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은은한 달빛을 따라 발소리를 죽여 가며 움직이는 검은 복장의 사내들이 있었다. 인형(人形)은 약 넷 정도, 그림자를 채 따라잡을 새도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와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만석꾼 기와집의 으리으리한 담장을 차례차례 훌쩍 뛰어넘은 사내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서 곧장 별채의 한 거처로 스며들었다. 창호지가 곱게 발린 문을 조용히 여는 순간 안에서 분내가 은은하게 풍겨 왔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사내들 전부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방문은 다시 소리도 없이 닫혔다. 그야말로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보다 가벼운 몸놀림들이었다.'“으음, 역시 여인의 내음이로다.”'그때 지금껏 선두에서 달리던 사내가 소리 죽여 중얼거리자 빙 둘러 서 있는 사내들이 낮게 혀를 찼다. 방 안은 고요했고, 이 방의 주인은 병풍 앞에 원앙금침을 깔고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불 위로 방금 물에 씻은 듯 말간 얼굴과 함초롬한 얼굴의 선,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있었다. 미동도 없이 한일자로 아름답게 잠들어 있는 여인은, 그 잠이 든 모습에서도 교양과 품위가 배어 나오는 그야말로 명문가의 여인이었다.'“아름다운 나의 누이……, 어찌 아직도 이리 고운지.”'다른 사내들은 혹시라도 들킬세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데 선두에 서서 달리던 그 사내만은 태평하게 할 말을 다 내뱉고 있었다. 복장은 어둠에 흡수되기 쉽도록 모두들 검은 도포, 검은 복면 차림이었다. 다만 그 주절거리길 좋아하는 사내만은 검은 복장 위에 소매가 없는 자주색 겉옷을 덧입고 화려한 도포 끈(대대) =[大帶]으로 마무리했는데, 금사로 수놓은 문양들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복면 역시 도포와 같은 색으로 계집 도둑질하는 이 순간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었다. 안 그래도 멋 부리다가 남의 눈에 띄어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충고를 몇 번이나 들었지만 그에게는 우이독경이었다.'“휘, 자네 지금 그런 말을 할 경황이 있다고 생각하나?”'한 사내가 검은 복면 아래로 드러나 보이는 유난히 깨끗한 검은 눈동자를 휘에게 고정하고서 그를 타박했다.'“경황이야 만들면 되는 거지, 무슨 걱정.”'휘는 코웃음을 치고는 한 손을 까딱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나머지 두 사내가 품 안에서 커다란 천 자루를 꺼냈다. 그리고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여인에게 다가갔다.'분명히 신혼부부의 방일 텐데, 불룩 솟은 이불의 둔덕은 하나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깊이 잠들어 있는 이 여인은 청상과부였다. 그것도 청상과부 중에서도 가장 가여운 마당과부이니, 이는 신부 집 안마당에서 치르는 초례를 겨우 올리고 이내 남편을 잃은 과부를 말한다.'천 자루가 여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 기척을 느낀 여인이 눈을 번쩍 떴다. 동그란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비명을 내지르려는 순간 휘가 달려들어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고 그대로 사내들에게서 자루를 빼앗아 덮어씌웠다.'“모두 서둘러!”'여인을 담은 자루를 어깨에 메자마자 휘는 마치 축지법이라도 익힌 사람처럼 단숨에 별채의 마당을 가로질러 담 너머로 사라졌다. 여인의 비명 소리 하나 흩어질 새도 없는 기가 막힌 빠르기였다. 마당 가운데까지는 함께 뛰긴 했으나 휘의 신출귀몰한 동작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로 처진 남은 사내들은 주섬주섬 담을 넘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리 혼자 날아다닐 거면서 도움을 청한 연유를 모르겠다니까.”'“그러게 말입니다, 신위 형님.”'“내 생각에는, 작업은 저 친구 혼자 하되 들켰을 때는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인 것 같아.”'“동감입니다.”'흉을 보고 있긴 했지만 신위라 이름 불린 사내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돌고 있었다. 음침한 복면으로도 숨길 수 없는 깨끗하고 청명한 눈동자 역시 다정한 기운으로 물들었다.'“자, 어서 서두르자. 새벽 동살이 비치기 전에 마무리 지어야 하니.”'사내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일이 성사되자마자 저 혼자 훌쩍 날아가 버린 휘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한시라도 빨리 가려면 속도를 더 높여야 했다. 인가의 담을 지나 싸리 울타리 초가를 몇 채나 뒤로하고 논틀밭틀을 접어들어 산길로 달려 올라갔다.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그나마 은은한 달빛의 세례도 받지 못해 완전한 암흑이었지만, 사내들의 날랜 동작에는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이와 똑같은 길을, 휘는 여인까지 들쳐 업고서 이미 먼저 달려간 것이다. 사내들은 휘에게 뒤처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매번 그런 결과로 끝나 버린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밤이슬을 맞으며 파르르 떨고 있는 나뭇잎과 들꽃에서 담숙한 향기가 풍겨 왔다.''으리으리한 대가 댁에는 왔다가 간 흔적조차 없었다. 단 하나, 귀신같은 솜씨만을 남기고 훌쩍 담을 넘어 인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산중의 한 허름한 민가에 도착한 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여인이 들어 있는 자루를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오면서 얼마나 등을 두들겨 맞았는지 뼈까지 다 뻐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때리기도 지쳤는지 자루 안의 여인은 돌처럼 정지해 있었다.'‘기절한 건가?’'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루를 열어 펼쳤다. 역시 여인은 자루 안에서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보쌈이 여인에게 정도 이상의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짓을 견뎌 낼 정도의 배포라곤 없는 그저 꽃과 같은 여인이었으니. 가지런히 빗어 넘겼을 머리카락이 몇 올 흘러내려 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누이, 미안하오. 가마라도 대령했어야 했는데.”'휘는 사과와 비판을 동시에 하고는 자루 안에서 여인의 어깨를 안듯 해서 끌어냈다. 휘의 체격에 비해 너무나 작은 몸이 가뿐하게 들렸다. 휘가 여인을 안아드는 순간 허름한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가지런한 인상의 젊은 선비가 나왔다.'“서, 성공하셨구려. 다은 낭자는…….”'휘의 품에 안긴 여인을 발견한 남자가 버선발을 짚신에 구겨 넣듯 해서 달려 내려와 토방을 디디고 섰다. 그리고 받아 안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휘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대로 그를 스쳐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선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짚신을 벗고서 안으로 따라 들어가야 했다.'“이미 출가한 여인에게 낭자라니요.”'다은을 윗목의 이불에 눕힌 휘가 낮은 목소리로 꾸짖듯 말하자 뒤편에 서 있던 선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출가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내의 여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가슴속의 그녀는 영원히 순결한 여인이오.”'휘는 사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빙긋 웃었다. 혼인에 의해 멀어진 인연임에도 이 사내의 마음은 이렇듯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바로 이 보쌈을 하게 된 본래 이유였다. 휘는 이불을 끌어 기절해 있는 다은의 목까지 조심스럽게 덮어 주며 낮게 말했다.'“누이는 혼인을 하였다고는 하나 마당과부요. 순결로 치자면 변한 건 없지요.”'“알고 있습니다.”'“그러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빼앗기지 마시오. 꼭 행복하게 해 주시오.”'“고맙소. 내 반드시 그리하리다. 이 하찮은 목숨이라도 괜찮다면 그녀를 위해 바치리다.”'“목숨 바칠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여봐란 듯 살아서 백년해로나 할 궁리를 하시오.”'휘의 직설적인 말에 선비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붉어졌다. 그때 여인의 목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손가락이 움찔하고 이내 그 고운 눈이 번쩍 떠졌다. 등잔 하나로 밝힌 방은 어두웠고 여인은 앞의 사내들이 오로지 강도일 거라 인식해 반사적으로 앞섶을 움켜쥐며 다른 손으로는 저고리 안에 숨겨 두었던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웨, 웬 놈들이냐! 내, 내 몸에 손이라도 까딱했다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