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서 백해무익이라는 그놈의 술. 탈무드를 인용하자면 악마가 인간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라는 그 술. 바로 그 술 때문에 그녀는 지금 머리가 돌아버리다 못해 미쳐버릴지도 모를 상황에 도달하게 됐다.'그녀의 나이. 방년이라는 말을 쓰기 뭣하지만. 정확히 스물여덟. 완벽한 어른이라기에도, 그렇다고 어리다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아니 어떻게 보면 딱 좋겠다도 싶은 이 나이에 그녀가 미치겠다, 생각한 건 바로 자신의 침대. 그것도 옆 자리에 백설기처럼 새하얀 알몸으로 떡 하니 누워있는 청년 때문이었다. '남들은 태어나서부터 그리 친한 친구가 있으니 좋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친구이신 걸로도 모자라 같은 유치원에서 만나 기억이 날 때부터 친구이니 적어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을 세월 간을 남매 혹은 형제 이상처럼 지내왔는데 이 무슨 해괴한 변고란 말인가?'한참을 앉아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길고 매끈한 두 다리를 이용해 팔자 좋게 누워있는 그를 침대 아래로 확 밀어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다시 침대로 올라오려던 행동을 순간 거짓말처럼 멈췄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의 그가 오늘 따라 더 하얗게 보였다. 새하얗게 질려 핏기도 돌지 않을 만큼 당황한 것이었음은 28년 지기 친구인 그녀도 잘 알 수 있었다. 그가 당황해하는 것은 그녀도 거의 보지 못한 것이었으므로 저렇게 티 나는 동요는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그가 괴로운 듯 머리를 움켜잡았다. 슬슬 올라오는 숙취와 함께 말도 안 되는 이 빌어먹을 상황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뭐라 서로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문 밖에서 똑똑, 하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트로 앞을 가린 채 그의 옷을 몽땅 옷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그 옷장 속엔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네. 들어오세요.”'너무 다급하게 말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뒤집혔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뒤죽박죽이었으니까. 곧 문이 열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들어왔다.'“출근 준비 안 하니? 속은 괜찮아? 참, 훈민이는? 어제 꽤 취한 것 같던데.”'“몰라. 갔나 보지. 일어나보니까 없던데.”'“옷은 왜 그렇게 벗고 있어?”'“어? 아, 답답해서 벗고 잤나 봐. 씻고 내려갈게요.”'문이 닫히자 그녀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평소엔 잘 나지도 않는 식은땀이 등 뒤로 줄줄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출근을 해야 하는 평일이었으니 이 머리 아픈 상황을 빨리 수습할 방도도 없었다.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마지막으로 바지까지 입었을 때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옷장 문이 열리며 훈민의 멀건 얼굴이 드러났다.'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책상 의자에 앉아 훈민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냥 의자에 앉는 것뿐이었는데 확실히 몸이 영 좋지 않은 것이 어젯밤 평소 하지 않던 격렬한 운동 뒤 찾아온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머릿속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머리로는 ‘친구와 이래선 안 돼!’를 외치고 있었지만 몸은 저도 모르게 쾌락을 원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굶은 지 조금 오래 되기도 했으니. 그리고 늘 이런 상황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건 여자였다.'“뭐, 어젠 서로 취해서 정신없었고 또 본능이란 게…….”'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완전히 잠에서 깬 듯 훈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옷장 속에서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 튀어나왔다. 그는 이미 아랫도리는 완벽히 입고 있는 상태였다. '“병원 가봐야 되지 않겠냐? 나 어제 콘돔 안 썼는데. 그럴 정신도 없었고. 사후피임약이란 게 몸에 안 좋다고 하긴 해도 싫을 거 아니야. 만약 사태에 대비해서라도.”'훈민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마저 옷을 입고 있었다. 분명 이런 상황이 오면 이성적 사고방식을 가지는 건 여자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훈민은 남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혹 제 3의 생명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물론 그녀도 출근하기 전 병원에 들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과도 하지 않고 저딴 식으로 말하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핵주먹을 날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다.'“지각할 것 같으니 이야기는 근무 끝나고 하자. 먼저 나간다.”'훈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창문을 통해서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부터 잘하던 짓이었다. 둘이 몰래 술을 마셨던 적이 꽤 많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문제아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부도 꽤 잘했다. 아니, 많이 잘했다. 전교 1, 2등을 왔다, 갔다했으니까. 그리고 남들 다 부러워하는 일류대도 들어갔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 그것도 차석으로 법학과를 들어갔다. 그런 그녀와 그는 정반대였다. '훈민은 학교에 다닐 때에도 싸움질하기 1등. 시비 걸기 1등. 물론 전교 꼴등까지는 아니었지만 거의 근접했다. 그리고 대학은 다들 알다시피 보기 좋게 낙방. 하지만 재수 따윈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말했고 결국 그는 고졸로 남았다.'그러다 그와 그녀가 같은 직업을 갖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도 다 술이 문제였다. 술에 한참 취해서 그가 한다는 말이.'“나 경찰시험 준비한다.”'그의 말에 그녀는 바로 비웃음을 날렸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저런 녀석이 경찰이 된다면 이 나라가 분명 망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순경? 야, 야, 너 붙을 수나 있냐? 너 영어도 아예 못 하잖아. 그거 영어도 보는 거 아니야? 들어보니까 수능보다 더 어렵다던데?”'“대강 가르쳐 줘봐.”'“웃기시네. 너 그냥 공부 좀 해서 대학이나 좀 들어가. 우리나라가 어떤 줄 알어? 대학 졸업장도 없으면 무시하기 일쑤야. 그리고 아버지 생각도 좀 해라. 아저씨 여기저기서 아들은 어디 대학 갔냐, 말 되게 많이 들으시는 모양이던데. 그리고 차라리 내가 시험 본다면 모를까.”'“너 지금 말 다 했냐? 그리고 꼴에 경찰은 무슨. 너 100m달리기 20초 넘잖아.”'“웃기지 마! 내가 왜 20초가 넘어! 너 웃긴다? 됐어. 내가 너 꼴 보기 싫어서라도 경찰 시험 본다!”'“너 그 말 진짜지?”'“진짜야. 내가 내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안 보면 내 종이 되겠다는 소리?”'“좋아.”'그게 화근이었다. 술김에 한 말 때문에 그녀는 그와 함께 경찰 시험을 보게 되었다. 결국 경찰 준비 2개월 차인 그녀는 단번에 경찰에 합격했다. 그리고 1년 간 준비했던 그는 똑 떨어졌다. '처음엔 경찰에 별 의의가 없었지만 그녀는 우선 합격했기도 했고 자신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체력도, 면접도 열심히 준비했다. 그리고 단번에 합격했다. 그녀의 학교에선 왜 간부시험을 보지 않고 순경시험을 보았냐고 했다. 차석으로 입학한데다 입학한 뒤로 줄곧 1등 자리도 놓치지 않던 그녀였다. 그래서 그녀에게 기대를 하고 있던 교수들은 모두들 그냥 포기하고 사시를 준비하기를 원했었다. 그녀도 물론 이렇게 딱 붙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자리는 지금 이 자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모두들 아쉬워했지만 그녀는 최소 이수 학점만을 취득해 결국 졸업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교수님들께 감사인사를 드렸다.'물론 그 다음 시험에 그도 당당히 그녀를 치고 올라왔다. 그가 합격하게 된 것에 대해선 그녀의 공도 상당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그에게 공부를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훈민이라는 남자는 어찌나 뻔뻔한 것인지 이제껏 4년이 넘도록 밥 한 번 산 적이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몇 번이나 헝클었다. 이 모든 것이 술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술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말로만 술을 끊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행동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