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황후 사하란의 유일한 친자인 나! 어이하여 나는 영원토록 굳게 닫혀 있어야만 했던 비밀의 상자를 열어버렸을까. 대체 어쩌자고 내 힘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나!

일개 후궁이었던 황후 사하란. 황후가 되었다고 그녀의 과업이 끝난 것이 아니다. 한의 절대권력으로 사하란이 욕망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사하란을 막아야 한다! 그녀의 핏빛 욕망으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기 전에…….

“영왕비도 앞으로 몸조심하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음 표적은 바로 영친왕비이니 알아서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혹시 황후마마께서는 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영유 황자를 한의 다음황제로 만드시겠다는 공언은 표면상의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황후마마께서 그 권좌에 올라서시려는 의중이신 듯하옵니다. 아니옵니까?”

2. 작가 소개

은서우

자칭 현실주의자라면서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세상에 풀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느려터진 손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 출간작

휘린(輝潾)

휘린(輝潾) 외전

휘린(輝潾) 2부

3. 차례

#제4장. 작은 나비의 날갯짓 (1)

#제4장. 작은 나비의 날갯짓 (2)

#제4장. 작은 나비의 날갯짓 (3)

#제5장. 황제의 딸 (1)

#제5장. 황제의 딸 (2)

4. 미리 보기

황제의 정원인 어화원에는 가을의 기운이 아직도 머물러 있었다. 붉거나 노랗게나 나뭇잎에서나 꽃송이들에서 짙게 묻어나는 색채가 현란한 가을은 아니다. 바짝 다가온 겨울이 실감되게끔 꽃이 이울고 잎이 떨어지는 쓸쓸한 서릿가을이었다. 오늘 하루도 다 갔다고 말해주듯이 햇살이 점차 엷어진다. 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선선한 저녁바람이 뺨을 어루만진다.

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가슴을 묵중하게 누르는 짐이 정말로 덜어내어진다면,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어 보았으리. 허나 날숨을 토해낼수록 심중의 답답증이 더해졌다. 오늘은 은근히 힘든 하루였다.

아침수라를 물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종친이라고 내세우는 위인이 셋이나 한꺼번에 입시하였다. 그들은 황통의 고결성을 보전하고 황실의 명예를 지켜내려면, 월하인임이 분명한 여인에게 내려진 후궁의 지위와 신분을 박탈해야 한다고 강변했었다. 천한 요물에게서 태어난 계집도 황실의 성결한 위엄을 더럽혔으니, 그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한댔다.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무색하도록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마구잡이로 내뱉어대는 그들을 보면서 연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동안은 자신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위인들이 이참에 존재감들을 드러내보겠다고 분수에 어긋나는 작태를 일삼지 않는가. 못난 꼴들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었던 연은 미간을 짜긋했다.

「짐이 제좌에 앉은 지 올해로 사십이 년이 되었던가.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흘렀으니, 그대들의 기억력도 꽤 사라졌겠군. 하여 그대들이 어째서 삼십육 년 전에 다른 황족들처럼 죽지 않고 지금껏 안락하게 잘 살고 있는지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저희들은 황실의 조, 종…….」

「짐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그 방자한 입을 다물라. 그대들이 황제의 종친이라고 했느냐? 그 신분을 누가 주었관데, 감히 짐의 앞에서 귀비와 공주를 능멸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나? 착각하지 마라. 현재까지 누려온 지위와 특권은 본디부터 그대들의 것이 아니었으니. 허면, 이제는 짐이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의 목숨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나?」

연이 황제로서 차갑게 내뱉는 경고에 종친들은 지레 겁먹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군주의 역린을 함부로 건드려서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귀비의 출신에 얽힌 문제를 결코 좌시할 수 없다면서 오늘 오전에 입궐하겠다는 그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환주(環朱) 장공주(長公主)의 충고가 그제야 떠올랐다. 황친에서 가장 큰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의 말씀을 외면했던 것이 심히 후회되었다.

그들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둘러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연은 또다시 냉소를 쳤다. 허나 그 아둔한 종친들의 방문은 작은 전쟁에 불과했었다. 연의 짜증을 지피던 자들을 내보내기가 무섭게 상소들이 올라왔다.

상소대란의 첫 번째 주자는 문하성이었다. 순번이라도 정해두었는지, 한두 시간을 걸려서 좌습유(左拾遺) 6인 공동으로 작성한 하나, 좌보궐(左補闕) 5인이 공동으로 작성한 하나, 급사중(給事中) 2인이 각각 작성한 둘,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 작성한 하나의 순으로 상소문들이 올라왔다.

그다음 직급인 정3품의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는 서인이고, 정2품의 문하시랑(門下侍郞)은 중인이어선지, 이른바 ‘황제의 과오를 간언하여 황실의 위신을 바로세우겠다’는 상소문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황후의 최측근으로 동인의 수뇌인 고진혁이 어째서 문하성의 수장으로서 오늘의 상소대란에 화룡정점을 찍지 않았었는지는 약간 의문스럽지마는.

어쨌든 연은 천편일률적인 문장들이 반복되는 상소문을 몇 통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상소문에 일일이 남겨주는 비답의 내용도 당연히 비슷비슷해졌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소리들만 늘어놓은 상소문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읽어보게 생겼다.

오늘은 문하성이었으니, 내일은 어느 관서일까. 홍문관인가, 육부의 병부인가, 아니면 황부나 군부 쪽인가. 어디가 되었든 봉황전의 지엄한 명령을 받은 동인 관원이라는 점은 매한가지겠지. 상소문에 대한 비답은 황제가 친히 작성해준다는 관례가 없었더라면, 답변으로 쓸 만한 상투적인 구절 몇 개를 정해서 금속활자로 만든 다음, 그것을 막 찍어댔으리라. 아무래도 그편이 일처리가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나.

“아바마마, 소자를 찾아 계셨다 들었사옵니다.”

내내 기다렸던 사람이 드디어 당도했다. 뒷짐을 지고서는 하늘만을 올려다보던 연은 바로 손을 풀고 뒤돌아섰다. 서현은 다시금 부황을 향해 묵례를 올렸다.

“일찍 오지 못하여 송구스럽사옵니다.”

“아니다. 원래 산책하던 중이었는데 문뜩 네가 생각나더구나. 하여 최 내관을 통해 너를 부른 것이다. 허니 나를 기다리게 했다고 미안해하지 마라.”

“예.”

“일단은 좀 걸었으면 하는데, 따르겠느냐?”

“예.”

서현은 부황께서 공연히 저를 찾은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오늘 낮에 소영이 자신과 세희, 그리고 진우와 현강에게 꺼내놓았던 고백이 생생히 떠올랐다. 오라버니들에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털어놓는다는 말끝에는, 부황께는 이미 두 해 전에 말씀드렸다는 첨언이 있었다. 서현은 그제야 이해했다. 어째서 부황께서 소영을 삼창의 제독으로 삼으셨는지를.

“가자.”

연이 먼저 발을 떼었다. 서현은 발끝을 부황과 나란히 놓을 수가 없어서 일부러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었다. 그러자 연이 바로 뒷말을 붙였다.

“가까이 와라. 그렇게 떨어져서 걸으면, 함께 산책하는 의미가 없지 않으냐?”

“예.”

서현은 순종했다. 그러나 연은 즉시 말문을 열지 않았다. 느긋하게 뒷짐을 짓고서는 아무 말 없이 스물대여섯 걸음을 놓았다. 서현도 잠잠히 곁을 따를 뿐, 부황에게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느냐고 재차 묻지는 않았다.

한 서른 번째의 걸음을 이으면서일까. 부황의 시선이야 여전히 정면에 있지마는, 비로소 구중이 열렸다. 황제보다는 아비라는 표현에 더 어울릴 법한 어성(御聲, 군주의 목소리)이 잔잔히 이어진다.

“어제 소영이가 내게 와서 오늘 중으로 너와 네 벗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겠다고 말해두었다. 들었느냐?”

“예. 그 자리에는 영친왕비도 함께했었습니다.”

“그래. 허면 소영의 이야기를 듣고서 너와 네 벗들은 어떠하냐? 너희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벽서의 그 내용이 허무맹랑하다고 여겼을 텐데.”

“예, 소영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벽서의 그 내용은 모두 거짓이라고 보았었습니다. 허나 돌아가신 귀비께서 월하인이었고, 그분의 친생인 소영이도 월하인으로서 이능까지 물려받았대도, 그 아이가 소자의 사랑스러운 누이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사옵니다. 소자의 벗이자 아바마마의 신하인 호부상서와 금위중장도 소영이를 앞으로도 계속해서 황실의 제일공주로서 모실 것입니다.”

“그래……. 그럼, 네 안사람은 뭐라고 말하더냐?”

연은 일전에 소영의 고백을 통해 은세희가 오래전에 그 비밀을 접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서현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겸 물어보았다. 역시나 서현은 담담히 답변했다.

“그 사람은 저희들보다 먼저 소영의 비밀을 알고 있었사옵니다. 허나 소영의 부탁으로 저희들에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줄곧 모르는 척했었지요. 그보다 세희는 애초에 소영의 특이점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었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세희는 서의 공주가 아니옵니까? 서의 왕실은 월하인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래. 그곳의 상황은 우리와는 참 많이 다르지.”

연은 기분이 씁쓰레해졌다. 서는 월하인과의 관계 맺기에서 첫 번째 단추를 잘 끼웠지만, 한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만일 25년 전의 그 사건을 다르게 풀어갔더라면, 작금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문뜩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서현아, 나는 봉황에서 무슨 방법을 쓰든지 결코 귀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요물이라고 지탄받는 월하인이래도 그녀는 나의 황비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

부황은 확언했다. 봉황전과 동인에서 맹렬히 공격해도 결단코 물러서지 않으시겠단다. 그것은 당신의 제좌에 어떠한 오욕과 비난이 쏟아져도 정인의 가명(佳名)과 명예는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결의였다. 서현은 귀비를 향한 부황의 연모의 정이 심원함을 느꼈다. 귀비께서는 14년 전에 돌아가셨어도 여전히 부황의 세계에 살아 계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혹…… 이런 아비가 못내 서운하지는 않으냐? 네 보기에는 아비의 결단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연이어 한결 차분히 건네어지는 물음. 서현은 부황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안다. 부황의 첫 번째 정비인 명덕황후인 자신의 모후께는 지아비로서 많이 소홀하셨던 것을 말한다. 소년 시절의 기억에서 모후는 말없이 태양만을 우러러보는 해바라기 같았다. 허나 부황은 모후의 진정에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보답해주지 않으셨다. 너무도 매정하셨다. 하여 자신은 모후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황자, 나는 행복합니다……. 어미는 괜찮으니, 황자는 황상을 미워하지 마세요……. 그분은 내게 황자를 안겨준, 황자의 아버지이십니다.」

희미한 미소로 남기셨던 그 말을 도통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후 부황을 꽤 오랫동안 미워했었다. 하지만 세희와 가연을 맺으면서 부황께서 어째서 어머니의 진정에 응답해주지 않으셨는지를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부황께서는 종묘사직을 위해 반드시 황통을 이어야 하는 황제로서 어머니를 황후로 맞으셨다. 허나 이미 오랫동안 한 여인만을 열렬히 사랑해온 사내의 마음은 버리지는 못하셨다. 그렇기에 제좌를 이을 아들들을 얻은 이후에 그분을 당신의 황후로 삼으시고는, 다른 여인들의 침소에는 옥보를 놓지 않으셨다.

황실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서라도 천기(天紀)와 지운(地運)을 고려하여 살펴놓은 날짜에 정궁(正宮)마마와 반드시 합궁하셔야 한다는 태상부(太常府) 관원들의 간곡한 권고마저도 모조리 물리치셨다.

서현은 슬며시 입술을 떼었다.

“아니옵니다. 충분히 이해하옵니다. 그리고 소자는 아바마마의 결정을 존중하옵니다. 하오니 아바마마께서 뜻하시는 대로 나아가시옵소서. 소자가 아바마마를 돕겠사옵니다.”

서현은 정말 저 혼자만을 가리킨 게 아니다. 그 표현의 이면에는 서인도 중인처럼 황제의 의지에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연의 입가에는 은은히 미소가 감돌았다. 시간이 흘러 자신이 죽어서 저승으로 들어가고 서현이 뒤를 이어 차기황제가 되어도, 수현의 지위와 명예는 영원토록 보존되리라. 수현과 자신을 이어주는 소영도 장공주로서 한 황실의 귀한 존재로 남을 터.

“고맙구나. 허면 네게 소영의 안위를 부탁한다. 오라비로서 하나뿐인 누이를 소중히 지켜다오.”

“소자, 반드시 그리하겠사옵니다.”

서현도 주저 없이 확답했다. 연은 큰아들을 보며 한 번 빙그레 웃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화는 마무리되었으나, 그윽한 밤빛 속에서 천천히 펼쳐졌던 부자의 산책은 일다경가량 더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