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네가 나의 모든 것이야.”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성적으로 북악고 태자 전하라 불리는 강선우. 그러나 미혼모였던 어머니가 LT금융 그룹 회장과 재혼하면서 호적상의 아버지를 얻는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홀로 지내고 있다. 겉으로는 한없이 잘났지만 혼자인 외로움에 지쳐가던 선우는 한식 요리사인 아버지와 한복 디자이너 어머니,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반듯하게 자란 여학생 민지현과 우연히 얽히게 된다.

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지현에게 같이 밥을 먹어주는 알바를 제안하고……. 지현과 친구가 되고 그녀의 집에 드나들며 가족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지만, 그럼에도 사랑한다 고백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멀기만 하다.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를 지나 계속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두 사람. 친구라는 이름 뒤에서 그녀만을 바라보는 선우의 깊고도 진한 짝사랑 연대기.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인데? 지현 씨 남자친구.”

자타공인 호구조사가 취미생활인 매니저의 끈질긴 질문에 영나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지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되는 사람.”

2. 작가 소개

임소언(스푸키).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pukioz.com

애착을 갖는 것들:

꽃, 커피, 책.

털고 싶은 것들:

뽀로로 시청 10년의 추억, 메뉴 고민, 작심삼일 운동의지.

3. 차례

#8. 전설의 밤

#9. 청춘의 불꽃놀이

#10. 친구처럼 가족처럼

#11. 연심을 품은 카투사

#12. 착한 아이

#13. 후회

#14. 재회

#15. 연인

4. 미리 보기

지현의 물음에 선우는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지현을 쳐다보았다. 지현은 입학 전에 미리 들을 수 있는 Pre-MBA 과정과 애널리틱스 수업을 듣기 위해 빨리 출국했었다. 그런데 자기보다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로 시카고에 간다던 선우가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 애가 탔다.

유학 후, 지현은 한동안은 거의 매일 선우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선우는 메일을 읽지도 않았다. 미국에서 새로 개통한 휴대전화 번호를 보냈지만, 선우가 답장을 하지 않아 2년 동안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 집에는 전화했었다면서.”

더 어이없는 건, 제 메일은 확인도 하지 않은 선우가 가족들에게는 전화를 했었단다. 파리에 있는 우현한테까지 안부 메일을 보냈다는 말에 지현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염려하던 마음이 선우가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알자 화가 났었다. 그제야 거의 매일 보내던 메일 보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원래라면 반가워야 할 사람인데, 너무 보고 싶고 생각났던 사람인데, 선우를 앞에 두고 지현은 어느 쪽으로도 반응을 보이기 어려웠다.

“왜 그랬을 거 같아?”

문득 자신을 보는 선우의 눈빛에 예전 같은 온기가 없다고 느꼈다. 지현은 저도 모르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 글쎄. 나야 모르지.”

“몰라?”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연락 안 받아서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무슨 일 있나 해서…….”

“걱정했어?”

“당연하지.”

“그랬구나.”

지현은 이 자리가 어색했다. 선우와 오래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말이 뚝뚝 끊겼던 적이 없었다. 꼬여버린 대출 문제부터 시작해서 일찍 들어가 머리 좀 식히고 싶을 뿐이었다. 맞다! 대출! 그것 때문에 왔었지. 지현은 오늘의 목표를 다시 생각해냈다. 지현은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진짜……. 대출 도와줄 수 있어?”

“대출 왜 하려는 거야?”

“사업자금. 근데 사실은 내 앞으로 내는 빚인데 우현이 빌려주려고. 아, 말이 빌려주는 거고 상환도 내가 할 거야.”

지현의 말에 선우가 난감한 듯 턱을 쓸었다.

“흐흠. 원칙대로는 그런 식으로는 대출이 안 돼. 사업자금 명목이면 네 사업체에 투자해서 대출금 갚아야 옳지.”

“우현이 할 회사가 내 회사나 마찬가지잖아.”

“그건 그래. 애매하긴 하지.”

선우가 지현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로 와.”

지현은 선우를 따라갔다. 아까 혼자 집을 둘러보면서 꼭 닫힌 문이 좀 그래서 서재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등학생 방에서 정석이 밀리고 대학생 방이 되었듯, 이제는 전공 서적들이 밀리고 원서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지현이 잠시 방을 스캔하는 사이, 선우는 프린터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계약서

이 계약은 본인(강선우)의 원활한 식생활을 위한 계약이다.

1. 저녁을 같이 먹는다. (사정이 있을 시 협의 가능하지만, 계약 기간 중 10회 이상 같이 먹도록 노력한다.)

2. 강선우의 집에 머무는 동안 해달라는 일을 해준다. (청소, 기타 등등)

3. 계약기간은 1개월로 한다.

4. 보수: 대출 1억 원

강선우와 민지현은 위의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상호 협력할 의무가 있다.

2010년 7월 13일 화요일

강선우(인)

민지현(인)]

세 번째 계약서. 지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지현의 표정 변화에도 선우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지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걸 왜…….”

“거기 쓰여 있는 대로야. 같이 밥 먹어. 그럼 대출해줄게.”

지현은 선우를 보면서 계속 위화감을 느꼈다. 어딘가 이상했지만, 콕 집어서 어디라 말할 수 없었다. 선우와 눈이 마주쳤지만,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지현은 눈을 서류로 돌렸다.

“……강태. 너 이거 직권 남용 아니야?”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너 본부장이 이러면 안 되지. 그리고 너도 MBA 졸업하고 왔으니까 자리 잡은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내가 너한테 이런 거 봐달라고 폐 끼칠 수는 없어.”

“나 LT금융에 입사 3년 차야.”

“뭐라고?”

“이 정도 권한은 내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그게 아니잖아. 자꾸 제 말 핀트를 어긋나게 하는 선우가 답답해서 지현은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다른 데 알아볼게. 이건 아닌 거 같아.”

그러면서도 지현의 마음은 흔들렸다. 찬찬히 선우를 살피자 예전보다 각지고 탄탄한 몸이 어쩐지 그를 더 커 보이게 했다. 그러면서 예전보다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과 삭막한 눈빛이 괜히 지현을 작아지게 했다. 딱 떨어지는 정장의 선우 앞에, 자신만 2년 전 조금 더 풋내 나는 상태로 끌려와 있는 기분이었다.

“밥은…… 이런 거 없어도 같이 먹을 수 있잖아.”

‘너 이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그래? 아직도?’ 그렇게 선우에게 묻고 싶은 걸 지현은 참았다. 선우가 힘들어했던 걸 알아서. 그 작을 때 받은 상처는 풍선 위에 찍은 점이 크게 불수록 같이 커지는 것처럼, 선우가 이만큼 클 때까지도 어딘가를 찌르고 있을 터였다.

“너 다른 데서는 이런 금리로 이 액수 대출 안 나올걸. 정말 많이 잡아야 삼천만 원 정도 아니야?”

지현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선우를 보았다.

“지금 인터넷 구매대행, 온라인 쇼핑몰 이런 쪽은 아무리 세금 잘 내도 한도가 낮을 수밖에 없어. 워낙 업종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까 자영업이라도 전부 대출해줄 수는 없단 말이야.”

선우는 계약서를 다시 집어 지현에게 내밀었다.

“그러니까 여기 도장 찍어. ‘다른 데 알아볼게.’ 그런 말 하지 말고. 어차피 너 다른 데도 알아보고 이 대출이 조건이 좋아서 LT은행으로 왔을 거 아냐.”

“그래도 대출 가능 기한이 끝났다며.”

“직권 남용 아니야. 너 도장 찍으면 다음 달에 같은 조건으로 대출상품 한 번 더 가자고 할 수 있는 거니까. 싫으면 말고.”

선우의 계약서는 늘 그랬다. 지현에게 너무나도 좋은 조건. 도장 찍어서 저 손해 볼 일은 전혀 없는 그런 말끔한 내용. 그래서 지현은 늘 선우에게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그래. 알았어.”

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은행에 가져갔던 노란 봉투에 같이 넣어둔 도장을 꺼내어 찍었다. 흰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도장을 보며 선우가 뭔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지현은 어쩐지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본능에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이 수요일이니까 밥 먹으러 올게. 그러면 되지?”

선우는 도장이 찍힌 제 몫의 계약서를 반듯하게 접어 책상에 올리더니 지현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지현의 뺨에 손을 대었다. 지현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때였다.

“피하지 마.”

뭘? 의아한 지현을 선우는 다급하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지현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아 제 가슴에 누르자 입안이 바작바작 메마른 땅처럼 금이 가는 것 같았다. 여기서, 여기가 중요해. 선우는 긴장된 마음으로 무방비하게 제게 안겨 있는 지현의 입술에 가서 닿았다. 꽉 끌어안은 절박한 몸짓과는 사뭇 다른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이게 기타 등등이야.”

“뭐, 뭐, 뭐라고?”

“2번 항목 괄호 안의 기타 등등.”

지현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선우는 지현의 그런 당황하는 모습 자체에 쾌재를 불렀다. 그녀를 흔들고 말 것이다. 제게 그은 선이 뭉개질 때까지. 그녀를 두드릴 것이다. 자신을 밀어낸 벽이 무너질 때까지.

그런 굳은 결심은 지현의 입술에 닿고 삼 초 정도 지나자 선우의 의식에서 멀어졌다. 부드럽고 상큼한 향기가 나는 입술을 정신없이 눌러대었다. 저 혼자 지나치게 흥분한 탓이리라. 선우의 손이 더는 참지 못하고 지현의 머리와 가느다란 허리선을 슬며시 더듬었다.

그러자 지현이 그제야 상황파악을 했는지 파르르 떨더니 격렬하게 몸을 틀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밀어내려는 지현의 앙큼한 태도에 선우는 모처럼 힘자랑을 했다. 선우는 지현의 붉어진 입술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겨우 키스 정도로 왜 이래? 벌써 이러면 안 되지.”

“너…… 왜 이래?”

지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몰라서 물어?”

그녀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 혼란함이 선우는 반가울 뿐이다.

“모르니까 묻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 혼란을 파고들 테니까.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난 그게 이해가 안 가더라. 너처럼 똑똑한 애가. 세상 모든 일을 다 아는 거 같은 네가…….”

그렇다면 자신은 지현의 마음을 난세로 만들고 그 속에서 승리할 것이다.

“왜 내 마음은 몰랐던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한 건지.”

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선우가 지현의 입을 손으로 막고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쳤다. 겁을 먹은 듯한 지현의 얼굴은 조금 상처가 되었지만, 선우는 개의치 않았다.

“대답은 필요 없어. 이제부터는 내가 직접 알아볼 생각이니까.”

손을 떼자 숨을 몰아쉬다 콜록거리는 지현의 턱을 쥐고 선우는 깊게 그녀의 숨을 빨아들였다.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실수하는 일을 막기 위해 선우는 다방면으로 지현의 음주 가능성을 차단했다. 그러자 아쉽게도 지현이 취한 채 밤을 새워 제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도 없어졌다.

술 깨면 잊힐 그 말 한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건 언제였더라. 그리고 그래도 제게 마음을 주었다고 방심하고 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친구라며 지현이 자신을 밀어냈던 건 또 언제의 일이었더라.

지현이 자신을 거부할수록, 선우는 더욱 타올랐다. 이번에야말로 가질 수 없으면, 지현의 순수한 미소와 사심 없는 친절을 부숴버리길 원했다. 나 말고, 누구에게든, 넌 그런 사람이 될 거라면. 자신을 밀어내는 지현의 손끝에 힘이 미약해질 무렵에야 선우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너…… 이 미친…….”

제게 욕을 하는 지현을 보며 선우는 웃었다. 그게 분한지 지현은 씨근대었다.

“웃어? 이 미친 새끼 지금 웃음이 나와?”

“나 이 계약서 내일 공증받을 거야.”

“뭐, 뭐라고?”

지현이 두 주먹을 꼭 쥐고 선우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어딨어. 이건 무효야.”

선우는 책상에 놓인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래? 그럼 계약 파기해봐. 너희 아버님 가게. 작년 태풍 때 지붕 파손된 거 수리비 대출하신 거 아직 안 갚으셨더라. 일괄 청구할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너. 대한민국 어디서든 너희 가족 일가친척 사돈 누구 명의로도 돈 한 푼도 못 빌려.”

서재의 금고에 계약서를 집어넣는 선우의 기분은 벌써 날아갈 것 같았지만, 성급한 자축을 자제하며 지현에게 말했다.

“이제 가봐. 뭐 첫날인데 자고 간다고 하면 나는 더 좋고.”

그러자 지현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가방을 겨우 움켜쥐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재에서 뛰쳐나갔다. 멀리 지현이 도주하는 발소리가 잦아든 후에야 선우는 서재에서 나와 거실로 향했다.

선우는 서재에서 나와 지현이 문을 닫고 사라진 현관을 한참을 바라보다 천천히 거실 소파에 가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작고 마른 지현의 몸을 꽉 잡았던 손에 남은 감촉이 낙인이라도 찍힌 듯 사라지지 않고 화끈거렸다.

잘게 떨리는 제 손을 보던 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계속 자기 암시를 걸어보아도, 스스로 지현을 상처 입힌 것 같은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나 싶었다. 이 방법뿐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선우 자신도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내가? 선우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진정하려는 듯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넌……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넌…….”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드는 붉은 하늘이 오늘따라 눈이 시렸다.

“지현아…….”

중얼거리듯 입에 담은 이름 두 글자에 선우의 가슴도 하늘처럼 붉게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