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황후 사하란의 유일한 친자인 나! 어이하여 나는 영원토록 굳게 닫혀 있어야만 했던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렸을까. 대체 어쩌자고 내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나!

일개 후궁이었던 황후 사하란. 황후가 되었다고 그녀의 과업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한의 절대권력으로 사하란이 욕망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사하란을 막아야 한다! 그녀의 핏빛 욕망으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기 전에…….

“영왕비도 앞으로 몸조심하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음 표적은 바로 영친왕비이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혹시 황후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영유 황자를 한의 다음황제로 만드시겠다는 공언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황후마마께서 그 권좌에 올라서시려는 의중이신 듯하옵니다. 아니옵니까?”

2. 작가 소개

은서우

자칭 현실주의자라면서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세상에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느려터진 손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 출간작

휘린(輝潾)

휘린(輝潾) 외전

휘린(輝潾) 2부

3. 차례

#제5장. 황제의 딸 (3)

#제6장. 또 하나의 시작

#제7장. 위왕녀지담(僞王女之談) (1)

#제7장. 위왕녀지담(僞王女之談) (2)

#제7장. 위왕녀지담(僞王女之談) (3)

4. 미리 보기

광덕 43년 2월 10일, 세상은 아직 늦겨울의 자락에 있다는 사실을 순간 잊어버릴 만큼 날이 따사롭다. 약간의 사느란 기운을 담고는 있었지만, 뺨을 닿아오는 바람결도 제법 부드러웠다. 항아 정예진이 지난 8년간의 직분을 정리하고 일반 백성으로 돌아가는 날로 안성맞춤이었다.

출궁을 허락한다는 황제의 교지를 전달하는 의식이야 진즉 경사방의 성명재(誠銘齋)에서 거행되었다. 헌데도 영친왕비, 청성궁의 항아들을 비롯하여 특별히 예진과 친분이 두터웠던 몇몇 봉황전이나 의헌궁의 궁인들은 개인사정을 이유로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음에도 동안태문까지 따라나섰다. 예진이 황궁 밖의 마차에 오르는 모습마저 지켜보고 싶어서였다. 그들은 끝까지 웃는 낯으로 그녀를 배웅해주고자 했다.

헌데 동안태문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와 있었다. 호부상서 정진우였다. 예진이 타고 갈 마차에 가까이 서 있었다. 그도 오늘은 조금 일찍 퇴궐하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일단 진우는 영친왕비에게 예를 표했다. 세희도 답인사했다.

“헌데 본의 아니게 진우 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미안합니다.”

“당치 않은 말씀을 하시옵니다. 실은 저도 금방 전에 당도하였습니다.”

진우는 답변하는 와중에도 슬쩍 예진을 보았다. 잠깐의 눈길에도 그녀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작별 인사들을 나누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군요. 허면 저는 잠시나마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영왕비마마와 항아들이 정 항아와의 마지막 인사를 충분히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와 항아들을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진우도 미소로 응수하면서 얼른 예진에게 눈짓했다. ‘나는 먼저 마차에 가 있을 터이니, 그대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시오.’라는 의미였다. 예진도 알겠다고 고갯짓했다. 진우는 세희에게 한 번 더 인사하고는 얼마간 떨어져 있는 마차로 발길을 돌렸다.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있는 조혜란은 진우의 뒷모습이 멀어지자마자 예진을 보며 히죽였다.

“역시 정 대인님이셔. 행여 정인이 쓸쓸히 황궁을 나서지는 않을까 염려하시어, 미리 예까지 나와 계셨잖아. 우리 예진이는 다정다감한 정인과 함께 즐겁게 본가로 돌아가겠네. 예진아, 솔직하게 말해봐. 너도 정 대인께서 함께해주시니, 참 좋지?”

은근히 놀리는 듯싶은 질문에 예진은 그저 빙싯했다. 사실 예진은 진우가 자신의 출궁시간에 맞춰서 동안태문에 나와 있을지는 몰랐었다. 아무래도 영친왕비께서 이분께 귀띔을 주신 것 같다는 짐작에 슬며시 세희를 쳐다보았다.

예진의 눈길에 담긴 말뜻을 알아들은 세희는 그러하다고 답하듯이 미소를 그렸다. ‘그래요, 정 항아의 추측대로 내가 진우 님께 미리 기별을 넣었었답니다. 정 항아가 언제쯤에 황궁에 나설 것 같다고요.’ 이에 예진은 눈짓으로 감사하다고 답인사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혜란에게로 돌렸다. 정말로 황궁을 나서기 전에 혜란에게 꼭 남기고픈 당부가 하나 있었다.

“언니도 김 장교님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김 장교님이 언니가 출궁하는 해만을 기다리고 있는 거, 아시죠? 김 장교님을 위해서라도 내년 봄에는 언니의 혼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혜란은 피식하더니, 주먹손으로 그녀의 몸을 톡 쳤다.

“당장에 열흘 후면 신부님이 되실 분이 무슨, 내년에나 있을 다른 사람의 혼사를 이야기해? 그나저나 출궁하면 바로 혼사를 준비하느라 무진장 바쁘겠네.”

혜란의 말에 옆에서 류화가 슬쩍 한마디 놓았다.

“혜란 언니, 아니에요. 혼사준비는 정인부인께서 이미 완벽하게 해놓으셨을걸요? 하여 예진 언니가 정작 하실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영왕비마마, 소인의 짐작이 맞지 않사옵니까?”

그러면서 류화는 눈길을 세희에게 돌렸다. 그녀가 자신 있게 건네는 물음에 세희는 분명한 고갯짓으로 답해주었다. 엊그제 주혜원이 세희에게 보내온 서한에는 어여쁜 며느리를 맞아들이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시모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아들이 드디어 천생배필을 만나 일가를 이룬다며 매일같이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의 혼사를 준비한다고 일러주었다.

세희는 예진이 시어머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며느리가 되리라고 믿었다. 당사자들은 어찌 여길지 모르겠으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인부인과 정예진은 인품이나 분위기, 취향 등에서 서로를 꽤 많이 닮아 있었다.

세희가 주혜원의 서한을 떠올린 사이에도 류화의 재잘거림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예진 언니는 이제 혼인날만을 편안히 기다리시면 될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사에 관하여 언니가 꼭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열흘간 심신을 편안하게 하시어 지금의 미모를 더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지 않을까요? 누가 뭐래도 혼인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사람은 바로 신부님이 아닙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나 말이지, 벌써 기대된다. 아, 혼인날에 우리 예진이는 얼마나 예쁠까!”

“저도 그날이 기다려져요.”

류화와 혜란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에 유리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지켜보는 예진으로서는 괜스레 쑥스러워졌다. 때마침 진우가 마차 안에 들어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저들끼리의 대화가 바람결에 실려서 그에게까지 닿는다면 은근히 민망할 듯했다.

“헌데 이제 우리, 정 항아를 이만 보내주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가 이렇게 정 항아를 붙잡고 있으면, 정 대인이 정 항아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진답니다.”

세희가 항아들을 향해 말했다. 유리도 동조했다.

“예, 마마의 말씀에 따르겠사옵니다. 오늘의 작별이 아쉽지마는, 정 항아의 앞날을 위해 우리가 이만 놓아줘야 하겠지요.”

유리는 예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매일같이 얼굴을 보며 함께 항아로 봉직할 수 없음에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아 그녀를 향한 눈길에 살짝 물기가 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행복한 삶을 영위할 벗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황유리를 시작으로 조혜란과 김류화는 차례대로 예진과 포옹했다. 예진은 마지막으로 세희를 향해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오랫동안 주인으로 모셨던 소영 공주께 직접 인사를 올리지 못한 서글픔은 그분께 띄우는 서한으로 달랬다. 영친왕비께서 대신 소영 공주마마께 서한을 보내주시어 매우 다행이다.

“영왕비마마, 다시 뵈올 때까지 옥체강녕하시길 바라옵니다. 조 항아와 황 항아, 김 항아도 안녕히 잘 있어야 해.”

예진은 눈꽃처럼 환한 미소를 남기고는 마차로 발길을 놓았다. 진우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맞았다. 예진은 마지막으로 뒤를 한 번 돌아본 후에야 마차에 올랐다. 세희와 항아들은 그들을 태운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