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이제 그 어떤 것도 나를 그녀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그녀를 기다리고 찾아내서 따라갈 생각이다. 그녀를 찾아내서 맛보고, 삼킬 작정이었다.

날 때부터 손목에 박혀 있던 사슬 문양 때문에 왕세자의 수호기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디아나 리엔 블레스타크 공작영애. 그녀에게 왕세자 시스테일런은 세상 그 자체다.

맹목적인 디아나가, 시스테일런은 귀찮다. 어차피 디아나는 제 것인걸, 저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걸.

그러나 그런 방종과 오만이 디아나를 잃는 결과를 초래하고, 그제야 시스테일런은 제게 있어 디아나가 어떤 존재인지, 더불어 그들의 참혹하고 얽히고설켰던 전생까지 알게 된다.

그리고 전생에서도, 그리고 다시 나타난 디아나의 곁에도 있는 다른 사내, 그가 누구인지 시스테일런은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하?”

“예전처럼 불러, 주인님이라고.”

왜 대답이 없어? 어째서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거야!

“너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해. 넌 내 그림자야.”

“저하…….”

“틀렸어. 주인님이라니까! 너는 나한테 묶여 있어.”

2. 작가 소개

필명 : 추홍예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글 읽는 것은 더 좋아하는 초보글쟁이입니다.

저는 어떤 작가님 글을 보고 재미있으면 다음 작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믿고 보는데, 언젠가는 저도 독자님들께 그런 글쓴이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매일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출간작

크로스 더 라인

레일라

3. 차례

#돌아오다 (2)

#소문과 진실 (1)

#소문과 진실 (2)

#소문과 진실 (3)

#소문과 진실 (4)

#소문과 진실 (5)

#고백 (1)

#고백 (2)

#고백 (3)

#또 다른 고백, 그리고 대답 (1)

#또 다른 고백, 그리고 대답 (2)

#또 다른 고백, 그리고 대답 (3)

#다시, 시작

4. 미리 보기

방 안에는 시스테일런과 디아나 단둘만 있었다.

잠시 물러가 있으라는 왕세자의 말에 케인은 디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케인은 그제야 왕세자에게 묵례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속으로는 나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니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긴 할 것이다. 디아나가 원하면 케인은 본인의 기분이 어떻든 두말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준다.

시스테일런은 케인의 그런 모습이 불쾌했지만 딱히 흠을 잡기가 미묘했다. 어쨌든 그는 왕세자가 아닌 블레스타크 공녀를 호위하는 것이 일이었으니까. 아마 위험한 상황에서 왕세자를 내버려두진 않겠지만, 동시에 위협상황이 발생하면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대상은 디아나가 될 것이었다.

시스테일런의 시선이 디아나에게 고정되자 곧 케인에 대한 상념이 사라지고 그의 의식 또한 눈앞의 유일한 상대에게 고정되었다.

“앉아.”

시스테일런은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디아나는 항상 왕세자의 약간 뒤쪽에 시립하고 있거나, 대화를 나눌 때에도 옆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왕세자도 따로 앉으라는 말을 할 생각조차 못했고, 그녀 역시 서 있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디아나는 왕세자가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반문하는 대신 직접 빼준 의자에 시키는 대로 앉았다. 그녀는 시스테일런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을 딱히 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마주 보지도 않으며 가만히 있었다.

시스테일런은 오랜만에 디아나가 자신의 가까이에 있자 익숙한 그녀의 체취가 느껴진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전에는 ‘디아나의 체취’라는 것 자체를 아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2년이나 떨어져 있다가 이렇게 마주하게 되자 그동안 말라붙어 있던 그의 일부가 그녀의 향기를 벌컥벌컥 마시며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아니,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디아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느껴보고 싶어서.

디아나는 시스테일런의 손을 반사적으로 피했다. 아주 약간, 몸을 뒤로 뺐을 뿐이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시스테일런의 가슴을 사정없이, 아프게 때렸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디아나가 시스테일런을 피한 일은 없었다. 아주 어릴 때 빼고는 볼을 꼬집는다든지 이런 종류의 접촉을 한 적도 없었지만,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그녀가 부자연스럽게 피한 적은 없었다.

거부당했다. 시스테일런은 별것 아닌 사소한 행동에서 ‘거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손을 피했다는 것 때문에 그의 심장박동은 불규칙해질 정도로 타격을 받았는데, 디아나는 아무런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며 별 의미도 두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시스테일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멍하니 있다가 얼굴로 손이 올라오니까 그냥 피한 거야. 그냥 의미 없는 행동이야.

어쩐지 입을 떼기 어려웠던 시스테일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우 말을 꺼냈다.

“……왜 날 먼저 찾아오지 않았지?”

이런 젠장.

드디어 돌아와서 기쁘다는 말을 먼저 하려고 했는데, 전처럼 디아나의 탓으로 말문을 열어버렸다. 디아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 말은 그것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순하고 차분하다.

“죄송합니다, 저하.”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고개 들어.”

시스테일런을 마주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그저 깨끗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느낌.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 아니, 이게 아니야.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심호흡을 했다. 자꾸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던 시절처럼 굴면 안 된다. 시스테일런과 디아나의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운명이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난 변했어. 디아나에게 잘해줄 거야. 나로 인해 웃는 모습을 볼 거야. 우린 인장으로 묶여 영원히 함께할 거니까. 죽으면 이다음의 생도 함께하게 될 거야.

“디아나.”

“예, 저하.”

“잘 돌아왔어.”

“감사합니다.”

……뭔가 이상하다. 전혀 만족스럽지가 않다. 상상하던 재회의 장면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분명 디아나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던 만큼의 충만한 감정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숨기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스테일런이 원하는 종류의 감정은 전혀 가지지 않은 듯한 느낌이다.

문득 떠오른 사실이 시스테일런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또 말문이 막힌다.

그는 꿈을 통해 그들의 전생의 인연까지 알고, 디아나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달았다. 그게 사랑, 소유욕 그 어떤 쪽이든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격렬한 감정이었고 연화뿐만 아니라 시스테일런 또한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감정이다.

그런데 디아나는?

인장이라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구속력 때문에 디아나가 시스테일런에게 가진 감정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의문을 가져본 적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디아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시스테일런의 것이었다. 그의 수호기사고 그림자였다. 이미 시스테일런에게 속한 제 사람이었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희경이 연화를 아끼는 몸종으로만 여긴 것처럼, 디아나도 왕세자인 그에게 충성하는 것뿐이라면? 연화가 희경을 홀로 원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스테일런 혼자만의 감정을 밀어붙이는 것이라면…….

생전 처음으로 머뭇거리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욕구와 서로 다른 감정을 가져서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충돌했다.

디아나는 오랜만에 만난 왕세자가 전과 달리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엔 시스테일런의 감정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냈으니까. 지금 왕세자의 눈빛은 뭔가 달랐다. 뭐가 다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침묵이 부담스러웠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하?”

본인만의 상념에 잠겨 있던 시스테일런은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을 늦게 알아차렸다. 호칭이 달라졌다. 단둘이 있을 때는 항상 주인님이라고 부르던 디아나가 계속 그를 ‘저하’라고 불렀다.

그래, 그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위화감을 주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전처럼 불러, 주인님이라고.”

“…….”

시스테일런이 착각한 게 아니다. 디아나가 시선을 비꼈다.

왜 대답이 없어? 어째서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거야!

“너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해. 넌 내 그림자야.”

“저하…….”

디아나가 자꾸 저하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대체 왜 그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마치 흑월문 소문주가 사창가로 팔려가던 그를 처음 봤을 때의 눈빛과 흡사하다. 이상한 공포심이 냉기를 타고 올라온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눈빛은 견디기 힘들었다.

“틀렸어. 주인님이라니까! 너는 나한테 묶여 있어. 너는…… 너는……!”

디아나가 왼쪽 손을 내밀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뒤집었다. 황금빛 사슬 문양이 있는 손목이 시스테일런의 눈에 박혔다. 사슬의 한가운데에 선명하게 금이 가 있다.

인장이 망가진 것이다.

사슬이 쪼개지다니…… 인장이 망가져?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 없어!

“안아줘. 나 힘이 없어서 움직이질 못하겠어.”

“읏챠.”

“안아줘요.”

“안고 있어.”

“이거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