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사랑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저 자신의 곁에 둘 수만 있다면.
그것이 ‘결혼’이라는 올가미라 하더라도.

차가운 성정을 지닌 태현에게 귀여운 소영은 단지 친구의 동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약혼 상대가 그녀라는 것을 알게 된 태현은 소영을 무시하며 약혼을 깨버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소영. 그녀를 본 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데…….

“오빠가 싫다고 했다면…… 나 약혼 강행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요, 나 싫어한다고. 그럼 포기했을 텐데.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었어요.”
간신히 말을 마친 뒤 얼룩진 표지에 손을 대며 마치 낯선 사람이라도 된 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보기 흉하게 입 꼬리만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정말 그렇게 했을까?”
“네. 오빠를 사랑하니까요. 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충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무심한 눈으로 그런 그를 지켜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이제부터 자유예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어요.”

2. 작가 소개

서미선
필명 소나기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세 남자와 매일 싸우는 게 하루 일과.

▣ 출간작

〈후견인〉, 〈루비레드〉, 〈잔인한 사랑〉, 〈가면〉, 〈카인과 아벨〉, 〈부부〉, 〈지독한 거짓말〉, 〈피의 베일〉, 〈넌 내게 지옥이었어〉, 〈되찾은 약혼녀〉, 〈아내〉, 〈레드 러브〉, 〈백설화〉, 〈도령〉, 〈홍분지기〉 외 다수


3. 차례

# 프롤로그
# 1장
# 2장
# 3장
# 4장
# 5장
# 6장
# 7장
# 8장
# 9장
# 10장
# 11장


4. 미리 보기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비 피할 곳을 찾는 사람들과 달리 소영의 몸은 구름 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커다란 천둥소리에 귀를 틀어막았을 테지만 오늘따라 커다란 천둥소리조차 귀에 들리지 않았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몇 시간 전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소영이니?”
“……네.”
한참만에야 답변을 한 소영은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웃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언제나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뭔가에 열중에 있을 뿐이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을 세게 움켜쥐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오…… 오빠?”
-응.
세상에…… 그의 전화 한 통화로 회색빛의 건물이 갑자기 무지갯빛을 띠기 시작했다. 기쁨과 설렘으로 팔짝팔짝 뛰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제어하고 어두운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이 태현이란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해가 뜬 동쪽 하늘과 서쪽 하늘을 연속해서 보았다.
-소영아?
대답이 없자 상대방이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아 마른 입술을 적시며 속으로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칼한 목을 가다듬으며 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상대방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시간 있니?
“네!”
초등학생처럼 똑똑 부러지는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상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오…… 오빠?”
-아파트에 몇 시까지 올 수 있겠니?
재빨리 시간을 확인하고 두 시간 뒤로 약속 시간을 정했다. 시간이 마법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초침이 왜 이리도 더디 가는지…… 늘 그렇듯 소영은 자신이 먼저 전화를 거는 것을 당연시 해왔다. 그런데 방금 걸려온 전화로 인해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도착한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집에 있겠다고 했는데.’
한번 정한 약속은 꼭 지키는 그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스르르 문이 열렸다.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기척을 냈지만 고요했다.
“오빠…… 오빠…… 잠깐 편의점에라도 갔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가방과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려 하는데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 있어요? 오빠…….”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으로 향하는데 귓가로 들려온 것은 분명 신음 소리였다. 억누른 듯한 신음 소리가 아닌, 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혹, 자신이 아파트를 잘못 찾았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며칠 전에 결혼 전 마음에 들어 미리 사다 놓은 장식장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한 느낌을 지워 버리려 소영은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다.
“오빠?”
자신이 내는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목소리와 달리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지만 소영은 자신이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며 침실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두 남녀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비명을 질렀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기척 소리를 들었는지…… 남자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기랄! 문 닫아.”
그 순간 심장이 멎어 버린 자신과 달리 화난 그의 목소리가 남의 것인 양 이상하게 들렸다.
“민소영!”
민소영? 그게 누구지…… 한참만에야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두 사람에게 향해 있는 시선을 옮겨야 하는데 눈동자도 몸도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십 년을 넘게 해바라기했던 남자, 언젠가 그의 옆자리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해야 할 자신의 침대에 낯선 여자와 함께 뒹굴고 있었다니…… 이게 악몽이 아니라면, 지옥이 아니라면…….
침착하게 눈을 치켜뜬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설명을 해달라는 무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라렸고, 온몸이 칼로 난자당한 것처럼 아팠다. 이미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랑이란 조각상이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눈물이 분노보다 빨랐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물러선 그녀는 방금 전 보았던 것들을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떴다.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은데 추를 단 것 같은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힘겹게 부여잡은 채 소영은 앞에 서 있는 태현이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기다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가슴을 드러낸 채 겨우 팬티만 걸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선 그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파혼하겠다고 어른들한테 네가 말씀 드려.”
그랬구나…… 소영은 그제야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바보처럼 왜 진즉에 그걸 알지 못했을까. 때늦은 후회였다.
“오빠가 나한테 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참는 것에 익숙한 그녀의 성격 탓이었다. 약혼자인 그가 자신을 부드럽게 대해준 기억이 없었지만 오늘처럼 그가 멀게 느껴진 것도 처음이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나이가 들면서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란 것을 알고 목숨처럼 매달렸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할 줄은 몰랐다.
“지금 얼마나 비겁한 행동을 했는지 아세요?”
“충분히.”
계획적이었던 그와 달리, 갑작스럽게 당한 소영은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우주공간을 떠돌고 있던 의식이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밑에 떨어진 책을 보자 몇 시간 전 받았던 전화가 아주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전화에 바보처럼 흥분했던 자신을 생각하자 욕지기가 올라왔다. 길게 호흡을 내뱉고 바닥에 떨어진 책을 천천히 주워들었다.
“소영아.”
“…….”
“소……영아.”
눈물방울이 파란 책 겉표지에 떨어지더니 얼룩이 지듯 번져나갔다. 점점이 퍼져가는 것을 지켜보며 눈물자국을 쓸며 일어섰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프더라도 물어야 했다. 더 심하게 다치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도 돼요?”
“…….”
“약혼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그래.”
그랬구나. 이 사람은 자신과의 약혼이 그렇게 싫었는데 왜 약혼을 했을까? 그런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가 아닌 자신이 좋아서 선택했고 매달렸는데 그에게 책임을 지울 순 없었다.
무엇보다 태현이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지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음속을 보여준 적이 없던 그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자 또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오빠가 싫다고 했다면…… 나 약혼 강행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요, 나 싫어한다고. 그럼 포기했을 텐데.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었어요.”
간신히 말을 마친 뒤 얼룩진 표지에 손을 대며 마치 낯선 사람이라도 된 듯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보기 흉하게 입 꼬리만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정말 그렇게 했을까?”
“네. 오빠를 사랑하니까요. 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잖아요.”
충격을 받은 듯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무심한 눈으로 그런 그를 지켜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이제부터 자유예요.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어요. 그럼 저 갈게요.”
‘오빠는 모를 거예요.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목숨만큼, 심장이 뛰고 있을 때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할 만큼 오빠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오빠에게는 내 사랑이 커다란 짐이고 멍에였나 봐요. 미안해요. 몰랐어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에 억지로 힘을 주고 소영은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밖으로 나오자 언제 비가 왔나 싶게 따뜻한 봄바람에 연두색의 치마가 찰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