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네 소개팅 대타로 나가라는 거지?”'쓱 눈썹을 올린 태경이 팔짱을 끼자 명화가 호호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럴 때 명화의 모습은 꼭 야옹거리며 발밑으로 파고드는 고양이 새끼처럼 보였다. '“얘는, 넌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설마 내가 네게 대타를 시키겠니? 내가 그런 얍삽한 애로 보이니? 난 그저 내 베스트프렌드인 네게 잠시 시간을 좀 빌려달라고 하는 것뿐이야. 절대로 널 대타로 소개팅에 밀어 넣으려는 짓 같은 것은 하지 않아. 네가 얼마나 남자를 싫어하는 줄 뻔히 아는데 어찌 그런 부탁을 하겠어? 나는 그냥 내가 약속 시간에는 절대로 나갈 수 없으니까, 네가 그 시간에 나가서 내가 조금 늦어서 미안하다고 상대에게 말 전해주고 내가 갈 때까지만 상대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정신없는 말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명화의 주특기였다. 태경은 앞뒤 말이 맞지 않아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번번이 명화에게 넘어가곤 했다. '이번엔 안 넘어가.'태경이 입술을 지그시 물며 거절하려 하자 눈치 빠른 명화가 얼른 나섰다.'“마이 베프, 내 좋은 친구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태경아, 내 부탁을 들어줄 거지? 응?”'이럴 때 명화의 얼굴에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다디단 꿀처럼 쩍쩍 달라붙는 명화의 애교는 여자인 태경의 눈에도 눈부시게 보였다. '“해주고 싶지만 안 되겠어.”'태경의 거절에 명화의 표정이 새침해졌다.'“너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거지?”'“그럴 리가. 하지만 베프야, 알잖니? 너도 알지? 다음 주부터 나 시험인 거.”'“응, 알지. 내가 네 시험 날짜도 모르겠니? 같은 과인데.”'“그럼 내가 공부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어머, 시험공부란 것은 평소에 해두는 거잖아. 안 그래? 시험공부 때문에 시간을 못 내준다는 말은 그냥 핑계 같아. 그러지 마. 이태경, 그런 핑계로 나를 슬프게 만들지 마.”'극적일 정도로 과장된 저놈의 표정이 또 나왔다. 슬프고 아련한 표정의 명화는 비 맞는 꽃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최명화, 이 인간은 아무래도 전공을 잘못 선택했어. 얜 연극영화과를 갔어야 했어.'태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명화가 소리쳤다.'“흑흑흑, 나 슬퍼. 내 베스트프렌드가, 그것도 죽마고우가 내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대. 앙앙, 울고 싶어. 통곡하고 싶어.”'지랄!'태경은 명화와 자신 모두에게 해당된 욕을 삼켰다. 장난스러운 명화의 연기에 흔들리는 자신이 싫었다. 말만 저러지 ‘알았어’라는 대답을 하면 명화는 금방이라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앙앙앙앙앙앙…….”'태경이 꼼짝도 하지 않자 명화가 두 손을 올려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정말이지 연극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흑흑흑, 태경의 사랑이 식어버렸네. 난 버림받았나봐. 내가, 이 최명화가 버림받다니, 오오, 버림받다니…….”'“고만해라, 듣기 싫다.”'“난 버림받았어. 내 베스트프렌드에게. 엉엉엉엉.”'“그만하지 않으면 나, 간다?”'“엉엉엉, 저것 봐. 이런 나를 놔두고 그냥 간다고? 옛날엔 안 그랬잖아.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가면서 달래주더니. 저 봐, 변한 거야. 사랑이 식은 거야.”'결국 태경은 웃고 말았다. 최명화. 지긋지긋한 소꿉친구이면서 엄친딸이기도 한 원수. 아무래도 태경의 전생엔 명화와의 인연이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태경이 굉장히 많은 빚을 졌을 것이다. 이러고 나오는 명화에게 끝내 모질지 못하는 것을 보면.'“알았어. 그만해. 대타 서줄게. 이 원수야. 네가 다른 놈 만나는 동안 시간을 끌어주마.”'“친구야, 고마워.”'명화가 끌어안으려 하자 태경이 명화를 확 밀어버렸다. 명화와 달리 태경은 스킨십을 질색했다. 여자고 남자고 태경은 자신의 몸에 타인의 몸이 닿는 게 싫었다. 그래서 태경을 아는 지인들은 웬만하면 태경과의 접촉을 피해주었다. 유일하게 명화만이 그런 조심성을 갖지 않았다. 늘 이렇게 지 기분 좋으면 목을 끌어안거나 허리에 손을 두르려 한다. '“단, 꼭 한 시간만이야.”'사실 명화의 문어발을 생각하면 이런 승낙은 해선 안 되는 거였다. 스무 살부터 시작된, 아니다. 배우자를 잘 만나려면 일류 대학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등학교 내내 코피 터지게 공부했던 명화였다. '명화는 정말 철이 들자마자 잘난 남자 만나서 팔자 고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자의 팔자는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달렸다고. 난 일류를 만날 거야. 그러기 위해선 나도 일류가 될 거야.’'명화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말을 실천했다. 친해지는 사람들에게 집안 좋고 능력 있는 남자에 대한 소개팅을 부탁했다.'‘여자가 아무리 잘나면 뭐해? 아무리 능력 좋다 해도 배경 없고 돈 없으면 커나가는 데는 한계가 있는 거잖아? 인생 한 방이야. 난 돈 많고 명 짧은 놈 만나 호강하며 살 거야. 그런 뒤 돈 많은 미망인이 돼 눈 즐겁게 해주는 미동을 서너 명 거느려야지.’'명화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솔직히 태경은 지금도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농담으로 듣기엔 진지했고 진담이기엔 너무 허무맹랑하고 가벼웠으니까. '어쨌든 명화는 열심히 공부해 대학을 진학하더니 입학한 그날부터 공부는 작파하고 오로지 남자 만나는 것에만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얼마 전 명화는 능력 좋은 남자를 만났다. 마음에 어지간히 드는 것 같은데 명화는 그를 보험이라 불렀다.'‘잘난 놈을 만나지 못하면 나중에 걔랑 결혼할 거야.’'명화에게,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보험은 들어놨으니 이제는 좀 느긋하게 남자를 찾아봐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여전히 지인들에게 소개팅을 부탁하고 다니더니 오늘 같은 초유의 사태에 당면한 것이다. '소개팅 약속을 해놨는데 보험이 갑자기 선물을 사주겠다는 전화를 해온 것이다. 선물이란 사준다고 할 때 받아야 하는 법. 그렇다고 소개팅 자리를 작파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태경을 불러 부득부득 소개팅 자리에 먼저 나가서 자신이 올 때까지만 상대를 붙잡아두라고 종용하고 있는 거였다. '“한 시간 지나면 나 정말로 그냥 그 남자 두고 일어설 거야.”'“응. 한 시간이면 충분해. 내가 이미 매장 돌아보며 갖고 싶은 것 다 봐뒀으니까. 그거 사달라고 한 뒤에 곧장 달려갈게.”'아유,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