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침대에 앉아 규태가 놓고 간 노트북을 덮으려던 재희가 바탕화면으로 깔아 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꼬마아이. 만국기 펄럭이는 파란 하늘 아래, 남자 둘의 웃음이 싱그럽고 어여쁘다.'시간이 어쩌면 이렇게 빨리 지날까. 벌써 어제의 일이 되었다. 아직도 귓가에는 그때의 함성과 흥겨움이 남아 있는 듯해 재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달리기 1등, 그리고 노래자랑 인기상…….'급조된 재우네 가족이 축제마당을 휩쓸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마 일찍 결혼한 젊은 부부와 큰 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줌마라는 호칭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 나이까지 언제 그렇게 웃고 신나게 움직여 본 적이 있었나. 부상으로 받은 컴퓨터와 세탁기를 싣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뿌듯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오는 동안, 서울로 돌아가다가 연락을 받았던 규태는 보스의 지시에 인터넷 설치기사를 수소문해야 했다.'『왜, 불만 있습니까?』'[가끔 대표님은 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인 줄 아십니다.]'『능력을 믿으니까.』'[아니, 갑자기 동네에 인터넷을 설치하라 하시면……. 제가 그 동네 집사입니까?]'전에 없이 규태는 끊임없이 구시렁댔다.'그럼에도 윤의 차가 재우의 집에 도착했을 때, 인터넷은 이미 개통이 이루어져, 컴퓨터를 설치하니 바로 인터넷도 가능하게 되었다. 다행히 연구소에 들어와 있는 인터넷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과정이야 어떻든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도 인터넷이 가능하게 되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어 뛸 듯이 좋아하던 아이의 웃음이라니. 자신은 언제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있던가. 물질적인 것은 항상 풍족했으니,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없던 유재희의 유년시절.'재희의 얼굴 위로 실낱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재우가 지난밤 보낸 이메일도 방금 읽고 답장을 보낸 터였다. 그때 들고 있던 휴대전화의 진동이 부르르 울렸다. '[인터넷 잘 됩니까?]'“잘 돼. 스마트폰도 뻥뻥 터져.”'[설치기사 수배하느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또 전에 없이 생색을 낸다. 평소라면 찌릿 눈총이라도 보냈을 텐데, 감정이 부드러워진 것일까. 규태의 넉살이 싫지 않았다.'“아. 그리고, 이 실장.”'재희가 전화를 끊으려는 규태를 불렀다.'[예.]'“연구소…….”'[예?]'어젯밤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맴 돌던 것을 해결해야 마음이 개운해질 것 같다. 노트북 화면의 윤의 얼굴을 바라보던 재희가 작게 한숨을 지었다.'“아랫마을에 마을 회관 하나 지어 봐.”'[마을 회관이요?]'규태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민들이 계속 민원 넣었는데도 안 된 걸로 알고 있어.”'이곳에 오던 첫날, 윤과 마을 이장이 하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니, 그것을 떠나 산비탈을 휘젓고 다니며 뛰어노는 아이들에게도 재희는 무언가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나만 컴퓨터 생겨서 친구들한테 미안하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재우가 했던 말도 언뜻 떠올랐다.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책이 가득 들어찬 서재가 있어야 해. 동네 아이들 함께 모일 곳도 없었으니, 모여서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도 만들고, 마을 사람 다 모여 잔치를 열 수 있는 강당도 있어야 할 거야. 최대한 빨리, 하지만 견고하고 튼튼하게. 그렇게 지어.”'뜬금없는 명령이었지만, 재희가 생각 없이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왜 아무 말도 안 해?”'[제가 그곳 집사 맞는 것 같습니다.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하나, 생각 중입니다.]'재희가 규태 모르게 작게 웃었다.'“할 사람 결정 다 해 갖고 와. 오래 걸리는 것 싫으니까.”'[진행이야 시작해 봐야 하겠지만, 건물 짓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지요.]'“얼마나 걸릴까?”'[못 해도 두세 달은 걸릴 겁니다.]'두세 달이라.'휴대전화를 끊은 재희는 떠날 날을 가늠하며 눈매를 가늘게 했다.'휴가라고 생각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기어이 꺼 두었던 휴대전화도 켰으니 이제 업무 보고도 받아야 될 터였다. 한시도 자신의 위치는 잊어 본 적 없었다.'재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또다시 미련이 생겨 바탕화면 속 한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단정한 얼굴선,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매력적인 입술에 서린 선한 웃음.'선우윤.'알 수 없다, 이 남자는.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니, 이렇게 불안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를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그 남자의 상처가 커질 것이라는 것.'오늘 새벽, 그는 산으로 갔다. 그 자신의 프로젝트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그가 몇 년 동안 준비해 왔다는 한국의 야생화 도감 작업을 얼핏 보았을 때, 재희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셀 수 없이 많은 사진과 꼼꼼한 설명을 읽다 보면 그가 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손짓 하나하나 선명히 그려졌다. 세밀화로 그려진 그림을 보면, 작은 야생화 앞에 엎드렸을 그 남자가 문득 문득 떠올랐다. 반듯한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까지도 선명하게, 그렇게.'갖고 싶은 것일까.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하룻밤 유희라 하기에 이미 스무 살 초반 철없던 유재희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순수를 너무 깊게 알고 있다.'아니다. 모두 변명일 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그러다 문득 재희는 태주를 떠올렸다. 심장이 서늘해졌다.'태주를 찾아왔던 길. 털어 내고자 한 길. 바랄 수도 바라는 것도 없었지만, 터질 것 같은 속을 한 번쯤은 터트려 보고 싶어 떠난 여정. 그런데 재희는 태주를 생각하는 대신 자신이 선우윤이라는 한 남자를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아주 깊게.'사랑이 이렇게 가볍구나. '마음의 무거움도 모른 채 살아왔다.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그것이 자신의 삶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쯤은 다 털고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싶었는데.'똑똑!'갑작스런 노크소리에 재희는 시선을 돌렸다. 힐끔 탁자 위의 시계를 보니, 8시가 조금 안 됐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그늘이 졌다.'혹시…….''―사진 한 장이 빠져서 새벽에 다녀올 거야. 오늘도 무리했으니 유 선생은 쉬는 게 좋겠어. ''그 말을 하던 어젯밤의 윤은 마치 악동과 같았다. 입꼬리에 머문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몰라 심장이 덜컹거렸다.'생각이 읽힐 것 같으면서도 읽히지 않는 그런 남자, 선우윤.'그가 돌아온 것일까.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 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방문 손잡이를 잡으며, 재희는 슬쩍 목청을 가다듬었다.'하. 왜 이래. 뭘 기대하는 거야.'끙끙 앓던 그날 새벽, 윤이 자신을 병원으로 옮긴 것을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와의 키스가 산에서 나눴던 키스 같기도 하고, 병원에 입원한 후 나눈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불분명하다. 병실에서 앓고 있던 그때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남아 있는데, 도무지 명확치가 않았다. 물어볼까, 생각하면 또 쑥스러워졌다.'“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