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대는 평생 나 외의 남자 품에는 안기지 못할 것이다.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아란국 도한제의 유일무이한 외동딸 비(庇) 공주. 갑작스런 황제의 사망 이후, 황위를 이어받는 동시에 혼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녀의 정인이었던 연(戀)이 아닌 검은 잎새 가문의 장자 휘(揮)를 정실 지아비로 두라고 강요한다.

단지 권력에 눈이 멀어 혼인을 택한 줄 알았던 휘는 첫날밤 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을 내리는데…….

“나를 미워하여도 좋으니,”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 입술에 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나를 떠나가지는 마라. 미워해도, 내 곁에서 미워하여주길 바란다. 내 눈앞에서, 내 손이 닿는 곳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리에서, 나를 실컷 미워하여도 좋다. 그저…… 떠나지만 말아다오.”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4. 선물(膳物)

#5. 사절(使節)

#6. 축제(祝祭)

#7. 파란(波瀾)

#외전. 경의 소소한 하루

#특별편. 연서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

#외전. 만약에

4. 미리 보기

시간은 빨랐다. 마치 살을 채워 날린 활과도 같아서, 하루는 부산히도 가곤 하였다. 수없이 배울 업무들. 끝없는 회의. 상소문과 탄원서. 경연.

일. 일. 일.

비는 춘비전에도, 동비전에도 들지 않았다. 휘와 연은, 간간이 마주쳤으나 업무상 관련 있을 때뿐으로, 그 어느 쪽과도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휘를 볼 때면 잊힐 듯 잊히지 않는 증오가, 연을 볼 때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연정이 솟아오르곤 하였으나, 그 또한 바쁜 일과에 묻히곤 하였다.

어느 날은 옷조차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침상까지 가지도 못하고선 의자에서 잠이 드는 경우도 있다. 물론 비를 돌봐주는 이들이 그녀를 깨워 침상으로 보내곤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정도의 바쁨이 딱 좋았다. 선천적으로 아주 바보는 아니라, 업무를 배우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이해도 빠른 편이었다.

그러나, 그녀로서는 휘 공자의 영향력을 다 따라갈 수 없었다. 이는, 검은 잎새 가문이 강대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편에 서 있는 붉은 꽃잎 가문도, 이도 저도 아닌 채 조금은 난감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푸른 줄기 가문도, 검은 잎새 가문에 비하면 절대 약한 세력은 아니었기에, 새삼 가문의 힘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려운 무언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황제의 부군으로서 주어지는 어떤 영향력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 따지면, 연도 그만한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오히려, 원래 가지고 있던 세에 황제의 부군이라는 입지가 오히려 권한을 좁히면 좁혔지 늘린다는 기분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불리함도 자신의 유리함으로 만드는 능력이 확실히 있었다.

확연히 이분화된 권력.

정녕 나는, 허수아비인가?

비는 실소조차 머금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생각하곤 하였다. 멍하니, 석양을 보면서. 하루의 마무리, 생각을 정리할 때쯤 되면, 아무리 바쁜 일이라도 치우고 그녀는 지는 해를 바라보러 가곤 하였다.

그만한 휴식은, 필요하였다.

연이 보고 싶었다.

그리움이 넘치면 밤늦도록 홀로 정원을 거닐다, 염려가 끝까지 달한 경이 찾으러 오곤 하였다. 가끔 공문서를 보다가 황제의 인을 찍어야 하는 자리에 연의 이름자를 쓰곤 하는 일은 웃어넘길 만하였다.

시간은 꼬박꼬박 지나갔고 밤은 계속해서 찾아왔고 일은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차라리 술을 드시고 난동을 부리심이 낫겠습니다.”

보다 못한 은이 말했다.

“상상은 잘 안 되지만 말입니다. 그러다 분명 어느 한순간에 무너지십니다.”

비는, 아주 약하게 웃었다. 은은, 그녀가 믿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흔치 않은 웃음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다.

“괜찮습니다.”

“보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은은 답답하다는 듯 진보랏빛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을 받았다. 일목 요약하게 정리된 항목을 차례로 훑으며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옥새를 찍는 비를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비는, 체력적으로 강한 유형은 아니었지만, 선황이셨던 도한제의 영향인지 자신을 흩트리는 일은 죽어도 하지 못하는 유형이었다.

선황께서는, 딸에게 다정한 듯하면서도 엄한 면은 굉장히 엄하셨다.

결국, 보다 못한 은이 비의 옥쇄를 빼앗았다.

“이런 항목까지 폐하께서 직접 하시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돌려주십시오.”

단정하게 내민 손. 그랬다. 그녀가 힘든 내색을 보일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경죄로 손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이건 아닙니다. 경도 저를 말리지 않지 않습니까?”

포기되지 않는 마음. 옆에 있던 경도 가만히 거들었다.

“은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은 쉬어도 되는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일에 열중하는 모습은 그녀가 보기에도 썩 정상은 아니었다.

밤. 그녀가 비의 처소를 지킬 때가 되면.

비는 예전처럼 울지 않았다. 혼롓날 그녀의 품에서 운 것이 마지막이라는 듯, 잠조차 마지 죽은 듯이 조용히 잤다.

그러나.

간간이 나지막하게 몸을 일으키는 소리. 물 잔을 기울이는 소리. 약한 한숨. 방 안을 서성이는 발걸음.

내색하지 않으려는, 갈등.

그, 썩어 들어가는 속을 보자니 그녀의 마음도 같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돌려주십시오.”

표정 없이 바라보는 얼굴. 사무적으로 내민 손.

아아, 그때와 똑같은, 의욕 없는 얼굴.

경은, 욱씬 마음이 아팠다. 비에 대한 애정이 있는 만큼, 그녀는 비의 불행이 못내 가슴 아팠다.

연 공자님을 만난 이후로, 웃음을 되찾으셔서 얼마나 기뻐했는데.

이제, 행복해지실 일만 남았다 생각했거늘.

어째서, 이런.

“폐하, 소신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은은, 심각하게 무릎을 꿇었다. 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충이라. 저 서류를 없애버리기라도 할 건가? 아니면 다른 중요한 무엇?

비장한 어조가 은에게서 흘러나왔다.

“폐하, 어릴 적 폐하처럼 ‘은 오라버니, 돌려주세요.’라고 하시면 돌려드리지요.”

어이가 없어서, 비가 풋 웃어버렸다. 그런 비를 보고 은도 청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