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종이책 출간되었던 <하트리스>의 이북판입니다



“제가 뜻을 굽히지 않는 한……윤희가 다치지 않을 방법은 없으니까요.”

그것을 끝으로 정혁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단호한 몸짓이었지만 형조는 정혁이 더 견딜 수 없어 피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모진 척을 해도 정혁은 정혁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 전에 형조는 순식간에 문을 열고 교수실을 빠져나가는 정혁을 급급히 따라 나갔다.

“정혁아!”

어두워진 복도에 뚜벅뚜벅 울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실루엣이 보였다. 형조는 허둥지둥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연신 정혁을 불렀다.

“정혁아, 얘야!”

너무 서두르며 계단을 내려오는 통에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 하다가 겨우 건물 현관을 나서는데 부르릉 하고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차가 신경질적인 소음과 함께 바퀴를 움직여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정혁의 상반신이 어두운 와중에도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형조는 바로 앞을 스쳐 달려가는 정혁의 차를 뒤쫓다가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정혁의 차는 맹렬하게 쏘아져 나갔지만, 그건 출발이 아니라 도망이었다.




***




도시 외곽의 도로는 오늘 유난히 한산했다. 그래서 정혁의 차는 한적한 도로를 마치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은 무엇 하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정혁은 내리밟은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 오빠는 왜 안 웃어?

계속 회전하고 있는 만화경처럼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겹치고 포개지는 머릿속에서 단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기억은 바로 그날의 것이었다. 윤희를 처음 만났던 날. 그때 윤희는 열 살 짜리 어린 꼬맹이였다. 까무잡잡하고 키도 작아서 멀리서 보면 남자애라고 착각할 만큼 여자애 같은 구석이라고는 없던 꼬마. 하지만 정혁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던 그 날을.

핸들을 움켜쥔 정혁의 손이 하얗게 질리며 피가 빠져나갔다. 윤희는 그런 존재였다. 꼬맹이이자 소녀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숙녀라는 존재였으며, 어른이 된 뒤에는 서로가 있었기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수 있었던 여자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윤희를 뺀다면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임을 정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를 이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차에 채운 기름이 바닥날 때까지 달린다 해도 정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윤희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윤희야…….”

메마른 입술이 버석이며 이름을 불렀다. 그 입술 곁으로 어느새 눈물이 그어지고 있었다. 건조한 뺨에 흐르는 눈물은 그곳을 쓰다듬던 윤희의 손끝처럼 부드러웠다. 정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고인 눈물이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을 반사시켜 시야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길이 꺾어지며 코너를 돌기 위해 정혁은 핸들을 움직였다. 그 순간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던 다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돋보기를 들이댄 것처럼 눈에 확 들어왔다.

“……!”

반사적으로 핸들을 반대방향으로 꺾으며 정혁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시야가 확 바뀌며 차체 뒷부분이 갑자기 바뀐 방향 때문에 미끄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반대편 차로에서 달려오던 차도 놀랐는지 끼이익 하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앞 유리가 박살나는 순간 정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레일을 따라 치솟았다가 하강하며 이리저리 뒤집히는 롤러코스터처럼, 정혁이 탄 차는 크게 회전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현대물 잔잔물 동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