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대는 평생 나 외의 남자 품에는 안기지 못할 것이다.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아란국 도한제의 유일무이한 외동딸 비(庇) 공주. 갑작스런 황제의 사망 이후, 황위를 이어받는 동시에 혼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녀의 정인이었던 연(戀)이 아닌 검은 잎새 가문의 장자 휘(揮)를 정실 지아비로 두라고 강요한다.

단지 권력에 눈이 멀어 혼인을 택한 줄 알았던 휘는 첫날밤 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을 내리는데…….

“나를 미워하여도 좋으니,”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 입술에 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나를 떠나가지는 마라. 미워해도, 내 곁에서 미워하여주길 바란다. 내 눈앞에서, 내 손이 닿는 곳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리에서, 나를 실컷 미워하여도 좋다. 그저…… 떠나지만 말아다오.”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8. 의문(疑問)

#9. 족쇄(足鎖)

#10. 파경(破鏡)

#11. 회귀(回歸)

#외전. 밤의 달빛 아래서 매화가 피다

4. 미리 보기

“요즘은 무슨 일로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깍지 낀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바람이 불어오면 연은 비를 자신의 쪽으로 더 가까이하고는 했다. 서로의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평상시와 같았다.

“연. 내가 늘 황실의 오래된 서고라 부르던 서고를 알고 있지요? 그 열쇠와 관련된 고민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까?”

연은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마음속은 심란하였다.

바람이 불었다. 찬바람이 가슴속 깊이 감춰둔 마음을 관통했다. 연은 가을바람이 이다지도 싫었던 적이 없었다. 이번 가을은, 지나치게 그를 힘들게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비가 조심히 되물었다.

“혹시 본 적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선황께서 보여주신 적이 있지요. 붉은빛이 감도는 황금빛의 열쇠 아닙니까?”

본 적도 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라 가지고 있었던 적도 있다.

비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자신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그녀에게 밝힐지도 모르는 과거.

그때가 되면, 그녀는 과연 자신을 받아들여줄 것인가.

연은 그녀가 그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신뢰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신뢰. 그녀와 혼인하게 되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말해주려 했었다. 이미 자기 사람으로 잡아놓고 그리하는 일은 비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그러져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자신의 이야기를 다 듣게 된 그녀가 설령 자신의 이런 믿음을 모조리 저버리고 떠나간다 하여도, 자신은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이미 그녀에게 한 번 구해졌음으로.

사실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사치일지 몰랐다.

그렇지만 막상 그녀가 자신을 저버린다면, 그녀를 놓을 수 없는 자신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혹시 최근에 본 적은 없나요?”

“없습니다.”

거짓은 아니다. 실제로 지금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니 없다. 어디로 가 있는지는 대략 알고 있었지만, 연은 비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열쇠를 받지 못하셨습니까?”

“네.”

주지 않았군. 도한제께서는 당연히 비에게는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주지 않았다.

하긴 지금 이 상황에서 드러내놓고 줄 수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는가.

아니면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가.

둘 다일 수도 있겠다, 그는 생각했다. 일견 단순한 일이었는데, 이리 복잡하게 꼬이다니. 자신의 불찰 같았다. 원래부터 그러했듯이 한 걸음 뒤에서 머물러 있었다면 이리 복잡해지지 않았을까?

내가 비의 곁에 애초에 없었다면.

그랬다면.

생각만으로도 심장의 살점을 떼어내듯 고통스럽다. 욕심을 낸 순간부터 그는 그 감정에 먹혀버렸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잡은 그 순간부터 그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버렸다.

분명 비가 알아볼 것이 있어 서고를 열어보려 함이다. 경의 도움으로 이미 열어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하던 정보는 얻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무슨 정보였을까?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는 무엇?

“그래서 서고에는 들어가지 못하셨습니까?”

“아니에요, 연. 대장군의 도움으로 그의 열쇠를 얻어 들어갔습니다만, 원하던 내용이 없어졌습니다. 도대체 누가 가져간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은데, 알려주는 이는 없군요.”

도한제 생전에는 그 서재를 건드린 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 열쇠를 가진 이들이 건드렸다는 뜻이다. 어째서 비가 보지 못하게 ‘얼마의’ 내용을 치워놨을까. 한 가지 정도는 이유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다일까? 비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유 때문에 그곳에 들어갔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비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알려주는 이가 없다는 말.

그 속에는 어쩌면 자신 또한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사랑하는 비. 당신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반쪽짜리 걸음으로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휘 공자와 내가 그 반쪽을 채워 온전히 걸을 수 있게 돕겠습니다.

언젠가는 혼자서도 걸을 수 있도록.

하지만 그와 나와 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금 이대로 살아간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누구 하나는 떨어져 나갈 터였다. 그렇지만 그 사이 비가 버틸 수 있을까? 지금도 그녀는 벼랑 위에 선 듯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를 그 벼랑에 올려놓은 사람은…….

“궁금하신 부분이 있습니까? 어지간한 책은 섭렵하였으니 미약한 내용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지 모릅니다.”

예문활인지문(藝文闊因志文). 비가 말하는 곳의 정식 명칭은 이러했다. 그곳의 서책은 어린 시절에 다 읽었고 내용 또한 머릿속에 아직 고스란히 있었다. 비가 필요하다면, 잃어버린 서책의 내용을 되새김질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연은 잠시 옛 생각이 떠올랐다.

「내 명 없이 겁박으로 이 서고의 내용을 발설하게 될 정도가 된다면, 알아서 자결하여라.」

도한제께서는 그리 명하시곤 했었다.

「너는 머리가 너무 좋단 말이지. 다른 이 같으면 그저 잊어버리기도 할 것 같지만 너는 그럴 것 같지 않거든. 내가 지금 어느 책의 몇 쪽을 알려달라 해도 너는 읊어대겠지. 그러니 외압이 있게 되더라도 절대 불지 말고 살아서 돌아와라. 나는 너를 무척이나 아끼니 말이다.

그렇지만 네가 한계에 다다라 불게 될 것 같거든, 죽어라. 그게 서로 깔끔하고 좋지 않으냐? 하지만 가급적이면 죽지 말고 살아서 내 옆으로 다시 돌아오거라. 네가 죽는 것을 황제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나는 원하지 않는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태연히 웃으며 하시곤 했다.

그런 분이셨다. 하지만 원망은 없었다. 원망을 한다니,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은 자신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말씀은 그리하셨지만 그분께서는 자신을 아끼셨다.

연은 조금 쓰게 웃었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표정은 풀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은 비의 것이니, 비의 말을 따르는 일은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겠지.

게다가 이 모든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묻히고 잊힌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을 끊어낸 사람은 자신이 아닌 바로 그분이셨다.

아, 하지만 그녀 또한 나의 것이다. 내가 그녀의 것이듯, 그녀 또한 나의 것이다. 나를 향하는 그녀의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도, 나를 부르는 그녀의 다정한 입술도. 항상 주어지는 그녀의 웃음도.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내 인생의 소중한 사람.

아름답고 다정하며 사랑스러운 나의 정인(情人).

“연.”

비가 말끄러미 연을 쳐다봤다.

“얼굴이 이상하게 어둡네요.”

“그렇습니까?”

“표정은 여느 때와 같지만, 나는 연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알 것 같아요. 어깨의 힘을 풀어봐요. 무슨 신경 쓰는 일이 있는 거예요? 일이 너무 많았나요?”

“비. 아무래도 그대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누가 그녀가 감정에 둔감하다 하였는가?

남들은 미묘하여 눈치채지 못하는 자신의 표정변화도 금방 알아챈다. 자신의 가족과 선황 폐하 정도밖에 깨닫지 못할 미미한 흔들림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도 예리하게 잡아내었다. 그녀는 사람의 기분에 민감하다. 미치도록 감추고 싶은 불안도 그녀는 마치 족집게로 잡아내듯이 잡아내어 마음을 풀어주려고 한다.

“나의 아내는 이길 수가 없군요.”

연은 얕게 웃으며 비를 안아 빙그르르 돌렸다. 따스한 그녀의 품이 좋았다. 그녀의 자신을 향한 다정함과 그 애정이 좋았다.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온전한 마음이 언제나 애틋하였다. 그는 재빨리 궁녀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비를 사뿐 내려놓고 깊게 입 맞췄다.

놓치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절대로.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 하여도.

연은 비를 감싸 쥔 손에 힘이 들어가려 함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가 연의 품에서 행복한 듯 우후후 웃었다. 그러나 연은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생각과 그녀를 놓고 싶지 않다는 격렬한 감정이 부딪혀 괴로웠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그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알고 한 것이다. 이번만큼은. 머뭇거리며 비를 양보하지 않겠다고 자신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