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나의 마지막 겨울이 되어줘서 고마워. 이제, 나의 첫 봄이 되어줘.

윈터스 그룹의 수장 블레이크 윈터스는 은사의 장례식을 위해 고적한 강원도 산골마을 설림리를 방문했다가 눈꽃처럼 투명한 여자 기윤설과 마주한다.

맑고 아름다우나 비밀을 품고 있는 윤설과, 어두운 과거를 지닌 블레이크. 두 사람은 과연 운명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네게 오기 위해 열심히 생각했다고 했어.”

뜨거운 몸이 무색하게 단정한 속삭임이었다.

“내게 설림리는 너야. 설연당도 너야.”

손이 길을 낸 비밀스러운 공간을 블레이크의 욕망이 채웠다.

“들어가서 섞이고 싶은.”

2. 작가 소개

나자혜

느린 여행과 굽 낮은 신발과 승패가 가려지는 야구 경기를 좋아하며, 걷거나 뛰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발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트위터: www.twitter.com/lovenwisdom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3. 차례

#6. 진심의 급습

#7. 너에게로, 귀향

#8. 눈송이들처럼 우리가 만나

#9. 욕망의 종착지

#10. 운명 속으로, 직진

#11. 우리 모두 때론 누군가의 눈이기를

#12. 해독제와 스노 엔젤

#13. 우리 항항 서로에게 봄이기를

#14. 새로운 시작

4. 미리 보기

딩도옹!

초인종을 눌렀는데 응답이 없었다. 윤설은 초인종을 한 번 더 눌렀다. 스노 캐슬 스위트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문을 막막히 바라보던 윤설은 코트 위에 멘 크로스백에서 휴대전화를 빼 들었다. 블레이크의 번호를 찾으려는데, 문이 딸깍 열렸다. 로브 차림의 블레이크가 문가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은 것을 보니 샤워라도 하고 있었나 보다.

블레이크의 입가에 미소가 설핏 어렸다. 윤설은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졌다.

“설림리에 뭘 하고 계신 거예요?”

블레이크의 미소가 걷혔다.

“단우 찾아가서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약속해놓고선…….”

“배단우 이야기 하러 왔어?”

고개를 저을지 끄덕일지 알 수 없어 윤설은 불쑥 물었다.

“윈터스 씨, 도대체 정체가 뭐예요?”

블레이크가 문가로 비켜섰다.

“들어와. 보여줄 테니까.”

윤설은 룸으로 들어섰다. 센서 등이 켜진 좁은 통로에 그녀를 세운 블레이크가 크로스백을 들어올려 옆으로 뺐다. 백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코트의 토글을 하나씩 끌렀다. 그녀의 어깨를 들어올려 코트 소매를 빼는 블레이크를 윤설은 올려다보았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내 정체가 궁금하다며.”

블레이크가 그녀를 벽에 밀쳤다. 서늘한 벽에 등이 기대졌을 때, 블레이크의 손이 그녀의 얼굴선을 어루더듬었다.

“기윤설. 네가 설림리야.”

이해할 수 없는 고백 뒤로 센서 등이 꺼졌다. 블레이크의 손이 어깨를 짚고, 다른 손이 스웨터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덮었다.

“한 겹 벗겨내고, 만져보고, 찔러보고, 시험하고, 길들여서, 갖고 싶은.”

가슴의 정점을 희롱하는 손놀림에 윤설은 허리를 비틀었다. 블레이크의 얼굴에 오만한 미소가 번지고, 그의 손이 바지 지퍼를 내렸다. 속옷을 파고드는 손길이 거침없었다.

“윈터스 씨!”

윤설은 비명처럼 신음을 내질렀다.

“쉬잇.”

따뜻한 숨결로 정수리를 쓴 블레이크가 다리 사이를 헤집었다.

“나야말로 그 정체가 궁금하니까.”

젖어드는 꽃잎이 부끄러웠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이렇게 쉽게.

“이런 식으로 대답 회피하지 마세요.”

윤설은 다리를 바동거렸다. 블레이크의 허벅지가 다리를 내리눌렀다.

“대답을 주고 있잖아.”

압도하는 몸과는 달리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

쉬잇. 쉬잇.

어린아이 달래듯 머리카락 위에 숨결을 쏟아놓으며, 블레이크는 손가락을 그녀 안으로 밀어넣었다.

“하아아.”

가쁜 숨결이 터져나갔다.

“이 자리 기억해?”

무작정 고개가 저어졌다.

“네가 내게 선생님의 유품을 건넨 곳이야. 사령제에 참석해달라고 부탁하면서 네가 그랬지. 겉으로 보이는 게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그랬다. 기억이 났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해? 내가 아이가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기억이 났다. 지금 이것이 그 많은 방법들 중 하나란 걸 알 수 있었다.

내벽을 건드리는 감질나는 손놀림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여기 온 이유와 하려던 말들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어. 그래도 난 너에게로 갔다고.”

화난 사람처럼 중얼거린 블레이크가 손을 거두고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윤설은 본능적으로 몸을 말았다. 거세게 뛰어대는 것이 그녀의 심장인지, 블레이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침실로 들어간 블레이크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녀 어깨 옆에 양손을 짚고서 몸을 앞으로 굽혔다. 은은한 비누 향과 함께 울림 깊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열어.”

살짝 벌어진 로브 깃 사이로 블레이크의 맨살이 내비쳤다.

내 마음을 열어봐.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줄게. 겉껍질에 감추어진 것들을 네게는 보여줄게.

강건한 몸이 전하는 언어가 마음을 두드렸다.

윤설은 떨리는 손으로 로브의 매듭을 풀었다. 블레이크의 나신이 드러났다. 우아한 쇄골과 탄탄한 어깨. 정갈한 피부에 새겨진 먹빛 사자 문신.

날개처럼 펼쳐진 로브를 벗은 블레이크가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스웨터와 브래지어가 벗겨져나갔다. 드러난 가슴이 부끄러울 틈도 없이, 바지가 허물처럼 떠나갔다.

마지막 하나 남은 속옷마저 내던진 블레이크가 그녀 안으로 들어왔다.

“네게 오기 위해 열심히 생각했다고 했어.”

뜨거운 몸이 무색하게 단정한 속삭임이었다.

“내게 설림리는 너야. 설연당도 너야.”

손이 길을 낸 비밀스러운 공간을 블레이크의 욕망이 채웠다.

“들어가서 섞이고 싶은.”

“하아아.”

윤설은 입을 살짝 벌리며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몸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희열을 그대로 담아둘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블레이크의 턱 선이 팽팽해지고, 그의 눈동자에 균열이 일었다. 물기 어린 눈동자에 갈망이 일렁였다. 빛과 어둠을 한데 품은 연갈색 눈동자로 빠져들 것만 같았다.

누군가와 몸을 섞는다는 것. 그 의미를 윤설은 속속들이 깨달았다. 블레이크의 몸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가졌다. 채웠다가 물러나고, 다시 밀려들면서, 끝없이 낙인을 찍어댔다.

“널 괴롭히는 것 같아?”

윤설은 고개를 저었다.

“빼앗는 것 같아?”

“아뇨.”

블레이크의 긴 손가락이 땀으로 젖은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고요하고도 밀밀한 절정이었다.

윤설은 블레이크의 가슴을 만졌다. 핏줄로부터 버림받고, 동류의 아이들이 모인 이곳에서도 온전히 환영받지 못했다던 유년. 그 아픔이 이 몸 안에 응어리진 것일까.

사자가 문 눈송이를 어루만질 때 블레이크가 물었다.

“넌 내게 진심을 주었어. 그렇지?”

윤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어때?”

“그 다음이 뭔데요?”

“진심의 다음 단계. 믿음은 어떠냐고?”

뭔가를 두려워하듯 물은 블레이크가 그녀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날 독차지하고 싶다면 말이야.”

누군가를 탐낸다는 것. 그 욕망의 종착지가 이것이었나. 세상에서 가장 위태롭다는 믿음.

아직은 나를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던 사람. 이 사람은 또 무엇들을 숨기고 있을까? 내가 간직해온 운명의 저주처럼, 이 사람에게도 서러운 비밀이 있을까? 나의 비밀을 감춘 채 무턱대고 사령제에 참석해달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 같았겠구나.

그래도 결국 와준 사람. 운명에 맞설 용기를 내게 준 사람.

윤설은 사령제를 치른 어둑한 방을 떠올렸다. 그녀의 위태로운 나신을 감쌌던 코트를. 묵직한 온기에 밴 겨울 숲의 향기를. 그들이 다시는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진심 아닌 진심을.

처음 본 순간 이 사람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저렸던 것은, 어쩌면…….

멍울이 진 것 같은 가슴에서 저릿한 기운이 솟구쳐 왔다.

블레이크가 그녀의 젖은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눈물 머금은 네 눈이 좋아. 긴 겨울 끝에서 녹아내리는 눈을 닮았거든.”

윤설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블레이크의 깊은 눈동자에 다정함이 어렸다.

“내 정체가 뭐냐고 물었지. 아직도 모르겠어?”

윤설은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에 여기 왔다고 했잖아. 봄이 오면 너 하나만 보면서 살겠다고 했잖아.”

블레이크의 입술이 내려와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기윤설의 남자. 그게 내 정체잖아, 이 바보야.”

윤설은 눈을 내리감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것을 이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단단한 것이 되고 싶었다. 절대 녹지 않는, 이 사람만의 눈송이가 되고 싶었다.

아직 뜨거운 블레이크의 남성이 그녀 안에서 꿈틀했다. 가슴이 터질 듯했다. 몹시 행복하고, 몹시 두려웠다. 블레이크 윈터스. 이 아름다운 남자와 섞인다는 것이. 몸을 섞고, 마음을 섞고,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 그 안에 담긴 서로의 운명까지 섞는다는 것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그걸 영영 잃게 될 거야.”

할머니의 예언이 먼 바람처럼 쟁쟁댔을 때, 윤설은 생각했다. 블레이크가 그녀의 운명에 휘말린 것이 아니라 그녀가 블레이크의 운명에 휘말린 것 같다고. 서로를 향해 달려온 두 운명이 마침내 하나 되어버렸다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