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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내 꿈, 그대 안에 1권

규나 지음스칼렛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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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 979-11-315-84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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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현대물 #메디컬 #연예인 #운명적사랑 #재벌남 #다정남 #상처남 #존댓말남 #다정녀 #상처녀 #쾌활발랄녀 #잔잔물 #힐링물
<프로필>
규나
핑크빛 꿈을 떠올리게 하는 감성로맨스, 몽상가 규나.
http://nabiyaid.blog.me
〈출간작〉
LOVERS
신의 강수
시작해 볼까, 우리 사랑
<카피글>
꾸준한 인기를 누리던 싱어송라이터인 윤성은 교통사고로 눈앞에서 아내를 떠나보내게 되고 하루아침에 비운의 남자가 된다. 1년 뒤 세상의 시선을 피해 은신 중인 그의 눈앞에 전공의 다인이 등장하고, 두 사람은 의사와 환자로 만나 묘한 감정에 둘러싸이게 되는데…….
“이 작사가 누군지 몰라도 ‘사랑’의 ‘사’ 자도 안 해 본 사람일 거예요. 아님 사랑에 크게 데었거나.”
윤성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손과 입으로는 사랑 타령을 줄기차게 해 대는 작곡가이자 가수 강윤성이 사실은 불타는 연애 한 번 안 해 본 남자였다는 사실을, 그녀가 너무도 쉽게 짚어 냈기 때문이다.
“다인 씨는 잘 알아요?”
“뭘요?”
“사랑이요.”
“사랑은요…….”
다인은 말을 꺼내다 말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눈을 떼룩떼룩 굴리던 그녀는 마음먹은 듯 입을 열었다.
“사랑은 그런 거래요. 말로 다 하지 않아도, 꼭 다 보여 주지 않아도, 소리 없이 내려와 옷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그렇게 나도 모르게 젖어 드는 거.”
사랑은커녕 호감 어린 말 한마디도 제대로 입에 담지 못했던 그의 마음이 이만큼 깊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까…….
<목차>
1권
Prologue
언제나 맑음
싸가지 결핍증
세렌디피티
외출
미결 사건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2권
그대, 내 꿈 안에
연애 집합소
사랑한다는 흔한 말
잔혹 동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Will You Marry Me?
<원고 미리보기>
#Prologue
서울과 수도권 지역 전체를 연결해 주는 외곽 순환 도로 동부 구간. 폭주족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나들목 주변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오늘은 또 안 오는 거 아냐?”
“불금을 그냥 넘겼으니 오늘은 나타날 거야.”
커피를 나눠 마시던 두 경찰관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굉음에 시선을 교환했다.
“맞지?”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재차 강조하는 동료에게 피식 웃어 준 첫 번째 경찰관은 곧장 운전석에 올랐다. 두 번째 경찰관 역시 조수석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하지만 차 문을 열기도 전에 멈춰 서야만 했다. 바로 곁을 지나간 빨간색 포르쉐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탓이다.
“빨리 타.”
“저 차 맞나? 처음 보는 차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대며 차에 오르는 동료에게 첫 번째 경찰관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어디서 또라이 하나 더 스카우트했나 보지.”
얌전히 서 있던 경찰차에 시동이 걸리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 찰나, 또 다른 폭주 차량 한 대가 그 곁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기세에 눌려 잠시 숨을 고르던 경찰관은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던 포르쉐가, 눈도 한 번 깜박하기 힘든 찰나의 순간에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으며 뒤집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포르쉐는 자신을 사랑해 준 주인을 배신이라도 하려는지,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공회전하고 있는 바퀴를 하늘로 치켜든 채 날렵하게 내리뻗은 차 지붕으로 도로를 가로질렀다.
포르쉐를 추격하는 것처럼 보였던 SUV 차량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멈춰 섰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길게 늘이며 달리던 경찰차도 멈췄다.
각자의 차에서 뛰어내린 세 남자는 경주하는 사람들처럼 중앙 분리대를 넘어 달려갔다.
“해은아!”
절규하듯 내지르는 윤성의 목소리는 공허한 도로 위에서 충돌하는 곳 하나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공중에서 발을 젓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새빨간 포르쉐 옆에 도착한 그는 미친 듯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앞 유리를 뚫고 튀어나온 아내의 모습이 그로 하여금 발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무전기를 들고 지원을 요청하는 경찰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지만, 윤성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내지르고 있는 울음소리만이 고막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세 도착한 구급차에서 쏟아져 나온 주황색 유니폼들이 아내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윤성은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았다.
“관계가 어떻게 됩니까?”
사고 현장을 살펴보던 경찰 하나가 물었다. 윤성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했다. 경찰은 곁에 선 남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아서다.
‘어?’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금 상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인제 보니 이 사람, 연예인이다. 바로 얼마 전 떠들썩한 결혼식을 치른 가수 겸 배우.
‘그렇다면 저 여자는…….’
궁금증을 꾸역꾸역 내리누르며 경찰관은 남자를 주시했다.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꽉 쥔 주먹과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떨고 있는 어깨, 후들대는 다리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 서성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불안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경찰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인 후에야 제대로 된 소리 한마디를 뱉어 냈다.
“제 아내…….”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 적고는 다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음주하신 건가요?”
집을 나서기 직전에 그녀가 들고 있던, 반 이상 마셔 버린 위스키병이 떠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고개를 갸우뚱하던 경찰은 남은 질문을 하려다가 차체에서 끌려 나오고 있는 운전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 병원으로 가 봐야 정확한 사인(死因)을 알 수 있겠지만, 중앙 분리대에 충돌할 때 벌써 경추와 두개골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구조대원 중 한 명이 이쪽을 보며 말하고 있지만, 윤성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사고 현장 주변을 밝힌 헤드라이트 속에 누워 있는 해은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시선을 돌리려 해도 돌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바로 뒤를 따라 달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에 있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왔던 거라면 아마 그는 자신의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피와 알 수 없는 액체로 범벅이 된 아내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처참했다.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흐느낌을 ‘끄억끄억’ 내뱉으며 그는 그녀의 곁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경찰과 구급대원들은 ‘사랑하는 아내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불쌍한 남자’ 윤성의 울음에, 안타까운 한숨으로 깊은 공감을 표했다.
앞서 달리며 구급차를 에스코트하던 경찰차는 고속 도로를 벗어나서야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멍한 눈으로 차창 밖을 보고 있던 윤성은 조수석에 앉은 경찰이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부인, 이해은 씨 핸드백과 소지품입니다. 아까 그 차에 있던…….”
윤성은 경찰이 건넨 것을 받아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격렬하게 다투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귓가를 때렸다.
*
“이해은.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단지 남자가 필요한 거겠지.”
술에 취한 채 끈적하게 들러붙는 아내의 팔을 떼어 낸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은 말을 읊조렸다.
“나가서 다른 남자 찾아봐.”
“오빠 어쩜 그렇게 말을 해? 난 오빠 아내야! 우린 부부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저급한 말을 할 수가 있어?”
뻔뻔스럽게 받아치는 그녀의 악다구니에 그는 기가 막힌 듯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결혼 생활 7개월 동안 숱한 루머를 만들어 내며 밖으로 나돌던 아내가 갑자기 각방 대신 그의 침대에 함께 들기를 원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그는 허리에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어릴 때부터 그를 동경했다던 그의 아내가 정작 흠모했던 것은 ‘서정호텔그룹의 둘째 며느리’라는 타이틀이었다.
‘오빠가 호텔 일에 관심을 보이면, 그땐 나도 남편에게 관심이 생길 것 같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본심을 드러낸 그녀는 호기롭게 ‘각방’을 선언했다. 애초에 아내의 협박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결혼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 갔다. 밤을 꼴딱 새우며 음악 작업을 하기도 하고, 두 달씩 소요되는 지방 촬영을 흔쾌히 수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비난을 가만히 당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녀가 원했던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고, ‘돈’을 제공해 주고, 궁전처럼 넓은 집을 양보해 준 대가로 ‘저급하다’는 비난이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각방을 요구했던 것도 그녀였고,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 역시 그녀였지만, 처가 식구들에겐 어느새 윤성이 그런 ‘천하에 없을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난 오빠만 있으면 되는데, 그저 기댈 수 있는 남편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거 하나도 못 해 주겠단 거야? 정말, 사람이 어쩜 그러니.”
정확하지도 않은 발음으로 주절주절 읊어 대는 대사를 보니 내일 아침 일찍 장모의 전화를 받게 될 것 같다.
‘강 서방, 자네 갈수록 실망이야. 어쩜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나!’
딸의 새빨간 거짓말에 가슴을 치며 밤잠을 설치게 될 장모에게 위로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오늘 이 상황이 어떻게 둔갑할지는 충분히 예상된다.
한창 작업 중인 그를 다급하게 불러들인 이유가 고작 이런 거짓 부부 놀음이었다면, 더는 머무를 필요가 없다. 그는 심호흡한 다음 차분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자라.”
“어디 가?”
해은이 놀라 물었지만, 윤성은 입을 꾹 다문 채 현관으로 향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한 발짝만 더 움직여! 그땐 정말 끝이야!”
윽박지름에도 윤성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결혼 7개월 만에 ‘초야’를 요구하고 있는 그녀의 꿍꿍이가 궁금했지만, 윤성은 꿋꿋이 신발에 발을 꿰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마당 안을 한 바퀴 휘돌아 나간 뒤에야 윤성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가면 놀이 같은 지긋지긋한 쳇바퀴질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는 것이, 그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일 테니까.
대문 앞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탄 그는 망설임 없이 시동 버튼을 눌렀다.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서서히 힘을 빼고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새빨간 스포츠카는 마치 총구를 벗어난 총알처럼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어느새 어스름하게 밝아 오는 새벽.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던 종합병원 주차장에도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주차장 입구 근처에 세워진 SUV 한 대도, 이제 잠잠해졌다. 쿵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있는 힘껏 질러 대는 고함도 이따금 흘러나왔지만, 지금은 조용하다.
죄책감을 자학으로 덜어 보려 발악하던 윤성은 운전석 시트에 깊숙이 틀어박혀 있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을 만큼 진이 빠져 버린 터라 눈동자를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눈동자가 멈춘 곳은 조수석이다.
해은의 차에서 찾아낸 물건들이 담긴 봉투와 핸드백.
‘부인의 핸드백과 소지품입니다.’
경찰관이 했던 말이다.
부인, 남보다 더 멀게 느껴지던 여자, 그의 부인. 선뜻 손을 뻗을 수 없게 만드는 두려운 존재. 그런 그녀의 핸드백조차도 그에겐 두렵기만 하다. 바닥까지 다 드러냈던 해은의 또 다른 비밀을 알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윤성은 한동안 그 물건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힘겹게 시선을 들어 넓은 주차장을 뜨문뜨문 오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어서다. 가능하다면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처가 식구들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한참을 더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핸드백으로 손을 뻗었다.
자잘한 소지품들을 뒤적이던 그의 손끝에 단단한 촉감의 물건이 잡혔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틱을 꺼내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스쳤다. 핸드백을 잠시 더 뒤지던 그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핸드백과 함께 받았던 반투명한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가 예상한 물건을 비닐봉지에서 발견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는 코팅된 표지에는 감흥 없는 고딕체의 글씨가 박혀 있었다.
/굵기/제일 산부인과
해도 뜨지 않은 조용한 주차장에, 마치 짐승의 것과도 같은 포효 소리가 두세 번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주차장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은 잠시 그 소리에 놀란 듯 멈춰 서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각자의 길로 걸어갔다.
#언제나 맑음
/기울기/11개월 후, 서울
“서다인! 자료실에 꿀단지 묻어 놨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다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선배, 그게…….”
입은 자동으로 변명을 주절댔다. 하지만 그녀를 부른 사람은 선배가 아니라 동기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기에게 다인은 오만상을 찌푸려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야, 박시준! 너 요즘 덜 맞아서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다. 어?!”
앙칼진 목소리로 동기에게 쏘아붙인 그녀는 너무 놀라 떨어트릴 뻔했던 A4 용지들을 다시 야무지게 정리했다. 그러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선배에게 필요한 자료 복사본보다 당장 내일 치를 시험공부가 더 시급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추락하겠네. 웬 한숨이 그렇게 길어?”
정신과 레지던트의 일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레 묻고 있는 동기를, 다인은 밉살스럽다는 듯 노려봤다.
“시험 준비 해야 하잖아. 너야 만날 농땡이 부리는 게 일과니까 별로 와닿지도 않지?”
“우린 기습이 없잖아. 우리 병원에 너네처럼 기습 쪽지시험 보는 과는 아마 없을걸.”
시준이 사실을 되짚어 주자 다인의 입에선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쪽지시험만 있냐? 회진 돌다가 교수님 필 받으시면 퀴즈 대회 해야지, 어느 날 갑자기 의국에 들이닥치셔서 면담 상황극 해 보자 그러시지, 툭하면 세미나에, 툭하면 토론까지 아주 미칠 지경이다.”
기다렸다는 듯 푸념을 늘어놓는 다인에게 시준은 되레 타박했다.
“그러니까 나 바꿀 때 같이 바꾸자고 했잖아. 김영지 교수님 얼마나 깐깐한데, 겁도 없이 덤비더니.”
다인은 한심한 표정으로 동기를 바라봤다. 왜 굳이 ‘깐깐한 김영지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지 수도 없이 설명했지만, 그새 또 잊었나 보다. 또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그녀가 내려야 할 층이다. 다인은 망설임 없이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다인!”
의국으로 향하는 복도에 날카롭게 울리는 목소리는, 이번에는 진짜다. 다인은 빠르게 발을 움직여 선배 앞으로 달려가며 대답했다.
“네! 자료실에 꿀단지는 없어요. 단지 복사기가 좀 말썽을…….”
“이리 내! 한나절이야 한나절, 요즘 정신없는 거 알면서. 가서 밥 먹고 와.”
알밤을 놓는 시늉을 하며 나무라던 민영의 말투는 뒤로 갈수록 누그러졌지만 다인은 주눅 든 표정으로 쭝얼댔다.
“그, 내일 시험공부…….”
“밥부터 먹고 나중에 책상에 노트 놔둘 테니까 좀 한가해지면 그거 봐.”
벌써 반쯤 몸을 돌린 민영의 제안에 다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우, 언니야 고마워.”
민영은 등에 착 달라붙어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다인의 팔을 풀어내며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친자매보다 더 돈독한 사촌 동생을 챙기는 일은, 민영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민영은 짐짓 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럴 때만?”
“항상! 늘! 평생!”
다인의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에 민영은 실소를 터뜨리며 의국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의 뒤통수에 대고 경례하는 시늉까지 끝낸 뒤에야 다인은 돌아섰다. 아무래도 구내식당은 미처 끝내지 못했던 면담 한 건을 해결해 놓고 가야겠다. 좋아하는 일은 늘 마지막에 해야 성취감이 더 크니까 말이다.
뭔가를 먹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다인은 습관처럼 스텝을 밟았다.
“아, 다인아.”
의국으로 들어갔던 민영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를 지르자 다인은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어? 아니, 네?”
투스텝을 추고 있던 발이 엉키며 휘청했지만 다행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니에게 되돌아갔다.
“좀 전에 교수님 전화하셨어. 4시쯤부터는 방에 계신다고 너 찾으면 보내라고 하시던데, 너 또 나 모르게 사고 친 거 아니지?”
“아니!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뭐지? 왜? 왜 찾으시는 거지? 나도 모르는 새에 나 뭔 짓 했나?”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다인 때문에 민영의 눈꼬리도 걱정스럽게 늘어졌다.
“일단 교수님께 먼저 가 봐.”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바꿔 준 민영은 다인이 발을 떼자마자 황급히 붙잡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니다, 그럴 게 아니라 밥부터 먹고 가. 나랑 같이 가자. 너 혼자 두면 또 안 먹을 거 아냐. 고모한테 또 혼나긴 싫어.”
손목을 잡고 이끄는 사촌 언니의 뒤를 따르며 히죽거리던 다인은 느닷없는 교수의 호출이 떠오르자 금세 또 기가 죽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대체 왜 찾으시는 거지.”
“글세. 근데 너 요즘 며칠은 제법 잘했으니까 뭐, 혼날 일은 아닐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마.”
*
“온 김에 민영이 보구 가.”
“안 시켜도 그럴 거예요.”
영지의 말에 지후는 입을 삐죽이며 대꾸했다.
“세미나 준비 때문에 어제도 병원에서 밤새웠어.”
아들의 표정을 고스란히 목격한 영지는 이번에도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했다. 지후의 입꼬리가 조금 더 늘어지며 들릴 듯 말 듯 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신과 레지던트가 고민영 하나밖에 없나.”
“뭐라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영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지후는 입맛을 ‘쩝’ 다시며 딴소리를 지껄였다.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
“설마, 고민영이 나이 들면 김영지 되는 건 아니겠지?”
진지한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영지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럼 나 다시 생각해 보게.”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다. 영지는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매섭게 눈을 흘겼다.
“까분다!”
“어휴, 무서워.”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들에게, 영지는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애 밥 좀 먹여 놓구 가. 종일 의국에서 안 나온 모양이더라.”
“예, 예. 그렇게 합죠.”
*
“너 아침도 안 먹었었지?”
허겁지겁 밥을 떠 넣고 있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영이 묻자 다인은 언제나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응.”
“너도 안 먹었다며.”
불현듯 나타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남자에게 두 자매의 시선이 집중됐다.
“잉? 여기 웬일이야?”
“웬일은, 너 보러 왔지. 엄마한테 부탁할 일도 좀 있고…….”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지후는 대답을 뭉갰다. ‘부탁할 일’은 아직 그의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지후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프리카 의료 봉사 신청했다며? 이번만큼은 안 가겠구나, 했더니.”
지후가 잔소리를 시작하자 민영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콧소리를 냈다.
“왜 그래 또―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 나는!”
민영의 애교에 슬쩍 미소를 짓던 지후는 단호하게 시선을 돌리며 괜히 이죽거리는 시늉을 했다.
“공부하랴, 봉사하랴, 연애하랴, 바쁘시구먼.”
“저 봐, 저 봐― 얼굴은 벌게서 콧구멍 벌름벌름하면서도 튕길 건 다 튕겨.”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리며 지켜보고 있던 다인이 기회를 놓칠세라 지후를 놀려 댔다.
“넌 형부가 좀 어렵고, 민망하고, 그런 게 전혀 없니?”
민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다인은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왜 어려워? 왜 민망해야 하는데?”
능청스러운 다인의 대꾸에 지후는 한숨을 내쉬며 푸념 같은 말을 중얼댔다.
“내가 너무 잘해 줘서 그래. 처음부터 버릇을 확 잡아야 했는데.”
“그러니까, 언니고 형부고 다 맞먹으려 든다니까.”
민영이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자 다인은 씩 웃어 보였다. 주거니 받거니, 맞장구를 쳐 가며 그녀를 흘겨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 애교스러운 윙크도 빼먹지 않고 날렸다. 두 사람의 입에선 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근데 오빤 왜 교수님을 집에서 안 만나고 만날 병원에서 만나요?”
“오늘은 뭐 좀 부탁드리려고. 근데 이렇게 부실하게 먹고 체력이 남아나? 온 병원을 탭 댄스 추면서 돌아다니려면 더 든든하게 먹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럼 형부가 맛있는 것 좀 사 줘 봐요, 좀!”
다인이 애교스럽게 ‘형부’라는 말에 악센트를 줘 가며 은근한 압박을 가하자 민영은 그런 다인을 다그쳤다.
“빨리 먹기나 해. 너 밥 먹여 보내느라 늦었다는 거 교수님이 아시면 나까지 미운털 박혀, 야.”
“어이쿠― 무서워라. 쳇!”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수저를 내려놓은 그녀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언니, 형부. 즐거운 데이트하시어요. 소저는 이만 교수님 방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겠어요.”
울상을 지으며 말하던 다인은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민영의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살을 부려 가며 식판을 들고 멀어져 갔다.
테이블에 남은 두 사람은 다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구내식당의 모든 사람에게 알은체를 해 가며 고개를 꾸벅거리기도 하고,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기도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까지 미소를 짓게 하였다.
‘잘한 거겠지?’
지후는 속으로 물었다.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물음이었다. 권위 있는 정신과 전문의 김영지 박사의 선택을 굳게 믿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조심스럽다. 촐랑대기 바쁜 저 꼬맹이의 머릿속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다.
‘믿어야겠지.’
그는 다시 한번 속엣말을 읊조렸다. 부디 엄마의 선택이 제대로 된 선택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동생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민영의 얼굴엔 걱정이 떠 있었다.
‘왜 부르신 거지…….’
늦어도 오늘 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겠지만, 궁금증은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풀리지도 않을 문제를 붙들고 헛된 씨름을 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다. 민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별일 아닐 거야.’
자신을 다독이는 속엣말을 읊조리며 지후에게 시선을 돌리던 민영은 멈칫하고 말았다. 지후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남자 친구의 안색을 살피던 민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쭉 교수님 방에 있다가 오는 거야?”
“어?”
딴생각에 잠겨 있던 지후는 어눌한 소리를 한 번 내고서야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았다.
“응.”
황급히 표정을 정돈하며 이쪽으로 돌아앉는 지후를, 민영은 면밀히 관찰했다. 이 남자는 배우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표정을 열댓 번도 더 바꿀 수 있는, 지금처럼 순식간에 안색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민영의 머릿속이 아까보다 더 분주해졌다.
“무슨 일인데?”
“별거 아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는 지후에게 민영은 얼굴을 들이밀며 재차 물었다.
“얼굴엔 별거라고 쓰여 있는데?”
지후는 화들짝 몸을 뒤로 빼며 기겁하는 시늉을 했다.
“나 가지고 분석하지 말랬지, 무섭다니까.”
“분석이 아니라 딱 봐도 쓰여 있다니까.”
“이래도 써 있냐, 이래도?”
동그랗게 뜬 그녀의 눈앞에, 지후는 바짝 제 면상을 들이대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번에는 민영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여전히 그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었다.
‘엄마한테 부탁할 일도 좀 있고…….’
얼버무리는 것 같았던 처음 그의 말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집요하게 굴고 싶었다. 그가 했던 ‘부탁’이라는 것이 다인이 호출당한 것과 연관이 있는 건지도 사실 헷갈리지만 말이다.
‘쯧’ 민영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연관이 있다 한들, 당장 해답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막연한 걱정만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럴 시간에 자료 한 장을 더 보는 것이 그녀에겐 백배 더 나은 일이었다.
체념한 듯한 그녀의 표정을 눈치챈 지후는 냉큼 화제를 돌렸다.
“밥 먹자. 배고파.”
민영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이니 저녁밥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점심을 걸렀다는 소리다. 민영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밥도 안 먹고 여태 뭐 했어?”
‘사돈 남 말 하네.’
들키지 않게 속으로만 빈정거린 지후는 슬며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를 완벽하게 속이려면 카메라 앞에서보다 월등한 연기력이 필요하다.
“엄마도 없고, 마누라도 없는 놈이 어디 가서 밥을 얻어먹어. 빨랑 일어나. 뱃가죽이랑 등골이랑 키스하는 소리 안 들려?”
지후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서 의기양양하게 배식대 쪽으로 향했다. 입을 삐죽이고 있던 민영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실장님 오셨네. 요즘 왜 뜸했어요. 보고 싶어 눈 빠지는 줄 알았네.”
배식대 뒤에 서 있던 조리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민영은 흠칫하며 슬금슬금 게걸음을 걸었다. 그와 함께 서 있다가는 배식대에 온종일 붙들려 있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모님 눈 빠질 때 됐지 싶어서 왔어요.”
“빠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미리 자진 납세 해.”
주거니 받거니, 깔깔, 껄껄대는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지만, 민영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이번 드라마 끝나면 아예 세끼를 다 여기서 해결할까요?”
“그럼 좋지! 우리 실장님은 날마다 특별 메뉴로 모시겠습니다.”
“우와 침 고인다, 침 고여! 오늘은 무슨 반찬에 이모님 사랑이 듬뿍 들어갔나…….”
지후의 너스레에 민영은 입꼬리를 늘이며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어디서 저런 넉살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실장님 옷발 유지하려면 고단저지 드셔야지. 여기 찜닭.”
“고단저지가 뭐예요?”
“고단백 저지방. 내가 가슴살로만 골라 줄게요.”
킬킬, 까르르, 저쪽에선 또 한바탕 웃음이 번졌다. 배식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리조리 얼굴을 숨겨 가며 식판을 채운 민영은 종종걸음으로 배식대를 떠났다.
“갈수록 늘어요.”
테이블로 와 앉는 지후에게 민영은 쭝얼쭝얼 푸념을 쏟아 냈다.
“뭐가?”
“수다가. 갈수록 아줌마스러워.”
입을 삐죽이는 민영에게 지후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팬서비스야.”
“그건 팬서비스가 아니야, 그냥 수다지.”
민영이 눈을 부릅뜨며 수다였음을 재차 강조하자 지후는 테이블 너머로 몸을 숙여 속삭이듯 물었다.
“질투해?”
민영의 입이 딱 벌어졌다.
“뭐래, 하! 질투는 무슨.”
“맞는데, 뭐얼.”
느물대는 지후의 응수에 적당한 반박거리를 찾지 못한 민영은 눈을 흘기며 화제를 돌렸다.
“병원 출입 좀 자제해.”
“왜?”
지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많이 알려졌어. 노출이 너무 잦아.”
“결혼 날짜까지 다 발표한 마당에, 인제 와서 노출 줄이면 비밀 연애 되나?”
밉살스럽게 얼굴을 흔들어 대는 지후를 민영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그러곤 그의 빈정거림은 안 들린다는 듯 식판에 집중했다.
“엉큼하긴.”
지후는 끝낼 생각이 없었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아까보다 더 느물대는 어조로 그녀를 약 올렸다.
“은밀하게, 둘이서만, 이런 거 원해?”
민영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가 과장된 연기를 선보일 때 자주 볼 수 있는 께름칙한 표정이다. 그는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남잔 줄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체념한 듯한 민영의 혼잣말에도 지후는 성의 있게 대꾸해 주었다.
“진즉에 알아 놓고 뭘 발뺌해.”
“몰랐어, 진심, 진짜, 하늘땅 별 땅 각기 별 땅!”
“퉤퉤퉤!”
민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버릇에 잊지 않고 추임새를 덧붙이는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깔깔대는 민영을 따라 지후도 웃었다. 그녀를 웃게 하는 일이라면 침 뱉는 시늉이 아니라 똥 싸는 시늉이래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팬들 사이에선 차도남으로 불리는 임지후가 이렇게 될 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일단 한 번만 딱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니까. 애가 예쁘고 착하고 센스 있고 다 좋은데 너무 공부만 해서 탈이야. 공부랑 지 사촌 동생밖에 모르니……. 네가 열 여자, 아니 백 명을 데려온대도 난 걔만큼 마음에 드는 애는 없을 것 같아. 병원으로 오든지, 아니면 내가 걔를 부를 테니까 집으로 오든지 결정을 해.’
장황하고도 끈질겼던 엄마의 설득에 그가 굴복당한 것은 꼭 5개월 전이었다. 그날은 하필 42시간 동안의 촬영을 마친 직후라 컨디션은 바닥이었다. 영지의 일방적인 시간 약속을 취소하려 줄곧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그는 결국 직접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잠깐이면 돼, 시동 끄지 말고 기다려.”
“그럼 한 바퀴 돌아서 차 돌려 올게요. 형 나오면 바로 출발하게.”
지후가 내리자마자 밴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지후는 다시 한번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5시 10분.’
속엣말로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며 지후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시각까지는 50분이나 더 남았다. 취소하기에는 넉넉한 시간이다. 지후는 대문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전화도 안 받으셔. 미치겠네.”
딩동, 딩동,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손길이 점차 빨라졌다. 민영은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거친 손길로 걷어 귀 뒤로 걸고는 다시 전화기를 꺼냈다.
대문 근처에 세워진 짙푸른 빛깔의 비틀이 지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누구 차야?’
궁금증이 이는 순간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데, 다인이 근처에 있으면 바꿔 봐.”
누군가와 통화 중인 모양이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조용했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핸드폰 되면 의국으로 했겠니? 아니다, 걔 찾을 필요 없겠다.”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를 다그치던 여자는 이내 도리질을 치며 방금 했던 지시를 번복했다. 그리고 숨 쉴 틈도 없이 이어진 물음.
“혹시 교수님 병원에 계시니?”
지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를 훑어봤다. 부모님 집 대문 앞에 서서 ‘교수님’을 찾는 젊은 여자라면…….
‘뭐 이렇게 빨리 왔어.’
소리로 내뱉지 못할 푸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김영지 교수는 제자에게 거짓말을 해서 이곳까지 오게 하였고 그 제자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온 것이다. 무려 50분이나 일찍.
하긴, 교수의 꿍꿍이가 뭔지도 모르고 왔을 테니 빨리 해치우자 마음먹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반쯤 체념한 지후는 아쉬운 대로 비틀의 선팅 된 창문을 거울 삼아 제 모습을 점검했다. 이틀 동안 잠이라곤 두 시간밖에 못 잤지만,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지 않고 온 덕에 못 봐 줄 만큼은 아니다. ‘흠, 흠!’ 그는 목을 가다듬으며 대문간으로 다가섰다.
“누구세요?”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초인종을 눌러 대고 있던 민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섰다. ‘히익!’ 너무 놀라 급박히 공기를 들이켜다 사레까지 걸렸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에 대고 마른기침을 해 대던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피식’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이다. 지후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웃음기를 감췄다.
“누구신데 남의 집 앞에서…….”
“어? 어, 아, 아!”
어눌한 소리로 두어 번, 탄식과 탄사를 연달아 뱉어 낸 그녀는 한참 만에 대답을 생각해 냈다.
“안녕하세요, 전 세종대학병원 전공의예요. 김영지 교수님 심부름으로 자료 가지고 왔는데,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안 열어 주시네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무도 없을 거예요.”
예의를 갖춘 인사와 긴 상황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지후의 대답은 간결했다. 민영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어, 그럼 이거 좀, 교수님께 전해 주세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봉투를 건네고 곧장 걸음을 옮기려던 민영은 멈칫하며 대답을 주워섬겼다.
“예? 어, 아마 그럴 거예요. 중요한 게 아니면 급하게 가져오라고 안 하셨을 테니까.”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었을 텐데…….”
민영은 그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체하며 인사를 챙겼다.
“어쨌든 전달했으니까 저는 이만. 안녕히 계세요.”
겉으로는 인사 같지만, 그녀의 속내는 상황을 종료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입꼬리를 늘인 채 봉투를 뒤적거리던 그가 다시 질문했기 때문이다.
“근데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런 거 막 떠넘기고 그냥 가요?”
“아니, 그게, 어, 임지후 씨잖아요. 김영지 교수님 아들.”
오늘따라 자꾸 더듬거리는 입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민영은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답을 끝냈다. 그와 동시에 지후의 입에선 짧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알아봤으면서 알은체도 안 해요? 서운하네.”
지후는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꾸며 내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제법 효과를 보는 제스처다. 오늘도 그 효과가 발휘될지는 모르겠지만.
반쯤 몸을 돌리다 말고 정지 자세가 되어 버린 그녀는 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짜증이 난 모양이다. 그러다 체머리를 흔들며 변명 같은 말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제가 좀 당황해서…….”
첫 대면의 순간을 떠올린 지후는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교수님 욕한 거 안 일러바칠게요.”
“저 욕 안 했어요!”
이번에는 재깍 대답이 흘러나온다. 지후는 또 넌지시 떠봤다.
“그럼 흉본 건가?”
“아니라니까요! 흉본 적도 없을뿐더러 욕은 더더욱 안 했어요. 진짜예요, 하늘땅 별 땅 각기 별 땅!”
얼굴까지 빨개지며 따지고 드는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려던 찰나, 그녀의 입에서 어린 시절 노래처럼 외우고 다니던 말이 튀어나왔다. 지후는 냉큼 침 뱉는 시늉을 했다.
“퉤퉤퉤!”
뜻밖의 순간에 발휘된 그의 반사 신경 때문에 민영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당황한 지후의 입도 벌어졌다. 그리고 그 입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임지후 씨!”
턱을 괸 채 회상에 젖어 있던 지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민영의 동그란 눈동자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어?”
아직 상념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것 같은 지후의 멍한 표정에 민영은 ‘피식’ 실소를 뿜었다.
“다 드셨으면 가자구요.”
“어, 응. 가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판을 들고 일어서는 민영을 따라 지후도 황급히 움직였다.
“커피?”
민영의 간단한 물음.
“응.”
그리고 지후의 간결한 대답이다. 두 사람은 유유히 식당을 빠져나갔다.
*
주인의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리된 진료실에 다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인터뷰요?”
“입원하도록 하는 게 우리의 최종 목표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말을 이어 가던 영지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대단한 프로젝트 같다. 아무튼, 요점은 복합적인 심리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가 입원과 검사에 대한 두려움을 최대한 떨칠 수 있도록 사전 면담을 하는 거야. 보통은 병원에서 이뤄지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알다시피 환자가 병원이라면 치를 떠는 케이스라 왕진을 나가는 거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다인은 무릎 위에서 모아 쥔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교수의 말이 끝나고, 이제 그녀가 대답해야 할 차례지만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개방 병동이 아닌, 폐쇄 병동으로 직행해야 할 만큼 심각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의 경우에 왕진은 흔한 일이었다.
물론 교수가 지칭하는 그 환자가 폐쇄 병동으로 갈 환자는 아니다. 하지만 두려운 환자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우물쭈물하던 다인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겨우 짜냈다.
“전, 그 사람 좀 무서워요.”
“의사가 환자를 무서워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저기, 그러니까…….”
다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을 정확하게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분주히 굴려야만 했다. 무릎 위에 있던 열 개의 손가락도 덩달아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영지는 잠자코 기다렸다. 지금 영지는 다인이 머뭇거리는 이유도, 두려워하는 실체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단순히 환자에게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그 환자의 트라우마가 주는 두려움이 이 아이를 삼키려는 것이리라.
아직 준비가 덜 된 아이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아끼는 제자는 장차 정신과 의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다. 환자들의 트라우마 따위에 굴복해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부지게 틀어 묶은 영지는 온화한 목소리로 제자를 불렀다.
“다인아.”
“네?”
“8년이야. 이제 때가 된 거 같지 않니? 이런 순간을 예상 못 하고 정신과를 지원한 건 아니잖아. 너 학부 시절에 나한테 말했던 거 기억하니?”
무겁게 닫혀 있던 입술을 축이며 다인이 대답했다.
“교수님처럼 되고 싶다고 했었죠. 마음의 병이 무거워 고통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싶다고…….”
“이 환자는 지금 자신을 스스로 가둬 놓고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있어. 가족들도, 친구들도 모두 다가오지 못하게 선을 그어 놓고 말이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다인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지도 교수가 자신을 지목해 호출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극복하고 못 하고의 문제는 순전히 그녀 자신의 문제다. 첫 번째 시도에 보기 좋게 성공한다면 그녀는 이 트라우마 극복기를 무용담 삼아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두 번째 기회도 없을지 모른다. 짧지만 세찬 도리질로 ‘실패’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몰아낸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다인이 승낙의 대답을 하기까지, 그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이 망설였을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너무 잘 아는 영지는 진심으로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대신 넌 내일 시험에서 제외야. 이만하면 보상이 훨씬 큰 것 같은데?”
‘쪽지시험 면제’를 제안하는 교수에게 다인은 힘겹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안게 된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려 하는 농담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인은 머리를 숙여 진심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
터미널 앞에 줄을 서 있는 택시 중 하나에 올라탄 그녀는 메모지에 적힌 주소를 기사에게 불러 주고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버스 내리자마자 전화해.’
신신당부하던 언니 때문이다. 중간보고를 충실히 하는 것만이 언니의 걱정을 덜어 줄 방법이니까.
그녀는 두세 번쯤 통화 버튼을 반복해 누르다가 신호음만 이어지는 전화기를 귀에서 떼어 냈다.
“바쁜가…….”
그녀가 전화기를 내려놓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룸미러를 연신 흘끗거리던 택시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주소는 왜 찾아가는 거요?”
눈만 끔뻑이며 아무 대답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룸미러로 쳐다보던 택시 기사는 자신의 질문이 너무 뜬금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실소를 뿜더니 말을 바꿔 다시 물었다.
“그 집엔 무슨 볼일로 가는지……?”
“아, 일이 좀 있어서요.”
드디어 대답을 듣게 된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 냈다.
“그 별장 주인 까칠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거든. 아가씨가 무슨 일로 가는지는 몰라도 그 집에 찾아갔다가 발도 못 들이고 쫓겨난 여자들이며 학생들이 수두룩했었어.”
“그 사람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오래됐나요?”
“한 1년쯤 되나? 작년 연말에 왔으니까. 두 달 모자라는구먼. 눈 올 때 이사 왔거든.”
기사는 ‘베일에 싸인 호숫가 별장의 집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상대를 만난 것이 반가운 듯 온갖 정보들을 그녀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뭐로 먹고사나 몰러. 당최 신기하단 말이야. 천날만날 낚시질이나 하면서 개는 또 세 마리나 키워요. 한 마리는 늘상 데리고 다니는데 말이야, 차에 싣고 다니면서 아주 상전 대접이야. 동네 어르신들이 그거 보고 혀를 차지. 말세야 말세.”
너털웃음 소리를 섞어 가며 신나게 떠들고 있는 기사와는 대조적으로 다인은 조용하다.
“뭐 듣기로는 부잣집 아들내미라고도 하던데, 하고 다니는 행색을 보면 또 그런 거 같지도 않어.”
그녀는 조용히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이 지긋한 기사의 수다를 듣기만 했다. 그가 왜 이런 시골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도 들어 알고 있지만, 굳이 기사의 말을 막지는 않았다.
왼쪽 차창 너머로 보이는 호수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사를 불렀다.
“저기, 죄송한데요. 호숫가라고 했는데 왜 점점 반대로 가고 있죠?”
“이 길이 지름길이야. 아 참! 생각난 김에 이거 챙겨 둬요.”
얼떨결에 손을 뻗어 기사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든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명함과 기사를 번갈아 쳐다봤다.
“혹시 그 양반이 또 내치면 나한테 전화해. 거기서 정류장도 한참 멀거든? 내가 지난봄까지만 해도 그 양반 팬인지 볼펜인지 하는 아가씨들 수두룩하게 실어다 날랐지. 요즘은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가 싶더니……. 아가씨가 딸 같아서 하는 소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고. 밤중에 혼자 정류장에 서 있느니보다는 택시가 나을 거야.”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를 먹었음 직한 기사의 호의에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마 하고 대답했다.
어느새 어둑해진 시골길을 한참 달리던 택시는 작은 골목들이 교차하는 사거리에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택시 같은 차가 들어가면 그 양반이 또 난리를 쳐요. 저― 앞에 집 보이지? 저기야. 그냥 쭉 바로 들어가면 돼.”
“네, 감사합니다.”
“밤길 혼자 헤매지 말고 꼭 택시 불러요. 이 근처에선 마을도 멀어.”
다인은 요금을 치른 후 인사를 하며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거듭 당부하는 기사의 목소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택시가 떠난 자리에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보며 심호흡을 했다. 호수와 산과 들, 그림 같은 풍경은 모든 것을 다 숨겨 줄 것처럼 고즈넉하다.
꾸준한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등지고 선택한 곳. 싱어송라이터(singer song―writer)가 은신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인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비운의 남자가 동굴을 파고 숨어들기에도 좋은 장소다.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녀는 이윽고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택시 기사의 말대로 별장 입구에 발도 들이기 전에 내쳐진다면, 기왕이면 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내쳐지는 것이 낫다.
호수 건너편에서 낚시를 하고 돌아오던 윤성은 부쩍 짧아진 해를 향해 의미 없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라이트를 켰다. 본의 아니게 작은 들짐승을 치기라도 하면 그 께름칙한 기분을 며칠 동안 안고 지내야 하니 미리미리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주변을 고루 살피던 시선이 속도계로 향했다. 시속 30km. 서울이었다면 욕을 진탕 들어 먹을 만한 속도다.
‘서울.’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만 같은 도시 이름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다른 생각들이 따라붙었다.
‘1년 채울 거냐? 주변 사람 생각도 좀 해 줘야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당장 방송에 얼굴 들이밀라는 것도 아니고, 올챙이 시절 같이 배고팠던 감독이 OST 작업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촬영도 미루고 있는 판국인데 넌 그렇게 계속 머리 처박고 있을 거야?’
낚시를 접게 만들었던 통화 내용이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성민이 퍼부었던 말들은 마음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밤중에 가서 납치라도 해 오든가 해야지, 내가 볶여서 못 살겠다. 이제 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어? 와서 뭘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옆에라도 좀 있으라고. 너한텐 말도 못 꺼내고 나만 볶아 대는 아버지, 어머니 눈앞에 있으면 안 돼?’
친형인 태영이 윽박지르던 소리도 자연스레 귓가에 재생됐다.
서울을 떠난 지 11개월째다.
1년이 가까워지면서 가족과 친구들의 회유도 점차 강압으로 바뀌었다. 두 형이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해 대는 것도 모자라 절친한 친구인 지후까지 가담했다. 정신의학 박사라는 강력한 배경을 둔 지후는 며칠 전 최후통첩을 해 왔다. 구급차를 보내겠다는, 다소 유치한 발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
실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은 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을 흥얼거리며 복잡한 생각들을 물리치려 애썼다.
좌회전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핸들을 돌리는 순간, 앞에 나타난 희끄무레한 물체를 발견한 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질렀다. 소스라치게 놀란 탓이다. 그와 동시에 들려온 비명은 차 밖에서 난 소리였다.
앞 범퍼와 불과 3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스르륵 주저앉아 버리는 형체는 분명 사람처럼 보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고, 등골이 서늘해짐과 동시에 뒷덜미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는 심호흡하며 잠깐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목을 빼고 차 앞부분을 살폈다. 하지만 운전석에 앉은 채로는 시원하게 보이질 않는다.
요동치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차 앞으로 걸어 나온 윤성은 잔뜩 웅크린 형체를 유심히 관찰했다. 퍼질러 앉은 위치로 보나, 자세로 보나,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놀라 넋을 놓은 것처럼은 보이지만 말이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바람막이 점퍼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거리고 있던 다인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엔진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환한 라이트 불빛과 함께 나타난 차를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은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한 발자국도 되지 않을 거리를 남겨 두고 ‘끽!’ 소리를 내며 멈춰 선 차의 보닛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커질 대로 커진 눈으로 보닛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다인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다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혼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다시 일어서지도 못했다. 턱 주변을 비롯해 온몸에 돋았을 소름은 만져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였다.
덩치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던 차에 부딪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꿀꺽 삼키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학생. 괜찮아?”
벙거지를 덮어쓴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모자 때문에 남자의 눈은 보이지도 않았다.
‘여기선 마을도 멀어.’
하필 이런 순간에 택시 기사의 말이 또렷이 떠올랐다. 덜컥 겁이 난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봐요.”
검은 그림자처럼 보이던 그가 몸을 한층 더 숙이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거무튀튀한 야상점퍼와 확 대조되는 새하얀 피부가 더욱 소름 돋게 했다.
이제 차에 치일 뻔했다는 충격은 가시고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떡해야 하지?’
속엣말을 읊조리던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렸다. 부들부들 떨리기는 하지만 사지가 부러진 것은 아니니 기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저 수상한 사람에게서 도망가는 것이 이 순간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웅크린 채로 몸을 돌려 슬금슬금 기기 시작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윤성은 어이없는 실소를 내뿜었다.
“아니, 괜찮으냐니까 왜 도망을 가요?”
그의 부름에 일순 멈칫한 다인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별장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뛰어간다면 대문까지 1분 정도 걸리겠다. 1분 안에 저 남자에게 잡히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렇다는 얘기다.
다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아까 택시를 떠나보낸 자리는 더 멀다. 다인은 울상을 지었다.
‘밤중에 혼자 정류장에 서 있느니보다는 택시가 나을 거야.’
택시 기사의 충고를 떠올린 그녀의 표정이 별안간 확 펴졌다. 얼결에 받아 챙긴 명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가야죠. 보험사 부를 테니까 도망가지 말아요.”
남자는 계속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인은 명함을 어디 넣었는지 기억해 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선 날카로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골치 아픈 일 생기는 건 딱 질색이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
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 대는 통에 소스라치게 놀란 윤성은 얼른 손을 뗐다. 마치 치한의 습격이라도 받은 듯 몸서리까지 쳐 가며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그에게는 더 괴기스럽게 보였다.
‘설마?’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여잔가 싶기도 했다. 만약 그렇다면 한층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보호자를 찾아 인계해야 마무리가 될 테니 말이다.
“괜찮아요?”
그는 손을 대지 않는 대신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뭐지?’
어쩐지 걱정이 담긴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는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보험사’라는 얘기도 했었다. 지레 겁을 먹고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오해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몇 분 만에 일어난 모든 일이 충격의 연속이었으니, 잠시 이성이 마비되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다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환하게 켜진 라이트 속으로 들이민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헉!’ 세찬 들숨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엄마야! 가가가, 가가가가, 강…….”
“윤성.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서울에서 온 겁니까?”
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싸늘해지는가 싶더니 그녀가 미처 끝맺지 못한 이름을 대신 말하며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저, 저, 저기, 그러니까, 어…… 서울에서 온 건 맞아요, 맞네요.”
더듬거리는 그녀의 대답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는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다친 데 없죠? 내일이라도 아픈 데 있으면 회사로 연락하세요. 알아서 해 줄 거예요. 그리고 왔던 길로 쭉 다시 나가면 버스 정류장 있어요. 10시까지 버스 다니니까 서둘러 가면 탈 수 있을 거예요.”
말을 끝내자마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성큼성큼, 화난 듯한 그의 걸음걸이를 지켜보고 있던 다인은 문득 자신의 목적을 깨닫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형부가!”
일단 그를 불러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호칭을 잘못 말한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톡 때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임지후 씨가 보내서 온 거예요.”
차에 올라타려던 그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전 국민이 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절친한 친구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여자가, 이젠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그는 차 안으로 팔을 뻗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금 확인할까요? 아니면 그냥 조용히 돌아갈래요?”
다인은 입을 딱 벌렸다.
‘기막혀!’
지금 저 남자의 행동은 마치 귀찮은 사생팬에게나 할 법한 행동이다.
‘혹시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나를 팔아, 나한테 바로 전화해.’
교수와의 면담 직후, 걱정과 당부를 쉴 새 없이 반복하는 민영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지후가 한 말이었다. 지후의 선견지명에 다인은 수십 번 감사를 표하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지후의 번호를 찾아 당당히 그에게 보여 주며 호기롭게 선언했다.
“내가 하죠.”
다행히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어, 다인아.
“오빠, 청평 도착했는데요. 근데 길에서 강윤성 씨를 만났는데…….”
― 바꿔.
지후는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듯 그녀의 말을 자르며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윤성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윤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전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여보세요?”
― 나 원수 같은 강윤성 친구 임지후인데, 다인이 김영지 교수 제자야. 그리고 곧 내 처제 될 아가씨기도 하고. 순순히 모시고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홀대했다간 두 번 다시 나 못 볼 줄 알아! 끊어!
윤성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 버렸다.
통화가 종료되었음을 알려 주는 메시지만 깜빡거리는 전화기를 노려보던 윤성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콧방귀를 뀌었다.
‘앰뷸런스군.’
며칠 전 선포했던 대로, 지후는 구급차를 보낸 것이다. 물론 차가 아닌 사람이지만.
“일단 타요. 그냥 보냈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으니까…….”
조금은 누그러진 그의 말투를 확인하자마자 그녀는 냉큼 차로 달려가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는 그를 힐끔거리며 그녀는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는 두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긴 싫어서다.
“요즘 대학병원은 환자 인터뷰에 본과생도 보내나?”
그의 삐딱한 말투에 그녀는 또 한 번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신경질을 내리눌러야만 했다.
‘침착하자, 이 사람은 환자야.’
환자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그녀의 신경을 박박 긁어 대는 말만 골라 하는 환자일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생긋 웃는 얼굴과 상냥한 말투로 대답했다.
“저 학생 아니에요.”
“그럼 인턴인가?”
무뚝뚝한 그의 목소리는 들을 때마다 움찔하게 된다. 게다가 비꼬는 듯한 말투는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심리적 충격에 의한 행동 변화.’
전공서의 한 구절을 기억해 낸 다인은 자신의 한심함을 꾸짖으며 침착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공의예요. 레지던트라고 들어 보셨죠? 올해 2년 차고, 스물여덟이에요. 그리고 전 하대해도 된다고 동의한 적 없어요.”
또박또박 말하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무미건조했다. 짜증도, 혐오도, 미안함도 없는 마치 밀랍 인형과도 같은 그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으면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며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
‘심리 질환이 아니라 싸가지 결핍증이잖아.’
속엣말을 중얼거리는 사이 차는 벌써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흠, 무혈입성이로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을 들어 버린 그는 비웃음에 가까운 콧방귀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는 마당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기다리는 일에 재주가 없는 그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손짓을 했다.
“아, 미안요.”
짤막한 사과를 중얼대며 들어서는 그녀의 뒤통수를, 윤성은 한껏 찌푸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가 아는 정신과 의사들은 ‘미안요.’ 따위의 가벼운 언행은 하지 않는 부류다. 물론 그가 아는 정신과 의사는 어머니의 친구인 영지밖에 없지만…….
그녀는 별장 안을 둘러보면서도 여전히 시끄러웠다. 사람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감탄사를 한 번씩 다 내질러 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지켜봤다.
‘맞겠지?’
지후를 통해 확인까지 했으니 맞을 것이다. 그저 조금, 아주 조금 특이한 레지던트일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는 발을 옮겼다. 아무리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짐 가방을 든 채로 거실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예요.”
그의 부름에 그녀가 홱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를 듣긴 들었나 보다. ‘아!’ 그녀의 입에서 짧은 탄사가 튀어나왔다.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었나 보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여전히 느리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눈도 그대로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녀의 행동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그는 열린 방문을 두들겨 그녀의 주의를 일깨웠다.
“알았어요! 거참, 성격 급하시네.”
되레 큰소리를 치며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우와 이거 안방 아녜요? 무슨 손님방이 이렇게 넓어! 대궐이네, 대궐. 나 여기 세 좀 들면 안 될까요?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고, 방까지 넓어. 꿀이다, 꿀…….”
그녀의 입은 잠시도 쉴 생각이 없나 보다. 윤성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어머! 욕실도 있어, 웬일이야! 손님방에 욕실이라니. 여기 혹시 펜션이에요? 아님 펜션이었던 데를 개조한 건가?”
안쪽에서 흘러나온 외침에 윤성은 움찔하며 멈췄다가 다시금 빠르게 발을 놀렸다. 지금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재로 들어선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 잘 모시고 들어갔냐?
전화기 저쪽에서는 여유로운 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성은 다짜고짜 묻기부터 했다.
“말도 없이 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 미리 얘기했잖아. 앰뷸런스 보낸다고.
되레 윽박지르는 시늉을 하는 지후에게 윤성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는 앰뷸런스가 아니잖아.”
바늘구멍만 한 스피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뭐, 그럼 진짜 앰뷸런스에 덩치 이만한 남자 서넛 보내서 끌고 나올 줄 알았어? 그런 걸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네.
친구의 농담도 윤성에겐 심드렁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친구의 너스레를 참아 넘긴 윤성은 궁금했던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저 여자 의사 맞긴 맞아?”
― 어, 유능한, 촉망받는.
지후는 자신 있는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윤성은 콧방귀로 응수했다.
“대체 어딜 봐서…….”
윤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후는 으름장을 놨다.
“너 다인이 우습게 보지 마, 그래 봬도 세종대학병원 상위 1%야.”
병원장 아버지를 둔 배경까지 포함한다면 1% 안에 들지 않을까 싶다. 지후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합리화를 했다. 그렇다고 실력이 영 바닥인 것은 아니다.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제법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니 1%까진 아니더라도 5% 안에는 들 것이다.
전화기 저편의 콧방귀 소리를 무시하며 지후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 성민 형하고 통화했는데 OST 하기로 했다며?”
최대한 가벼운 투를 꾸며 내 물었지만, 저쪽에선 묵묵부답이다. 5초, 10초, 속으로 셈을 하던 지후는 귀에 붙였던 전화기를 떼어 내 상태를 확인했다. 통화가 끊긴 것은 아니다. 다시 전화기를 귀에 대려는 순간, 깊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한숨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지후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대답, 아주 내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이제 그만하면 됐어. 1년이야, 1년. 요즘 강산은 1년 만에도 바뀐다더라?”
― 11개월.
고집스럽게 셈을 바로잡아 주는 친구에게 지후는 입을 삐죽이며 응수했다.
“따지기는……. 그래, 11개월. 1년 넘겨 몇 년씩 거기서 썩을 생각 아니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봐. 주변 사람 전부 이렇게 목을 매고 나오라고 할 때는, 못 이기는 척 나와 주는 게 예의야.”
길고도 진지한 말을 끝낸 지후는 친구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이번에도 10초 이상은 걸릴 줄 알았던 대꾸가, 예상외로 빨리 흘러나왔다.
― 쉬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끊겨 버린 전화를, 지후는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쩝’ 입맛을 다시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런 식으로 전화를 끊은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은 조금 떨떠름하다. 한사코 끌어내려는 주변의 노력이 친구에게는 되레 고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후는 얼른 도리질을 쳤다.
‘참 귀도 얇다.’
친구의 깊은 한숨 소리 몇 번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팔랑 귀도 이런 팔랑 귀가 있을까 싶다.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전화가 울리기 전 집중하고 있던 일로 되돌아갔다. 모처럼 밤샘 촬영이 없는 날, 한 번에 몰아서 모니터하지 않으면 좀체 기회가 없으니 시작한 김에 끝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TV 화면 속 자신의 모습에 흥미가 똑 떨어져 버렸다.
TV를 꺼 버린 그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
*
“아주 온수가 콸콸 나오는 게, 딱 좋네, 딱 좋아. 고정윤 여사 데려오면 함빡 빠지시겠어.”
개운한 기분으로 목욕을 끝낸 다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털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목욕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간단하게 세수 정도만 할 요량으로 욕실에 발을 들였다가 그만 널찍한 욕조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이틀 밤을 의국에서 보낸 후 뜨뜻한 물로 가득 채운 욕조를 상상하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유혹이었다. 그 결과 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여 있던 피로를 싹 풀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머리를 말리는 중이다.
문득 세찬 날숨을 내뱉으며 콧잔등을 찌푸린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나무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곳에 온 목적을 잠시 망각했다.
거울 속, 울상을 한 얼굴을 잠시 마주 보던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반쯤 마른 긴 머리를 대충 걷어 묶은 뒤 욕실 문을 박차고 나온 그녀는 재빠른 동작으로 필요한 장비를 챙겼다. 노트와 펜과 녹음기를 야무지게 챙겨 들고 다짐이라도 하는 듯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어두워진 복도를 지나 거실까지 둘러봤지만, 집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인은 재빠르게 주위를 휘둘러보며 스위치를 찾았다.
“어디 갔나?”
벽에 붙은 스위치를 모조리 다 누른 다인은, 이번에는 하나씩 제자리로 돌려보내며 필요한 조명을 찾는 데 열중했다.
“해가 졌으면 불을 켜야지. 누가 보면 귀신 나오는 집인 줄 알겠네.”
투덜대는 것도 역시 혼잣말이다.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큰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미꾸라지처럼 또 어디 가서 숨으셨나…….”
다인은 입을 삐죽이며 발을 놀리다가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긴 뭐지?”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가 볼까?”
잠시 망설이던 다인은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 보지, 뭐. 귀신이 나오겠어, 도깨비가 나오겠어. 나와 봤자 싸가지 결핍증 걸린 남자밖에 더 나오겠어?”
창가에 선 윤성은 어느새 컴컴해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에선 어둠이 번지는 속도가 유난히 빠르다. 호수를 겹겹이 감싸고 있는 산봉우리들 때문이다. 친구와의 통화가 끝난 건 한참 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부모님과 그의 대치점에 서서 중재하느라 바쁜 태영의 애원을 못 들은 체할 깜냥이 못 된다. 화를 참다못한 성민의 으름장에 이제 더 이상은 ‘될 대로 되라’ 큰소리치지도 못 하겠다. 피를 나눈 형제만큼이나 각별한 지후의 최후통첩은 벌써 순순히 받아들인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에는 없었던 미안한 감정마저 들고 있으니 그들의 설득은 반쯤 성공한 건지도 모른다.
꾹 다물린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강윤성 씨! 어디 계세요?”
윤성은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섰다. 꽤 골치 아프게 생긴 여자 하나가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었다.
‘망할 놈의 앰뷸런스.’
윤성은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문간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 주방에 다다를 때까지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진 윤성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 입구로 들어섰다.
“어! 어디 숨어 있었어요, 한참 찾았네.”
그녀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윤성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숨어 있어?’
어이가 없다.
‘내 집에서 내가 왜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곧장 뒤따른 의문이다. 하지만 반박은 속으로만 해야 했다.
“골탕 먹일 궁리 그만하고 얼른 인터뷰 시작하죠. 저도 사무가 바쁜 몸이고, 그쪽도 불청객이 눌러앉아 있는 거 싫어하는 눈치니까.”
속사포처럼 빠른 속도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말은 마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녹음기 소리 같았다. 그는 어금니를 꽉 다문 채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식탁으로 가 자리를 잡은 그녀는 손바닥으로 식탁을 탁탁 두들기며 되레 그를 불렀다.
“뭐 해요. 여기 앉아요. 버스도 10시까지밖에 없다면서요. 나 빨리 내쫓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상대방의 심기가 어떻든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제 할 말만 쏟아 냈다.
그의 입에선 세찬 날숨이 뿜어져 나왔다. 어이가 없어 터뜨리는 실소다. 일면식도 없었던 그녀는 그에게 완벽하게 낯선 사람이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성질대로라면 싸우자고 덤벼도 시원찮을 판국이다. 하지만 그녀와 그 사이엔 너무 많은 사람이 있다. 그에게 각별한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성질을 꾹꾹 눌렀다.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지나가는 그의 뒤통수를 그녀는 밉살스럽게 흘겨봤다.
‘세상 근심 자기 혼자 다 짊어지고 있나.’
속으로 비아냥대며 입을 삐죽이던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 까먹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조리대 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저 남자는 갖은 종류의 심적 장애를 겪고 있는 환자다. 다인의 눈꼬리가 눈에 띄게 늘어졌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2년 차씩이나 된 전공의가 환자에게 비아냥대기나 했다는 사실이 꼭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다시 식탁으로 다가온 그는 양손 가득 들고 온 밀폐 용기들을 툭툭, 성의 없게 내려놓았다. 생뚱맞은 물건의 등장에 다인은 눈을 치켜뜨고 그를 쳐다봤다.
“저녁 먹고 합시다. 의사도 밥은 먹을 거 아닙니까.”
그가 돌아서며 내놓은 제안에 다인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려 동의를 표했다. 네 시간 전 구내식당에서 먹었던 돼지고기볶음은 벌써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다인은 분주히 손을 놀려 밀폐 용기의 뚜껑을 벗겨 냈다.
식탁엔 분명 두 사람이 앉아 있지만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반가운 밥과의 조우에 다인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쌀을 주셔서 감사하고, 고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그녀의 독창적인 감사 기도는 속으로만 읊조려야 하는 기도다. 입은 밥과 반찬을 씹어 대느라 바쁘니 기도를 올리는 수고로움까지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맞은편에 앉은 윤성의 시선은 다인의 젓가락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무심한 체하려 해도 사방팔방 바쁘게 돌아다니는 젓가락이 신경 쓰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원래 레지던트들은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가.’
허겁지겁 밥을 먹는 모습이 측은지심마저 들게 했다. 날카롭던 눈빛도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부지런히 밥숟가락을 놀리던 그녀가 내뱉는 탄식에 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으아!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이거 누가 만든 거예요? 이 사람 미쳤나 봐, 무슨 음식을 이렇게 잘해! 구내식당으로 스카우트해야겠어.”
부른 배를 두들기며 거실로 나온 다인은 단정한 자세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제 의사의 역할을 해야 하니 옷매무새도 다듬어 본다. 식탁에선 아무래도 체통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 찜찜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슬슬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눈을 또록또록하게 떴다. 때마침 그가 나타나자 다인은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요. 쌀, 보리, 콩 좀 데려다 놔야 하니까.”
무뚝뚝한 말소리와 휙 지나쳐 가는 행동 덕분에 미소가 무색해졌다.
‘귀농한 것도 아니면서 웬 쌀, 보리, 콩.’
이번에도 속엣말에 그친 비아냥이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비아냥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야말로 불청객을 바라보는, 귀찮아 죽겠다는 듯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치기엔 아직 그녀의 내공이 부족한 탓이다. 늘어진 입꼬리와 비슷하게 눈꼬리도 늘어진다.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가만. 쌀, 보리, 콩을 데려다 놔?’
생명체가 아닌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라도 가진 건가 싶었다.
‘생각보다 심각한 거 아냐?’
다인은 챙겨 온 노트를 뒤적거려 원하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지난 1년간 그가 여러 의사로부터 받았던 진단명이 적힌 페이지이다.
/굵기/선택적 함구증, 우울 장애, 사회 공포증, 간헐적 폭발성 장애…….
치료가 필요한 병증과 이미 치료가 끝난 병증을 하나하나 짚어 가던 손가락이 방금 지나친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간헐적 폭발성 장애?’
자칫하면 범죄로 이어지기도 하는 심각한 병증이다. 이미 치료가 끝났다고 적혀 있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충동 조절 장애는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재발하기도 한다.
“이렇게나 심각했었나?”
다인의 얼굴이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 야기된 병증이 너무 많다. 직접적인 연관성은 희박해 보이는 사회 공포증까지 포함된 것을 보니 상처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던 사람인가 보다.
‘연예인이라 그런가.’
그네들끼리의 시쳇말로 우울증은 ‘연예인 직업병’이라고 일컫는다는 말을, 언젠가 지후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다인은 문득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예인이라서 정신적 상처에 대한 자연 치유력이 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보통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함묵증이라는 병명 뒤에 숨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어두운 구석으로만 숨어들던 어떤 소녀처럼, 보통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사람 또 왜 안 들어와.”
얌전히 앉아 기다린 지가 벌써 10분도 더 지난 것 같다. 곡식을 옮겨 놓으러 간 것치고는 너무 오래 시간을 끌고 있다. 다인은 발딱 일어서서 창문 너머를 내다봤다. 컴컴한 정원은 고요하기만 하다. 인기척은커녕 바람 한 점도 불지 않았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든 다인은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이 씨, 암튼 기다리게 하는 데는 일가견 있어. 이 싸가지 결핍증!”
괜히 쿵쿵거리며 소파로 돌아와 달랑 올라앉았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구.”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사전 면담 기록을 쟁취해야만 했다. 다인은 팔짱을 끼고 눈에 힘을 주며 의지를 다졌다.
*
현관 바닥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윤성은 움찔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던 여자의 목소리가 사라진 별장은 적막하기만 하다. 원래의 고요함과 평화를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비록 잠깐일지라도 이런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에 윤성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실은 비어 있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주방에도 여자는 없었다.
‘어디 갔지?’
혼잣말로 묻던 그는 이내 답을 찾아냈다.
‘방에 있겠지.’
그가 직접 안내해 주고, 그녀가 대단히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던 바로 그 방에 있을 것이다. 부끄럼도 없이 아니, 되레 당당하게 ‘나 여기 세 좀 들면 안 될까요?’ 하고 외치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주방을 나선 그는 긴 소파 끝에 삐져나온 개구리를 발견하고는 ‘헛!’ 숨을 삼키며 멈춰 서야만 했다. 걸음을 서둘러 소파 앞으로 다가간 그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가 궁금해하던 여자는 푹신한 쿠션들에 푹 파묻혀 숙면 중이시다.
“이런 양말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야.”
조금 전 그를 놀라게 했던 양말에 대고 괜한 화풀이를 해 본다. 고작 개구리 그림이 그려진 양말 때문에 심장이 벌렁댈 만큼 놀란 자신이 한심스러워 한숨도 절로 나왔다.
한숨의 끝은 실소다. 잔뜩 찌푸려진 얼굴은 그대로 둔 채 입으로만 날숨을 뱉어 내는, 그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웃음이다. 그녀를 깨워 방으로 보낼지, 그냥 둬도 될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한숨 소리를 한차례 더 내고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그는 널브러진 그녀의 몸에 조심스레 담요를 덮었다. 최대한 조용한 움직임으로 담요 덮기를 끝낸 그는 문득 콧방귀를 뀌었다.
‘깨거나 말거나.’
고달픈 레지던트에게 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그가 알 바 아니다. 입을 삐죽거리며 밉살스럽게 눈이나 흘겨 대는 레지던트의 고단함 따위는 더더욱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담요를 조금 더 끌어 올려 쿠션 사이로 빠끔 드러난 얼굴까지 덮어 버리고 나서야 발을 옮겼다. 이제 좀 만족스럽다.
*
부산스러운 인기척에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 뭐야. 꼭두새벽부터.’
투덜대며 몸을 돌리는데 뭔가 낯설다. 의국 침대가 이렇게 푹신할 리는 없었다. 그녀의 방이라고 착각하기엔 배경이 너무 다르다. 꿈지럭꿈지럭 몸을 일으킨 다인은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입가를 닦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그때, 무표정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녀 쪽으로는 눈길도 한 번 주지 않고 곧장 현관으로 향하는 남자의 손엔 시리얼 그릇이 들려 있었다. 다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깨달음과 동시에 아침밥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내 건 여기 주고 가요. 뭘 밖에까지.”
현관에 다다라 신발을 신던 윤성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 소리야?’
금방 자다 깬 얼굴로 뭘 내놓으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꼬대라도 하는 건가 싶어 다시 물으려는데 현관 밖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을성 없는 녀석들이 벌써 현관 앞까지 들이닥친 모양이다. 윤성은 곧장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묻는 듯한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그가 휙 돌아서 나가 버리자 그녀는 세찬 콧김을 내뿜었다.
“내가 투명인간이야? 어쩜 저렇게 못됐어!”
닫힌 현관문을 향해 외치던 다인은 혀를 차며 소파에서 내려섰다. 아무래도 세수를 하고 마당까지 나가야 아침을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보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발을 옮기던 그녀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모든 행동을 멈추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들고 있던 그릇은 세 개였다. 분명 양손에 하나씩, 그리고 양손 사이에 하나를 끼고 등으로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누가 왔나?’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직접 나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인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가 나오자마자 개들은 겅중겅중 뛰어오르며 법석을 떨었다.
“이리 와. 문간에 앉아서 밥 먹을래?”
골든 레트리버가 긴 털을 휘날리며 가장 먼저 달려왔다. 뒤를 따르는 녀석은 삽살개다. 두 마리는 주인이 늘 밥그릇을 내려놓는 자리에 먼저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밥그릇을 놔준 윤성은 마지막 한 놈을 찾았다. 검은 녀석은 아직 현관문에 코를 박고 킁킁대고 있었다.
“콩!”
윤성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킁킁대던 녀석은 문 아래의 틈으로 주둥이를 밀어 넣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콩, 이리 와.”
경찰견으로 사육되기도 하는 도베르만답게, 집 안을 휘젓고 다닌 낯선 사람의 낌새를 알아챈 모양이다.
“콩, 지금 안 오면 밥 없다.”
윤성은 마지막 제안을 했다. 콩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제안이다. 하지만 콩은 현관 앞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속성으로 세수를 끝내고 옷까지 갈아입은 다인은 후다닥 현관으로 뛰어갔다. 아직 6시밖에 되지 않은 이른 아침인데도 기분은 날아갈 것 같다. 아침밥까지 꼬박꼬박 챙겨 주는 집주인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문객에 대한 궁금증, 아니, 기대감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외박을 했으니 다정한 형부인 지후가 ‘짠’ 하고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닦달이든, 어른들의 심부름이든, 이유야 뭐든 간에 말이다.
신발을 꿰어 신은 그녀는 호기롭게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어?”
하지만 문은 열리다가 도로 닫혀 버린다. 다인은 다시 힘껏 문을 밀었다. 주먹 하나가 겨우 지나갈 만큼 벌어진 틈 사이로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상쾌한 숲 냄새와 물 냄새가 섞인 향긋한 내음이다. 평소라면 기분 좋게 심호흡을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사정이 못 된다. 뭔가가 문을 가로막고 있는 게 분명하다.
“왜 안 열려. 이봐요, 장난치지 말고 열어 줘요!”
문 앞에 있을 것 같은 그에게 다인은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께름칙한 소리에 몸서리를 치는 그녀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뭐야, 변태 같은 소리 내지 마요! 소름 돋잖아.”
다인은 있는 힘껏 문을 밀고는 더 넓어진 문틈으로 운동화 신은 발을 턱, 내밀었다. 그 순간 무겁던 문이 홱 젖혀지고 그녀는…….
“아악! 뭐야, 뭐야, 뭐야! 너 뭐야!”
문 앞에 버티고 있던 콩은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신발 냄새를 맡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문이 열리고 신발의 주인이 등장함과 동시에 콩은 반갑게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발의 주인은 괴성을 지르며 도망가기 바쁘다. 콩은 신나게 따라 뛰었다.
“아으― 저리 가, 오지 마. 나한테 오지 마, 저리 가!”
넓은 마당을 내달리던 다인은 때마침 시야에 들어온 벤치로 뛰어오르며 통사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고 덩치 큰 개는 그녀의 운동화에 침을 흘렸다.
다인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허리에 다다를 만큼 키가 큰 개가 덤비는 것만으로도 혼이 쏙 빠질 지경인데, 며칠 전 새로 산 운동화를 침 범벅으로 만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아오, 미쳐 버리겠네, 정말. 좀 떨어지라구! 저리 가! 안 들리니? 저, 리, 가!”
부탁 조에 이어 한 음절씩 끊어 강조하는 그녀의 말소리에 개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다 이내 운동화에 코를 박고는 킁킁대기 시작했다. 으르렁대기도 하고 킁킁대기도 하며 운동화를 향한 애정을 맘껏 발산하고 있는 개에게 다인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그렇게 갖고 싶니?”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개는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 소리를 냈다. 다인은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운동화가 반쯤 걸쳐진 발을 흔들어 댔다. 흠뻑 젖어 버린 신발에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발을 털어서라도 운동화를 벗어 주려는 심산이다.
이내 벗겨진 신발이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개는 미련 없이 그녀를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 씨, 진짜…….”
진귀한 뼈다귀라도 되는 것처럼 앞발로 운동화를 꼭 붙잡고 핥아 대는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힐끔, 그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모든 광경을 다 지켜본 듯한 시선이, 아니, 시선들이 있었다. 크고 작은 누런 개 두 마리가 주인과 함께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앞에는 아까 윤성이 들고 나갔던 시리얼 그릇도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침밥일 줄 알고 설렜던 시리얼이 개밥일 줄이야! 그녀는 괜히 창피해 으름장을 놓는 시늉을 했다.
“웃지 마요!”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뭐야’를 연발할 때부터 지켜보고 있던 윤성은 느닷없는 불똥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웃지 말라니? 내가 언제 웃었나?’
그는 웃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쪽 입꼬리만 삐딱하게 추켜올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거울 앞에 서서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으려 할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는 뺨만 허무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콩의 선전에 덩달아 신이 난 두 녀석이 웃었다면 모를까, 그에게는 당치 않은 소리다. 괜히 그에게 화풀이한 모양이라고 혼자 단정 지으며 윤성은 다른 얘기를 꺼냈다.
“다른 신발 있어요?”
“나 어젯밤에 서울 가려고 했었거든요.”
윤성의 눈썹이 또 꿈틀댔다. 그녀의 동문서답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게 하룻밤 재워 주고 먹여 준 그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언짢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의 얼굴을 쳐다본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꼴랑 서울에서 청평까지 반나절 있겠다고 오면서 신발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연히 없지.”
윤성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늘어졌다. 괜한 생각으로 오해를 부풀릴 뻔했다. 촌구석에 처박힌 지 겨우 11개월 됐을 뿐인데, 나쁜 습관이 너무 많이 생겨 버렸다. 이런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제 그만둬야 하나 싶다.
“신발, 찾아볼게요.”
벤치에서 현관까지 깨금발로 뛰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녀는 반짝, 고개를 들고 돌아봤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녀를 지나쳐 현관으로 간 그는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즈 있어요? 나 235 신는데.”
“여기가 신발 가게예요?”
어이없는 질문에 일일이 응수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다.
‘저 여잔 대체 머리 놔두고 어디로 생각을 하는 거야.’
얼굴 가운데에 박힌 작은 코안에 뇌가 들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만들다 만 것 같은 작은 코를 지나쳐 올라가자 이쪽을 흘깃거리고 있는 눈동자가 보인다. 몹시 얄밉다는 듯, 입술까지 실룩이며 흘겨보고 있다. 그녀의 눈총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다가간 윤성은 손에 든 슬리퍼를 내밀었다.
“이거밖에 없어요?”
“신발 가게 아니라고요. 신어 봐요.”
윤성은 볼멘소리를 하는 그녀의 발목을 잡고 슬리퍼를 걸쳐 주었다. 다인은 언제 입이 튀어나왔었냐는 듯, 그새 킬킬거리며 발을 흔들어 댔다.
“헐렁헐렁―한데요.”
아이 같은 장난질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윤성은 참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더는 짜증을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우선 신고 내려와요. 창고에 어머니 신던 거 있을지도 모르니까 찾아볼게요.”
나머지 한 짝을 갈아 신고 벤치에서 풀쩍 뛰어내린 그녀는 즐거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내가 커피 만들어 줄게요. 신발 빌려주는 대신.”
*
리모컨으로 작동되는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개들은 밥을 먹다 말고 합창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오래된 장화를 찾아 나오던 윤성은 마당 한쪽 편으로 가 자리를 잡은 차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세 마리의 개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달려갔다.
“쌀, 보리, 콩! 너희가 쟤보다 낫다, 야.”
환대해 주는 개들의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 주며 태영은 가시 박힌 말을 툭 던졌다. 그의 의도대로 창고 앞에 서 있는 동생의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출장 준비 안 해?”
“아예 싣고 왔지.”
태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하며 동생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와서 보니 얼굴이 좀 꺼칠한 것도 같다.
“밥은 먹었어?”
“아니.”
“칼 같은 녀석이 어쩐 일로 밥을 굶고 있냐.”
단박에 튀어나온 윤성의 대답에 태영은 눈을 치켜떴다. 이곳으로 온 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동생은 칼같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먹을 게 없어. 어제 다 먹어서.”
심드렁한 대꾸에 태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흘에 한 번씩 오는 왕 비서가 윤성의 양에 딱 맞게 냉장고를 채워 둔다. 지금껏 쭉 그래 왔다. 남아서 버린다고 비서가 투덜댄 적은 있어도, 모자란다고 동생이 투덜댄 적은 없었다.
고정된 형의 시선에 괜스레 불편해진 윤성은 고개를 돌렸다.
“오늘 선재 오는 날이야.”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중얼대는 동생에게 태영은 새로운 정보를 줬다.
“알아. 내일도 올 거야.”
“왜?”
윤성의 얼굴이 홱 돌아오자 태영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 공항 가고 나면 차 가져가야지.”
벤치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형을 따라가며 윤성은 의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형은 차 안 타고 걸어가게?”
“아니, 너 있잖아.”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며 태영은 웃음과 대답 소리를 동시에 냈다. 동생을 기사로 부려 먹으려는 심산은 아니다. 가끔 한 번씩이라도 바깥으로 끌어내기 위해 억지 핑계를 만들어 붙일 때마다 윤성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윤성은 대꾸를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소리는 엉뚱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커피 머신 완전 좋아. 우리 집 건 오래돼서 맹맹한 커피만 나오는데…….”
두 남자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팔꿈치로 현관문을 밀고 나오는 사람은 다인이다. 양손엔 머그잔을 들고,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새색시 걸음을 걷고 있다. 헐렁한 슬리퍼 덕분에 걸음걸이가 더욱 조심스럽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입은 계속 말을 쏟아 내고 있다.
“고 여사를 꼬여서 빨리 바꿔야지, 원. 먹고 싶은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무슨 낙으로 사냐고요.”
“누구야?”
“어, 누구세요?”
놀란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묻는 소리는 태영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반가움이 더 많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다인의 것이었다.
“앰…….”
형에게 대답해 주려 입을 여는 순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야! 얼마나 흘린 거야, 아까워라.”
걸어오는 동안 출렁이다 쏟아질 정도면 커피를 얼마나 꽉꽉 채워 온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자다. 윤성은 성큼성큼 다가가 다인의 손등을 살폈다.
“델 만큼 뜨겁진 않았어요. 신발 찾았어요? 신발부터 갈아 신어야겠어. 이거 지 혼자 막 빙빙 돌아요.”
신발을 묻는 다인에게 윤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지만 대답할 기회는 얻지 못했다. 다인이 보라는 듯이 한 발을 들어 까닥까닥 흔들다가 킬킬대더니 곧장 다른 얘기를 지껄여 댔기 때문이다.
“아 참, 이거 받아 봐요. 손 좀 씻고 커피 한 잔 더 만들어 올게요.”
윤성은 얼결에 머그잔을 넘겨받았다. 까치발을 들고 윤성의 어깨너머를 보려던 다인은 이내 체념하고 휙, 몸을 기울여 태영을 쳐다본다. 이유를 퍼뜩 눈치채지 못해 가만 보고 있던 윤성은 다인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돌아오자 그제야 ‘아’ 낮게 탄식했다.
“우리 형이에요.”
즉각 대답해 주는 윤성에게 생긋 웃어 보인 다인은 아까처럼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금방 나올게요.”
다인의 머리가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움찔움찔, 긴장하고 있던 태영도 까닥, 묵례로 답했다. 태영의 고갯짓을 확인하자마자 다인은 종종거리며 현관으로 연결된 계단을 뛰어올랐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동생에게서 머그잔 하나를 받아 가며 태영은 속삭이듯 물었다.
“여자 친구야?”
윤성의 눈썹이 홱, 치켜지자 태영은 ‘어이쿠!’ 장난스러운 투로 엄살을 떨며 뒤로 물러나는 시늉을 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도끼눈까지.”
“앰뷸런스야. 지후가 보낸다고 했던.”
동생의 대답이 흘러나왔지만, 태영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다. 구급차를 물은 게 아니라, 동생 혼자 있는 별장에서 밤을 보내고 모닝커피를 만들어 나온 ‘여자’가 누군지 물은 거였다. 엉뚱한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는 어쭙잖은 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실소와 커피 한 모금을 동시에 머금고 먼 산을 바라보던 태영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지후의 최후통첩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앰뷸런스’라는 것이 차가 아닌 사람이었다는 것은 지금 막 깨달았다.
“앰뷸런스?”
“사전 면담이라나 뭐라나.”
“아!”
태영의 입에서 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동생의 절친한 친구인 지후를 아들로 둔 김영지 박사의 작품인가 보다. 지후의 엄마인 영지와 그들 형제의 엄마 윤희는 아들들이 친구를 맺기 이전에 주치의와 환자로 먼저 인연을 맺기도 했다.
“그럼 지후가 보낸 게 아니라 이모가 보내신 거네?”
“뭐, 그럴지도.”
순순히 대꾸하는 동생의 시선은 호수에만 꽂혀 있다. 한 번쯤 이쪽을 쳐다봐 줘도 좋으련만. 시선을 마주치고 있을 땐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껴지는데 말이다.
저는 모르겠지만 공허하던 눈동자에 웃음기가 출렁이는 순간을 종종 포착하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얼굴을 돌리고 있으면 조바심이 났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슬퍼하는지, 즐거워하는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아무런 힌트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태영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홀짝였다.
몇 개월 전이었다면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프로이트 박사가 왔다고 해도 결코 이 별장 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굳게 닫혀 있던 빗장이 조금 느슨해진 것일까. 지후의 야심 찬 시도가 반쯤 먹혀든 것 같으니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봐도 되는 건가. 이 생각, 저 생각, 두서없이 떠올려 보던 태영은 혼자 해결하기를 체념하고 동생에게 물었다.
“마음은 정했어?”
윤성의 시선이 돌아와 조용히 꽂혔다. 무슨 의도로 묻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다. 형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다. 무심한 듯, 대답하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한 눈빛이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아니, 어떤 대답을 해야 결정하기가 수월해질까.
한동안 형을 바라보던 윤성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모두 미리 내려놓은 결론에 걸맞은 행동을 그가 취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으면서 말로는 그에게 결정하라고들 한다. 이쯤 되니 결정권이 그에게 있기나 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건 결론은 똑같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벌써 수백 번째다.
“그런 건 오래 끌수록 더 복잡해지는 거야. 그냥 눈 딱 감고 내일 나랑 같이 나가자. 이모가 사람까지 보낸 마당인데, 더 버티면 조만간 이모가 직접 오실지도 몰라.”
기다리다 지친 형이 쏟아 내는 말들이, 불현듯 들었던 의심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마치 성을 함락시키는 것처럼, 1차 시도에 실패하면 2차 시도, 그리고 또 실패하면 3차 시도. 아마 성공할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그 시도들에 벌써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삶의 이유라고 자부하기도 했던 음악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느라 바쁘던 부모님의 그늘이, 가볍게 소주잔을 기울이며 철없이 떠들던 친구가 갑작스레 그리워졌다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다.
“왜 이렇게 심각해요? 두 분 싸웠어요?”
다인이 다가오며 묻는 소리에 태영이 벌떡 일어섰다.
“싸우긴요. 아까 못 한 인사 지금 하죠. 윤성이 형이에요. 강태영.”
“아, 전 서다인이에요. 세종대학병원 정신과 전공의고요. 여긴, 어, 쪽지시험 면제해 주신다고 해서 크은 맘 먹고 왔어요.”
태영이 내민 손을 맞잡고 흔들며 다인은 이곳에 오게 된 경위까지 솔직하게 덧붙였다.
“여기가 크은 맘 먹고 올 만큼 멀지는 않은데…….”
태영이 자신의 표정을 흉내 내며 맞받아치자 다인은 몸을 숙이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멀다기보단, 좀 무서웠거든요.”
윤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혀 속삭이는 것 같지 않은 목소리라 고스란히 다 들렸기 때문이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다인은 윤성이 노려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저 봐요, 저런 눈빛. 무섭잖아요.”
태영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가끔 저도 움찔할 때 있어요. 형인데도요.”
윤성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자 다인과 태영은 동시에 몸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날씨 좋다!”
“오랜만에 낚시나 할까.”
다인은 태영을 향해 돌아서며 손뼉을 쳤다.
“낚시 좋아요!”
“오, 그럼 낚시 갈까요? 시간도 많은데.”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이렇게나 반가워하다니, 태영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어차피 임무 완수할 때까지 서울도 못 가는데, 그럴까요?”
다인이 구사하는 특유의 멜로디는 꼭 노래처럼 들렸다. 태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낚시 잘해요?”
“전 잘할 필요 없죠. 어차피 구경만 할 건데.”
커피만 홀짝이고 있던 윤성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낚싯대 챙기러 가?”
“챙겨 줄 테니까 둘이 갔다 와요.”
형의 부름에 돌아선 윤성이 대답을 끝내자마자 다인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전문가가 빠지면 어떡해요.”
두 남자의 시선이 집중되자 다인은 싱긋 웃으며 어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이 집 주인 낚시광이라고.”
“헛소문이에요.”
코웃음을 치며 대꾸한 윤성은 창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쿵짝이 잘 맞는 둘을 내보내 놓고 나면 한결 편해질 것 같다. 며칠째 이어진 고민의 답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도 그에겐 허용되지 않을 모양이다. 탁탁탁,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다.
“나 장화 줘요. 낚시 갈 줄 어떻게 알고 딱 장화를 찾아 놨대. 생각보다 센스 있으시네.”
대답 없이 걷기만 하던 윤성은 창고 입구에 놔두고 까먹고 있었던 장화를 주워 건넸다. 다인은 냉큼 받아 하나씩 발을 끼웠다. 균형 잡기가 힘들어 이리 콩, 저리 콩 뛰어 대는 다인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윤성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도움의 손길에 홱, 고개를 치켜든 다인은 ‘히히’ 소리까지 내며 벌쭉 웃었다.
“오, 매너 손! 이럴 땐 또 착해 보인다니까. 아저씨 은근 매력 있는 거 알아요? 아까 시리얼, 아니 개밥 들고 나갈 땐 찬바람이 쌩쌩 불더니 금방 신발 찾아 주고, 또 막 퉁명스럽게 굴다가 이렇게 필요할 때 딱 잡아 주고.”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다인을 내버려 둔 채 윤성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면 창고 앞에서 종일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가만있어 봐, 완전 나쁜 남자 표본이잖아! 아저씨 B형이죠, 맞죠?”
다인은 창고 안으로 쪼르르 달려 들어가며 물었다.
멀리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영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지칠 줄 모르고 떠드는 여자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한편으로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치료를 시도하는 것은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 1년간 동생은, 아니, 동생의 31년 인생을 통틀어 저런 여자를 만난 적은 처음일 것이다. 동생과 익숙한 침묵 속에서 마음이나 달래 볼까 하고 찾아온 길인데, 의외의 만남 덕분에 흥미진진한 하루가 될 것 같다.
*
10월의 아침 공기는 제법 쌀쌀했기에 그녀는 어제 입고 왔던 청바지와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다시 찾아 입고 방을 나섰다. 두 남자는 벌써 준비를 모두 마친 뒤였다.
문소리를 듣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윤성은 거실로 나오는 그녀의 옷차림을 한 번 훑어보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옷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어제 왔다가 어제 가려고 했었거든요.”
그녀가 새침한 투로 대꾸하지만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없이 그녀를 지나쳐 방으로 가는 윤성을 쳐다보던 태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생의 행동을 대신 설명했다.
“옷 찾으러 갔을 거예요. 그러고 물가에 갔다간 감기 걸리기에 십상이에요.”
다인은 눈을 굴리며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느슨하게 올려 묶은 머리를 긁적였다.
“입어요.”
금세 돌아온 윤성이 짙은 파란색이 도는 점퍼와 비슷한 색의 모자를 불쑥 내밀자 그녀는 엉겁결에 받아 들고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싫어요, 보나 마나 클 거란 말예요. 어바리 같을 거야.”
그녀는 옷을 펴 크기를 가늠해 보며 대꾸했다. 덮어 놓고 억지를 부렸다면 무시했을 테지만, 어바리 같을 거라는 말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윤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어릴 때 입던 옷이니까 맞을 거예요.”
말을 마친 그는 소파 근처에 챙겨 뒀던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태영도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겨 동생을 따라나섰다.
“입고 나와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빨리 안 나오면 두고 가요.”
태영의 친절한 목소리에 이어 윤성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다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남자가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고 있던 그녀는 얼른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 두고 그가 준 점퍼에 팔을 꿰며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친절한 형과 달리, 냉정한 동생은 어쩐지 두고 가겠다는 말을 행동에 옮길 것 같으니 그녀가 서두르는 수밖에.
마당으로 나온 그녀의 귀에 처음 들려온 소리는 태영의 목소리였다.
“아까 그 점퍼 너 고등학생 때 입던 거 아냐?”
“맞아.”
곧장 흘러나온 대답에 태영은 놀라 되물었다.
“그걸 여태 가지고 있었어?”
“나도 몰랐어. 찾다 보니 나오더라고.”
윤성은 사실 그대로를 전했다. 잡동사니를 쌓아 둔 방에 오래전 처분한 줄 알았던 옷상자가 있는 줄은 여태 몰랐다. 상자 속에서 푸른색 점퍼를 발견했을 때는 그도 적잖이 놀랐었다.
분주히 짐을 싣고 있는 동생을 내버려 둔 채 태영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옛 기억을 더듬었다.
“너 깡말랐을 때 생각난다. 비리비리해서, 낚시 가자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다 대면서 도망이나 다니고.”
“딱 말 안 듣는 동생 표본이네요.”
아직 안 나온 줄 알았던 다인이 불쑥 끼어들자 윤성은 눈을 흘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구처럼.”
“누구요?”
다인의 반문이 곧장 이어지자 태영은 웃음을 터뜨렸다. 말 안 듣는 막냇동생 포스를 풍기고 있는 사람은, 지금 이곳에선 저 여자밖에 없다. 애꿎은 태영에게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모습도 딱 작은오빠에게 놀림받고 큰오빠에게 일러바치는 말괄량이 여동생 같다.
“얼른 안 타면…….”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 문을 열던 윤성은 대답은 하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골이 난 다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쿵쿵, 거칠게 발을 놀렸다.
“두고 간다고요? 쳇!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밉상이야. 교수님 말씀만 아니었으면 진짜……. 아오!”
목적지에 다다라 멈춘 차에서 먼저 내린 윤성은 뜻밖에도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의외의 친절에 그녀도 인사를 챙겼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다인은 체념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차에서 내렸다.
윤성은 벌써 트렁크에서 짐 가방을 내려 비탈을 내려가고 있었다. 제법 쌀쌀한 강바람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웅크리고 서 있던 그녀는 앞서 내려가는 윤성과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은 태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였다. 별장을 출발할 때부터 시작된 통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다인은 윤성이 내려간 흔적을 따라 발을 옮겼다.
단숨에 데크에 도착한 윤성은 짐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신음 때문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뻔히 보이는 길도 제대로 못 찾고 있는 여자를 한심한 듯 쳐다보다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일에 호들갑스러운 것은 타고난 성격인가 보다. 짧은 비탈을 내려오는 동안에도 두 손을 펭귄처럼 파닥이며 연신 ‘에구구’ 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푹 덮어쓴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강바람에 몸을 내맡긴 채 얼굴에 들러붙기 시작하자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쑤셔 넣고 다시 날갯짓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성의 입에서는 ‘피식’ 바람 한 자락이 새어 나왔다. 실소다. 하지만 실소가 미소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직 반도 못 내려온 그녀에겐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자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눈이 잠시 그를 마주 봤다. 파닥거리기를 멈추고 망설이고 있던 그녀의 손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아주 살짝만 닿았을 뿐인 손끝에서 번지기 시작한 떨림이 그를 당황케 했다. 알 수 없는 그 전율 때문에 머리털까지 쭈뼛해졌다.
“고마워요.”
그녀가 또 인사를 챙겼다. 사소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익숙한가 보다. 윤성은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습관처럼 인사를 읊조리던 발간 입술에서 코를 지나 눈과 눈썹, 그리고 모자에 거의 다 가려진 이마까지 아주 느린 속도로 눈동자를 움직이던 그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의아한 시선을 깨닫고서야 얼른 고개를 돌리고 비탈 아래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윤성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난 뒤에야 나타난 태영은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읊조렸다.
“미안해.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그럴 거면 그냥 출근하지 뭐 하러 쉬어.”
낮은 소리로 푸념하는 동생에게 태영은 하소연으로 대응했다.
“툴툴거리지 마. 혼자 몇 사람 일을 다 하려니까 이런 거잖아.”
“생색은.”
윤성은 입술을 실룩이며 대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워낙 일에 빠져 사는 형이긴 하지만 요즘 들어 특히 바빠진 사정을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저 하고 싶은 것만 실컷 하다가 진절머리를 치며 도망쳐 버린 동생과 슬슬 일에 흥미를 잃어 가는 아버지 사이에서 애면글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의 형이다. 그 형은 지금 저 앞에서 만면에 친절한 미소를 띠고 더없이 다감한 목소리로 여자를 챙기고 있다.
“다인 씨 안 추워요?”
“괜찮아요.”
“낚시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주섬주섬 낚싯대를 챙긴 태영은 윤성과 다인이 비워 둔 가운데 자리로 가 앉았다.
“몇 번 따라다녀 보긴 했어요. 만날 풀 뜯고 놀기만 해서 그렇지.”
“배워 볼래요? 보기엔 지루해 보여도 해 보면 재미있어요.”
능숙한 손놀림으로 낚싯줄을 손질하는 태영의 모습을 다인은 신기한 듯 쳐다봤다.
“뭐 배우는 데는 젬병이에요.”
다인이 도리질을 치자 태영은 피식 웃으며 중얼댔다.
“그냥 있기 심심할 텐데.”
“혼자 멍청히 있는 거 잘해요, 저.”
다인은 자신 있는 투로 ‘장기’를 자랑했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병동을 쫓아다녀야 하는 수련의 2년 차에게, 혼자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기는 시간은 사치와도 같은 것이다. 어쩌다 이곳까지 와서 하룻밤을 보내고, 얼떨결에 이른 아침의 호수 낚시까지 따라나서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황당한 사건이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교수가 맡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이 평화로운 호숫가에서의 시간이 조금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똑같은 크기로 마음을 채우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인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런 곳이라면, 이런 평화로운 아침이 늘 찾아오는 곳이라면, 어쩌면 복잡한 서울의 생활 따위는 잊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소리 없는 미소를 짓던 다인은 주머니 속에서 몸을 떠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어디야?]
이른 아침부터 그녀의 소재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사촌 언니인 민영이다.
[밥은 먹었어?]
대꾸할 말을 생각하기도 전에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인터뷰는 했어? 언제 나오는 건데?]
‘아직 안 먹었어.’ 겨우 완성한 문장 뒤에 ‘인터뷰도 아직.’ 짧게 덧붙인 다인은 또 다른 메시지가 오기 전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고모랑 고모부도 안 하는 걱정을 왜 내가 하는 거야, 대체. 암튼 해결하고 얼른 와. 나 머리 풀어헤치고 있어 지금.]
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자동 재생되는 장문의 메시지다. 다인의 입에선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머리 풀어헤치고 있어.’는 언니의 스트레스가 한계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인이다. 다인은 언니를 안심시켜 줄 만한 말을 찾기 위해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
“안녕하세요.”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던 민영은 갑작스러운 인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의국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최근 들어 가장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난 혜선이다. 고작 하루 쉬었을 뿐인데 컨디션은 완벽하게 회복한 모양이다.
민영은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어, 잘 쉬었어?”
“그냥 잘 자기만 한 거 같아요.”
환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혜선이 대꾸하자 민영은 허탈하게 웃었다.
“오프가 그렇지 뭐. 딱히 한 것도 없이 시간은 다 지나가 버리고.”
민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리문이 벌컥 열렸다. 호기롭게 문을 밀어뜨리는 주인공에게 두 여자의 시선이 모였다.
“안녕하세요.”
문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시준이었다.
“무슨 일이야?”
민영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어제도 의국으로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갔던 후배여서만은 아니다. 혜선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시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선배들의 냉대에도 시준은 꿋꿋하다.
“다인이는요?”
혜선의 시선이 민영에게로 향했다. 굳이 해석하자면 ‘쟤가 왜 다인이를 찾아요?’ 이런 정도의 뜻이겠다. 민영도 눈빛으로 답했다.
‘내 말이.’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을 지켜보던 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직 안 왔어요?”
“다인이 오는 거, 가는 거, 너한테 다 보고해야 하니?”
“그건 아니지만…….”
대답을 얼버무리는 시준에게 혜선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넌 소아과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소식이 빨라? 다인이한테 GPS 달아 놨니?”
가시가 박힌 혜선의 말에 눈을 치켜뜨던 시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하아―”
“야, 박시준.”
의미가 분명한 한숨 소리와 행동에 혜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문으로 향하던 시준이 멈칫하며 돌아서자 곧장 혜선의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똑바로 해. 나 같은 말 두 번 안 하는 거 알지?”
잠시 혜선을 노려보던 시준은 말없이 고개만 까닥, 숙이고는 바로 그곳을 떠났다.
“저 싸가지.”
후배가 떠난 문간을 노려보며 중얼대고 있는 혜선에게 민영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한테 밉보인 거 있어?”
“직접적으로는 아니죠. 대놓고 작업 걸었던 건 아니니까.”
혜선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작업?”
“우리 과에서 인턴 할 때, 우리 집 이야기 캐고 다녔대요. 그러고는 끝.”
“왜? 왜 끝이야? 캐고 다녔으면 뒷이야기가 있어야지.”
겉옷을 벗어 탈의실에 가져다 놓고 가운을 걸치고 나오는 후배에게 민영은 뒷이야기를 묻는다. 그리고 혜선은 피식 웃는 실소로 입을 열었다.
“캐 봤으니 알았겠죠. 까딱하면 쇠고랑 차겠구나.”
“아.”
궁금해 죽겠다는 듯 재촉하던 민영의 입에서 낮고 긴 탄사가 흘러나오자 혜선이 킬킬대며 웃었다. 민영도 ‘큭’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혜선의 아버지는 경찰청장이다. 어머니는 오랜 기간 교직에 몸담고 있고, 오빠라는 사람은 국세청에서 일하고 있으니 후배의 집안은 흔히들 말하는 공무원 집안이었다. 의대를 선택했을 때, 되레 돌연변이 취급을 받았었다고 혜선이 직접 말하기도 했다. 민영은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혜선을 바라봤다.
혜선은 집에서 가져온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먹을거리, 읽을거리, 놀 거리 모두 엄마가 챙겨 놓은 것들이다. ‘정신의학과’ 의사들은 시간적인 여유도, 정신적인 여유도 충분할 것으로 여기는 엄마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수백 번을 말했지만, 엄마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서랍 곳곳에 물건을 쑤셔 넣던 혜선은 힐끔 선배를 돌아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인이는 잘하고 있겠죠?”
“모르겠어. 아직 인터뷰 끝냈다는 소린 없어.”
민영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교수에게 보고해야 할 검사 기록이 담긴 파일을 열었다.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지만, 회진까지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으니 꾸역꾸역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민영은 얼마 못 가 돌아앉았다.
“아무래도 다인이한테는 버거운 일이지 싶다.”
푸념처럼 던지는 선배의 걱정에 혜선은 안심하라는 듯 눈을 찡긋하며 대꾸했다.
“병원에서 면담할 땐 잘하잖아요. 우리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에휴! 모르겠다, 정말. 아침 일찍 그 환자 형도 거기 갔다는데,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가…….”
민영은 지후와의 통화에서 알아낸 정보를 거리낌 없이 전했다. 입이 무겁고 냉철하기로 소문난 혜선은 가끔 피를 나눈 사촌 동생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롤모델인 선배를 혜선은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여 주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혜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기가 몸을 떨기 시작하자 민영은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낚시하고 있어. 이 환자 형이라는 사람도 왔으니까 갈 땐 버스 안 타고 가도 될 것 같아.]
해맑게 웃고 있는 이모티콘까지 곁들인 문자 메시지다. 민영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뿜었다.
“낚시하고 있대. 환자 형이 왔으니까 올 땐 버스 안 타도 된다고 좋아해.”
한결 풀어진 것 같은 선배의 목소리에 혜선도 씩 웃었다.
“그것 봐요. 괜한 걱정이었잖아.”
거의 모든 일에 이성적인 판단력으로 후배들을 이끄는 민영이 딱 한 사람, 사촌 동생인 다인에게만큼은 이성적이지가 못하다. 혜선의 오빠가 가끔 이성을 잃고 여동생을 구출하겠다는 사명감을 불태우며 데이트 현장에 난입할 때처럼 말이다. 혜선은 민영의 노트를 챙겨다 안겨 주며 조회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제 준비하시죠,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