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네가 나의 모든 것이야.”

잘생긴 외모에 뛰어난 성적으로 북악고 태자 전하라 불리는 강선우. 그러나 미혼모였던 어머니가 LT금융 그룹 회장과 재혼하면서 호적상의 아버지를 얻는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홀로 지내고 있다. 겉으로는 한없이 잘났지만 혼자인 외로움에 지쳐가던 선우는 한식 요리사인 아버지와 한복 디자이너 어머니, 어린 동생들 사이에서 반듯하게 자란 여학생 민지현과 우연히 얽히게 된다.

유학을 가겠다는 꿈을 위해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지현에게 같이 밥을 먹어주는 알바를 제안하고……. 지현과 친구가 되고 그녀의 집에 드나들며 가족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지만, 그럼에도 사랑한다 고백하기에 그녀는 너무나 멀기만 하다.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를 지나 계속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두 사람. 친구라는 이름 뒤에서 그녀만을 바라보는 선우의 깊고도 진한 짝사랑 연대기.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인데? 지현 씨 남자친구.”

자타공인 호구조사가 취미생활인 매니저의 끈질긴 질문에 영나는 우문현답을 내놓았다.

“지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되는 사람.”

2. 작가 소개

임소언(스푸키).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 - pukioz.com

애착을 갖는 것들:

꽃, 커피, 책.

털고 싶은 것들:

뽀로로 시청 10년의 추억, 메뉴 고민, 작심삼일 운동의지.

3. 차례

#프롤로그

#1. 첫걸음

#2. 수상한 아르바이트

#3. 지현을 닮은 집

#4. 나에게 너는 하늘의 별

#5. 순정

#6. 변화

#7. 외로운 남자

4. 미리 보기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며 다가가는 선우에게 문득 수현의 눈빛이 머물렀다. 수현이 멈칫하며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수현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던 지현이 돌아보았다.

“어. 강태!”

지현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마냥 생글거리며 팔을 번쩍 들어 선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선우는 울컥하는 속을 꾹꾹 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지현에게 바짝 붙어 섰다.

“여기 있었네. 내가 조금 일찍 도착해서…….”

수현이 탐색하듯 선우를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라이벌!

선우는 물러서지 않으며 지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얘가 어제 말한 그 친구야? 1학년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던 친구?”

“응. 하여튼 기억력도 좋아.”

그 친밀한 대화에 수현이 마뜩잖은 듯 되물었다.

“다모임 아이디 공유해?”

“아니. 어제 너 쪽지 왔을 때 얘 우리 집에 있었거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지현의 말에 선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자 수현이 피식 웃더니 악수를 하자는 듯 손을 펴 선우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

“그럼 너가 ‘남친 1호’구나? 내가 ‘남친 2호’야. 앞으로 잘 지내자.”

그 말에 선우는 띵 소리를 내더니 일순 얼음이 되었다.

수현이 가고 나자 선우는 부아가 치밀어 지현에게 말했다.

“쟤 뭐야?”

“뭐가?”

“화장실도 같이 다녔다더니 남자애잖아.”

그 말에 지현이 “아.” 하며 옛날 추억이 떠오르는 듯 헤실거렸다.

“되게 친해서 쟤랑 둘이 쉬는 시간에 같이 퀴즈책 보고 그랬거든. 근데 화장실 앞까지 같이 갔다가 나오면 또 같이 교실 오고 그랬다.”

아. 머리야. 도저히…… 도저히…… 평소 같으면 지현의 엉뚱함조차 귀엽게만 느껴졌지만, 지금 선우는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남친 2호는 뭔 소리야?”

그 말에 지현이 샐쭉한 표정으로 선우를 째려보며 폰을 꺼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쟤가 내 폰 전화번호부 보고 강태 너 남친 1호라고 저장된 거 보고 남친이냐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친구라고 했더니 자기 전화번호를 남친 2호라고 저장한 거 있지.”

“이름으로 저장을 했어야지!”

“아, 몰라. 난 이런 거 보는 거 귀찮아. 네가 등록해, 하고 전화기 줬더니……. 하여튼 다 너 때문이야.”

갑자기 오한이 온 듯, 지현이 몸을 부르르 떨다 재채기를 했다.

“후엣치. 아, 춥다. 강태. 우리 빨리 안으로 들어가자.”

그러나 선우는 말이 없었다. 기분을 읽을 수 없는 선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지현은 어쩐지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지현은 살짝 선우의 눈치를 봤다.

“야. 강태.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아냐. 빨리 가자.”

선우는 휙 하고 먼저 몸을 돌려 금방 저만치 가버렸다.

“지 다리 길다고 자랑하나. 야! 같이 가. 윽!”

“뭐야! 앞 좀 보고 다녀. 짜증나게.”

“아, 죄송합니다.”

선우를 쫓으려던 지현은 대각선에서 걸어오던 양아치 같은 남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덩치가 작은 지현 쪽이야말로 밀려 넘어질 뻔했는데, 어깨에 보톡스라도 맞은 듯 건장한 남자가 지현을 노려보며 건들거렸다.

“죄송하면 다야? 오늘같이 좋은 날 재수 없게. 아파 죽겠네.”

“무슨 일이시죠?”

선우가 지현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얼굴은 아직 학생 티가 나지만 훌쩍 큰 키와 너른 어깨에 남자가 움찔했다.

“너 뭔데? 저게 먼저 와서 부딪혔다고.”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화 푸시죠.”

“하. 나이도 어린 것들이. 그게 어른한테 죄송하다는 태도야?”

“그럼 어떤 태도가 죄송하다는 태도죠? 사소한 일로 이러시는 그쪽도 그다지 어른스러우시진 않은 것 같은데요.”

“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선우는 지갑에서 작은 명함을 한 장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많이 아프시면 병원 가시죠. 하지만 의사와 함께 제 변호사도 만나셔야 할 겁니다. 연락은 이쪽으로 주시죠.”

명함을 받아 살피던 남자가 살짝 안색이 변하더니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내, 내가 이번 한번만 그냥 넘어가지. 앞 좀 제대로 보고 다녀!”

남자가 몸을 돌려 후다닥 가버릴 때까지도 선우는 내리 무표정한 얼굴로 지현의 어깨를 당겨 안고 있었다. 선우의 품에서, 지현은 갑자기 제 심장이 작게 콩콩거리는 소리를 들어버렸다.

‘어. 이거 뭐야.’

기분이 이상했다. ‘강태!’ 하고 부르면 돌아보는 선우. 먹을 거에 사족을 못 쓰는 쉬운 선우. 가끔 뻘짓해도 그저 웃으며 자길 봐주는 선우. 그런데 방금 어른 아저씨에게도 밀리지 않고 할 말 하던 선우는 지현이 알던 선우가 아닌 거 같았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괜히 얼굴도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에 지현이 몸을 틀자, 선우는 그제야 아직도 지현이 제 팔 안에 있었다는 걸 알았다는 듯 순순히 팔을 풀었다.

“괜찮아?”

하고 물어오는 지현을 보는 선우는 조금 전 엿본 낯선 모습과 친구 선우의 중간쯤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재차 심장이 콩콩거려서 지현은 당황스러웠다.

“어? 어. 나 괜찮아.”

“앞 좀 보고 다녀. 크리스마스라 사람 많잖아.”

“응.”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우가 손을 내밀었다. 어느 때부턴가 선우는 지현을 덥석덥석 잘도 끌어안고 손도 잡고 팔짱도 끼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손을 잡기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빨리 손을 잡지 않고 쳐다만 보자 선우가 재촉하듯 물었다.

“왜?”

“손이 시려서.”

그러자 선우가 메고 있던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서 지현의 손에 끼워주었다. 선우 거라 헐렁하지만 대충 지현의 손에 씌우듯 장갑을 끼우고 선우는 그 손을 꽉 잡았다.

“가자. 꼬맹이들 기다린다.”

“응.”

손을 잡고 나란히 걷다 지현은 살짝 옆을 보았다.

‘키가 더 컸나?’

여름방학 때만 해도 그래도 지현이 선우의 턱 아래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제 키가 선우의 어깨 정도 높이밖에 안 되는 거 같았다. 어쩐지 어른스럽게 말하던 선우를 보고 나니까, 똑같이 대학생이 될 건데 엄마 말씀대로 자기만 철없는 말괄량이인 듯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정환의 크리스마스이브 디너는 올해도 화려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와 나라가 귀엽게 루돌프 사슴 코 노래와 율동으로 흥을 돋웠다. 신나게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다 지현은 슬쩍 선우를 보았다.

아까 낮에 쇼핑하고 올 때까지만 해도 계속 기분이 그냥 그래 보였던 선우는 이제는 보통 때처럼 괜찮아 보였다. 지현은 살짝 한숨을 쉬고 열심히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9시가 되자 꼬맹이들을 재우고, 정환은 지현과 선우에게 와인을 조금씩 따라주었다.

“이제 너희들도 대학생이지. 술은 원래 어른이 주는 걸로 시작하는 거란다.”

“진짜 마셔봐도 돼요?”

선우가 조심스레 잔을 들어 올렸다. 멋들어진 커다란 와인잔에 찰랑거리는 자줏빛 술이 어른의 세계로 온 걸 환영하기라도 하는 듯 매혹적인 향기를 뿜었다.

“그래. 너희들이랑 같이 마시려고 아저씨가 좋은 걸로 준비했단다.”

“그러게. 우리 지현이도 우리, 나라처럼 작을 때가 있었는데. 이제 대학생이네. 선우야. 내년에 대학교 가서도 우리 지현이 잘 부탁한다.”

“엄마는! 왜 나를 강태한테 부탁해? 내가 무슨 사고뭉친가. 나도 모범생인데.”

이것아. 모범생이니까 더 걱정되는 거지. 연정의 걱정은 끝이 없었다. 요즘 들어 대학교에서 선후배 모임 등에서도 사건 사고가 잦아, 사서 걱정하냐는 정환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자꾸 그런 뉴스를 검색해서 더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건배하자.”

“네.”

“예이. 흐흐흐.”

“지현이 까불지. 조신하게 좀 있어.”

“치…….”

“자. 조용히. 지현이 선우 둘 다 올해 정말 수고했다. 새해에는 대학교 가서 학교생활 즐겁게 멋지게 하길 바란다. 그리고 여보. 올해도 고마웠어. 내년에도 잘 부탁해.”

“당신도요.”

네 사람은 살짝 잔을 부딪쳤다. 선우와 지현은 조심조심 와인에 혀를 대어보았다. 술 냄새가 나는 액체는 조금 씁쓸하지만 생각보다 마실 만했다.

“어떠냐? 처음 마셔본 술이.”

“쓴데…… 못 마실 거 같지는 않아요.”

“저도요. 아빠. 조금만 더 마셔봐도 돼요?”

“우리 딸 술꾼 되려고?”

정환은 웃는 낯으로 와인병을 들어 아까처럼 한 모금 정도씩 따라주었다.

“여기 크래커랑 치즈도 먹어봐라. 술은 안주랑 같이 먹어야 덜 취한단다. 빈속에 먹으면 괜찮은 것 같다가도 한순간에 취하거든.”

“네. 아저씨.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했어요. 학교 가면 술을 마신다는데.”

“술을 잘못 배우면 고생해. 억지로 마시면 건강이 상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다른 술도 같이 맛을 보자꾸나.”

“네. 고맙습니다.”

미지의 대학 생활에 대한 인간관계 조언들과 어른으로서 이런저런 마음가짐 이야기를 듣다 밤이 깊어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의 지현이 선우를 배웅한답시고 쫄랑쫄랑 따라 나왔다.

“강태.”

지현은 어쩐지 오늘따라 우물쭈물거렸다.

“왜?”

“저기…… 오늘 낮에 고마웠어. 괜히 나 때문에 싸운 거처럼 돼서 미안하고.”

“됐다. 넣어둬. 넣어둬.”

장난치듯 선우가 대답하자 안심한 지현이 생긋 웃으면서 선우에게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세 번째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식.

“뭔데?”

“필통이야. 대학생 되면 쪼끔 더 어른스러운 걸 쓴다고 해서.”

“고마워.”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 필통을 넣었다.

“그리고 이건 덤.”

지현이 카드를 건네었다.

“그래. 고맙다.”

“자. 그럼 너도 줘.”

선우는 지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한숨을 쉬었다.

“미안. 나 사실 깜빡하고 집에 두고 왔어.”

“진짜? 에이.”

지현이 삐친 듯 볼에 바람을 넣어 부풀렸다.

“다음에 놀러 올 때 가지고 올게. 어차피 넌 착한 아이도 아니잖아?”

“뭐야? 이게. 누나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둘은 평소처럼 옥신각신하다 웃으며 바이바이 하고 헤어졌다. 선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추운 겨울의 언덕길을 내려왔다. 평소엔 가깝다고 느꼈던 집이 오늘따라 멀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선우는 코트도 벗지 않고 지현이 건넨 카드를 펴보았다.

[강태! 메리크리스마스

작년에는 이상한 말 쓰다가 크리스마스카드 같지가 않아서, 올해는 이거 먼저 쓰지롱. 우리 이제 대학생이네. 강태 흑흑 학교 가서 새 친구 많이 사귀어도 우리 멀어지지 말고 같이 놀자. 우리 집에도 많이 놀러 와! 영어 공부도 같이 하자! 민뿡 씀.]

카드를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선우는 코트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심플한 반지 두 개가 나란히 들어 있었다. 지현을 향한 선우의 마음처럼 깨끗하고 흠집 하나 없는 반지가 매끄럽게 반짝거렸다. 반지를 들여다보던 선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수능 치고 대학 간다고 어른 되는 거 아니잖아.”

지현이 눈곱만큼이라도 선우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제 오늘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니까. 어쩌면 지현과 어색해질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른 된 기념으로 선우는 고백을 해보려고 했다. 지현이 고개만 끄덕여준다면 선물로 건넬 반지를 사두고 며칠을 잠도 설칠 정도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지금처럼 계속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

선우는 한숨을 쉬고, 상자를 닫아 책상 서랍에 넣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