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가 서있는 무대는 다르다.
그가 다쳐도,
그녀가 실수해도,
끼어들어 구해줄 수도, 대신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서로를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우리이지만……더 높은 곳을 향해
서로를 이끄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
우리가 만난 건, 숙명이니까.

사람들은 그를 신(神)이라 부른다.

마치 하늘에서 신이 내려와 축구를 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남자.
신과 같은 능력으로 그라운드를 휩쓴 별 중의 별, 레전드 중의 레전드.
세기의 축구스타, 헨리 루이즈.

맨 앞에서 돌격하는 공격수보다 경기 자체를 진두지휘하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잘 어울리는 남자. 그러나 자타가 공인하는 프리롤(Free Role 자신의 포지션과 관계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의 에이스.
최고의 미들 스트라이커(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를 겸하는 별명).
맨유의 사령관은 오늘도 종횡무진 필드를 지배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촉망받던 피아노의 신동, 건반의 천재. 한이현.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완벽하지 못한 천재란 걸.
수재(秀才)보다는 넘치지만 완전한 천재라고는 할 수 없는 1% 부족한 천재.
부족한 1%의 벽을 넘기 위해 필사적이며 현재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이네쉬 안나 옐치나를 사사하던 그녀는 이제 피아노 건반조차 누르지 않는다.

축구밖에 모르던 남자와 마음을 닫아 버린 여자의 이야기.
음악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남자와 축구에는 일절 관심 없는 여자의 마주 보기.
사랑은 때로 프레스토 콘 푸오코(presto con fuoco : 정열을 가지고 아주 빠르게),
때로는 칼란도(calando : 점점 느리고 점점 여리게),
또 때로는 콘 포르자(con forza : 전력을 다해서).


-본문 중에서-

“그럼 내가 문제 하나 낼게.”
“네.”
“문제. 헨리 루이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어떤 포지션일까?”
“…….”
“일 번, 미드필더. 이 번, 공격수, 삼 번, 수비수, 사 번, 골키퍼.”
이현의 얼굴이 애매하게 변했다. 축구에 대해서는 정말 거의 아는 게 없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선이 전부였던 그녀가 그가 팀에서 어떤 역할인지 정도의 고난이도 문제를 알 리가 없었다.
헨리는 개었다 흐렸다 하는 난처한 얼굴을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다 빨리 대답하라며 재촉했다.
“몰라?”
축구 외에 적극적인 헨리 루이즈. 스스로도 상상해 본 적 없을 만큼 그는 무심함을 천성처럼 즐기는 남자였다. 그런데 한 팀에서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내온 사람들 틈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현이 혼자일까 봐 여기까지 쫓아와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문제를 내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게 다 그날, 사람들 눈을 피해 그녀가 도망을 쳐야했던 날, 갈 곳 없는 아이처럼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그때 때문이다. 왜 그렇게 막막해 보이던지.
그 뒤에 같이 도망가던 일도 즐거웠던 기억으로 남았지만 그의 뇌리에는 넋 놓고 있던 이현의 모습이 쉽게 떠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물기가 차오를 것 같던 눈망울이 잊히지가 않는다. 반갑지도 않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이후로 이현을 못 본 척,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던 것 또한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다. 아, 이런 기분, 정말 복잡했다.
“……오 번. 코치?”
눈썹을 꿈틀하는 그의 반응을 보자 이현은 조개처럼 입술을 꽉 다물었다. 맹세코 장난으로 대답한 것이었지만 솔직히 답을 모르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할 말을 잃은 건 그녀뿐이 아니었다. 장난으로 포지션에 대해 문제랍시고 냈지만 헨리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코웃음 쳤다.
코치, 세상에 코치란다.
이내 소리 내서 웃기 시작하자 그녀가 도록도록 눈동자를 굴리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자신을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게 봤다는 건지, 일부러 그렇게 대답한 건지, 아니면 정말 코치인 줄 안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답 하나는 제법 재치 있었다.
“보통 모르면 무조건 일 번 아닌가? 뭐, 코치?”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웃어 버렸다. 이현은 입술을 오물조물 달싹였다.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수습이 안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헨리는 그녀의 코를 살짝 건드리고는 조금 나무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공부 좀 해라. 관심 좀 갖던지. 아직 코치할 나이는 아니거든.”
“그건 그냥 장난으로……아, 이 번, 공격수?”
모르면 무조건 일 번이라니까.
그는 답을 말해 주려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면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게 실감 안 난다던 하선의 포지션은 알고 있을까?
“너 썬 포지션은 알아?”
“네! 알아요. 미드필더.”
자신 있게 대답하는 모양새를 보자니 조금씩 심란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현에게 하선은 진짜 닿기 어려운 우상 쯤 되는 모양이긴 한데……이 께름칙한 기분은 대체 뭘까. 하선은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더 특별하게 좋아해서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름 세계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자부했던 헨리 루이즈는 정말로, 진짜로 모르는 걸까? 이, 나를?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에게 이현이 되물었다.
“근데 왜 답을 안 해요.”
딱히 다시 대답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포지션쯤은 알고 있겠지 생각했던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제 입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이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본 역사가 없는 답을 해야 했다.
그는 또랑또랑한 눈동자에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눈높이에 키를 맞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정답. 미들라이커(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를 겸할 만큼 뛰어난 선수에게 붙이는 별명).”
“그건……보기에 없었잖아요.”
지나쳐 가려던 그의 몸이 홱 돌아섰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는 이현의 반응에 헨리는 정말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친구 하라고 한 거, 잘한 거 맞는 거겠지?
“나 코치 아냐.”
“알아요. 그건 진짜 장난이었다니까요. 알았어요, 오 번. 미들라이커. 기억해 둘게요.”
웃으며 대답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뭘 몰라도 정말 한참 모르거나 아니면, 진짜 못 말릴 강적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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