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신거리는 아랫배의 아픔에 눈을 떴다. 눈앞이 희뿌옇고 머리는 몽롱하다. 여긴 어디일까? 가까스로 머리를 움직여 주위를 살펴보니 차 안이었다. 왜 여기에 누워 있을까? 흐트러진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을 나열했다.'‘깨끗하게 처리해.’ '어젯밤, 갑자기 들이닥친 송민철의 엄마의 섬뜩한 그 말이 떠올랐다. 그 말에 짐승 같은 덩치들에게 끌려가 어딘지 모를 집에 감금당한 채 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자마자 이름 모를 허름한 병원으로 끌려갔었다. '덩치들이 당사자의 동의 여부는 물어보지도 않고 수술대 위에 발버둥치는 은재를 강제로 누이자, 정해진 수순처럼 마취주사를 주입한 의사가 감시하던 덩치들에게 말했다.'‘한동안 뜸하더니 또 걸렸나 봅니다. 쯧쯧, 나야 돈이 된다지만 여자가 안됐네.’'‘흰소리 그만하고 뒤탈 없이 일이나…….’ '그 말을 듣고 경악한 은재는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이 아득해졌던 것이 기억의 전부였다.'합법적인 것보다 비밀로 하는 수술이 많은 그곳에 끌려가도록 내버려 둔 민철과, 그 엄마의 경멸에 찬 얼굴도 생각났다. 그런 아이 필요 없다고 조소하며, 행여나 아이로 자신들의 발목을 잡으려고 한다면 세상 빛을 못 보게 될 거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더니, 결국 덩치들을 시켜 이런 비열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몸서리쳐지는 기억에 은재는 한기가 들었다. 죄책감과 만신창이 된 인생의 비참함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울고 싶은데 울음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끄으윽. 암담한 쇳소리만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제 깼냐? 정신 좀 차리지? 너 깰 때까지 감시하느라 피곤해.”'임신했다고 말한 순간부터 벌레 보듯 하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이제야 나타난 민철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컥 치미는 화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은 제 기능을 못하고 풀썩 꼬꾸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데다 수술까지 했으니 기운이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더구나 수술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난 상태가 아니라서 몸은 제멋대로 흐느적댔다. 이런 상태를 헤아릴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아랫배에 단단한 멍울이 져 꽉 막혀버린 느낌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한 번도 보지 못한 내 아기…… 흑……. 널 지키지 못한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하니? 죽어서라도 너를 위해 속죄할게. 이제 행복은 내 몫이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용서하지 마, 널 못 지킨 못난 엄마 용서하지 마……. 으흑…….’'“혼자 가도 되지? 내려. 이젠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다.”'은재의 몸 상태는 관심 없다는 듯, 민철의 냉랭한 말은 흐릿한 머릿속이 확 맑아지게 충격파를 던졌다.'“잔인하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는 건데, 민철 씬 양심도 없어?”'가시 돋친 말투는 당연하고도 남았다.'“양심? 양심이 있으니까 엄마 몰래 너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준 거잖아. 누가 임신 같은 걸 하래? 세상 여자들이 남자랑 잔다고 다 너처럼 임신 하냐? 어떻게 그 나이 먹도록 피임도 할 줄 몰라? 제 몸 간수도 못하면서 지금 누구에게 양심 운운하는 거야?”'임신했다고 말했던 그 순간에도 민철은 태도가 싹 달라지더니 빈정대며 이렇게 내뱉었었다. 어떻게 이런 남자를 사랑했는지. 사랑한다며 달콤하게 속삭이던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자신을 내줘 버렸는지……. 찢어지는 가슴으로 울고 있는 은재에게 민철은 끝까지 네 잘못이라며 이죽거렸다. 그런 민철이 은재는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양심? 이런 짓 한두 번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양심은 있었어?”'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은재는 울음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운전석에 앉은 민철을 노려봤다.'백미러 안에서 마주친 서로의 눈이 한껏 구겨졌다.'“너는 고아라서 측은하더라. 휴머니즘이 뭔지 안 오면 안 되겠더라고. 쪼끔, 찔려서 말야. 큭, 큭큭큭. 어떠니? 이만하면 많이 생각한 거 아닌가? 이 죽일 놈의 양심이라니.”'“그게 양심이구나……. 너도, 고고하신 네 어머니도 한 사람 인생 망치는 게 니들한텐 양심이야, 응? 죄의식은 눈곱만큼도 없는 게 어쩜 그렇게 똑같니?”'“이만하면 선량한 양심이지. 네 인생 구제해 줬잖아. 미혼모로 손가락질 받고 살까 봐 널 위해서 아무 탈 없이 이만큼 해 준 거야. 쳇, 네가 알겠냐. 순진하기만 하지 도통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니…….”'“그게 할 말이야?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한 입에서 그런 파렴치한 말이 나와? 이 나쁜 놈아!”'마취 기운에 눈앞이 흐릿하고 아직도 나른한 몸으로 은재는 악의에 차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운전석에 앉은 그에게 맨 주먹을 마구 휘두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있는 힘껏 때려도 주먹은 솜뭉치처럼 가볍기만 하다. 이 남자가 내 주먹에 아파서 쓰러지는 꼴이라도 보고 싶은데, 불행하게도 남아있는 힘이라곤 없었다.'“어엇, 야! 이게!”'아무리 힘이 없다 해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기세를 말릴 수 없던 민철은 운전석을 박차고 나와 은재가 앉은 뒷문을 열었다. 정신 놓은 사람처럼 달려드는 그녀를 꼼짝 못하게 제압하고선 차 밖으로 끌어내렸다.'“나쁜 놈! 놔! 놔!”'도로에 세워둔 차에서 이런 난리가 나는데도 사람 하나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주 한적한 곳인 듯 보였다.'“내려!”'“악!”'차 밖으로 끌려나온 은재는 길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콘크리트 보도에 무릎을 찍으며 엎어지고 말았다.'“하도 결혼, 결혼 하니까 립 서비스로 한 말에 홀라당 넘어온 네가 잘못한 거야. 잠 한번 자는데 결혼을 거는 애는 너 밖에 없을 거다. 젠장, 더러운 것 밟았다니까.”'“뭐어……?”'“넌 그 나이에 그것도 모르냐? 응? 남녀가 만나면 당연히 즐기는 거지. 꼭 사랑하고 결혼해야 즐기냐? 촌스럽게. 너, 처음부터 결혼 노리고 내숭 깐 거지?” '태연하게 거짓으로 결혼을 약속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송민철의 잘생긴 얼굴이 흉악범처럼 끔찍해 보였다. 지금껏 단 한순간도 진심인 적이 없었단 말인가? 사랑했던 진심을 왜곡하는 그의 말이 허탈하고 충격적이다. 좀 더 일찍 저 인간의 본질을 알았어야 했는데, 어리석어도 너무 어리석었다.'“송민철!”'속에서 차오르는 화를 내뱉는 것도 힘이 들어 은재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만 뇌까렸다. '“그래, 너 좀 예쁘고 도도해서 갖고 싶었어. 그래서 사탕 발린 말 좀 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내 앞에서 하도 도도하게 굴기에, 오기로 너 깔고 싶었어. 거짓으로 사랑한 거였어. 난 말이지 구질구질하게 달라붙는 건 질색인 사람이야. 하류인생에 사는 네가 하도 신기해서 잠깐 어울려 논 것뿐이라고, 알겠냐? 강은재, 상류인생인 나한테 감히 네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은재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민철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들으며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나, 퓨처코리아 후계자야. 그에 어울리는 여자를 만나야 하지 않겠어? 나한테 힘이 되는 여자, 집안 빵빵한 여자 말이야.”'“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이 술술 나와? 그런 마음이었으면 처음부터 날 만나지 말았어야지! 처음부터!”'“그러게, 네가 하도 특이해서 그랬다고 했잖니. 넌, 너한테 어울리는 남자 만나라. 난 국회의원 딸이랑 이번 주에 약혼해. 프랑스 유학 갔다 온 재원이고 얼굴도 예뻐. 그 정도는 돼야 내 인생에 힘이 되지 않겠니?”'“송민철!”'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은재는 벌떡 일어나 손톱을 세워서 민철에게 달려들었다. 힘이 달리니 최대한 무기를 이용해서 이 억울하고 비참한 마음을 발산하고 싶었다. '“앗!”'순식간에 달려든 은재의 손톱이 그의 뺨을 할퀴어 붉은 줄이 선명하게 생겼다. 뺨을 손으로 감싼 민철은 어금니를 물고 질린 눈으로 은재를 노려보며 말을 내뱉었다.'“야, 썅!”'짝! '“악!”'민철이 휘두른 손아귀 힘에 떠밀려 은재는 길바닥으로 쓰러졌다. 얼마나 손에 힘을 실었는지 얼굴 반쪽이 무감각했다.'“만약 이 일 떠벌리면 각오해. 그땐 하늘 못 보게 해 줄게. 그리고 네가 걸레라는 걸 광고하는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알은체도 마라.”'“나쁜 놈……!”'끔찍한 말로 협박을 하고 민철은 미련 없이 휙 돌아서 고급 수입차에 올라탔다. 운전석 문이 닫히자마자 보란 듯이 부우웅 소리를 내며 도망가듯 튀어나가는 은빛 오픈카는 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차가 시야에서 사라졌는데도 은재는 망연자실하게 길가에 서서 눈이 찢어져라 부릅뜨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꽉 말아진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송민철……! 이 살인자! 내 아이를 죽인 살인자! 돈? 그래, 돈 있으면 아무나 짓밟고 살아도 된다고 면죄부라도 받았나 보지? 절대로 이 수모 안 잊어. 반드시 갚아주겠어,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도 널 밟아 주겠어. 지운 내 아이, 그리고 내 인생 다 걸고서……!”'억울하고 분해서 듣는 사람 없는 공기에 절규했다. 소중한 생명까지 없애고 내 인생을 망가뜨린 저들의 만행에 어떤 응징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절망스러웠다.'그러나 갚아 주리라, 반드시! 죽어서라도. '으드득.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핏발 선 은재의 눈에서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