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반드시 이 골목은 피해가라는 엄마의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친구와 함께 있고 무엇보다 움츠린 어깨와 꽁꽁 얼어가는 발가락, 그리고 뺨을 에이는 칼날 같은 바람이 걱정으로 가득했던 엄마의 부탁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추워 죽겠다. 빨리 가자.”'지민은 선경을 잡아 당겼다.'“난 싫어! 겨우 몇 분 차이로 후회할 일 만들지 말자. 우리 아빠가 그랬단 말이야. 조심해서 해될 것은 없다고. 지민아…… 돌아가자, 응?”'지민과 선경의 사소한 실랑이로 인한 작은 소음은 어둠을 뚫고 골목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갔다.'“눈 딱 감고 막 달리자. 크게 소리치면서. 어때?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지민은 강력하게 우기며 어쩌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절친한 친구 선경이의 벙어리장갑 낀 손을 꼭 잡았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 받은 것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선경이는 내일 아침이면 가족을 따라 호주로 떠난다. 그녀의 부모님들이 오래전부터 이민을 고려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선경이나 지민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둘은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고 선경이 논현동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잠자는 시간 빼고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친 자매 같은 사이이다. 그런 그녀들에게, 그것도 한참 예민한 사춘기를 겪고 있는 시기에, 이별은 끔찍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