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저희 둘 궁합은 저희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이만 자리를 비켜 주십시오.”
원진의 낮은 음성이 바다에 가라앉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쉽게 입을 안 여는 피의자에게서 자백을 받아 내는 것처럼 목을 조이는 압박감이 실렸다. 망막이 마르도록 눈 가장자리에 바짝 힘을 준 원진을 치윤이 훑어보았다. 거부의 싹을 자르는 단호한 원진의 기운에 그가 손을 들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양숙아.”
“원진이는 저한테 해코지 같은 거 못해요, 오빠. 그건 믿으세요.”
치윤이 다정한 오빠 행세를 잘했다. 마치 보디가드처럼 양숙에게 당부를 하자 그녀가 드디어 얼굴을 들었다. 사기인형을 연상시키는 차가운 그녀의 입매가 살짝 풀어졌다.
양숙은 빛과 같은 속도로 원진을 보고 치윤에게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눈동자의 광채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가 너무 둔했다. 치윤이 원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언제부터 양숙이와 가까운 사이가 된 거야.
그가 하는 행동 모두가 의미심장한 뜻이 있었다. 치윤은 정식으로 양숙의 보호자로 나선 것이다. 그녀의 고백을 듣기 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원진이 치윤을 탐색하면서 천천히 손을 잡았다 놓았다. 치윤이 이제 와서 양숙이의 오빠 노릇을 하겠다면 그도 무시할 수는 없는 관계가 된다. 어쨌든 양숙이는 원진의 베스트프렌드이니까.
“그래. 네 말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알았어. 고원진, 양숙이에게도 말했지만 난 타인의 인생에 관심 없어. 앞가림도 못하는 인간을 내가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런데 자네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까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마디만 하고 갈게. 자네, 다른 동성 친구들도 양숙이처럼 대하나?”
“아니요.”
“다른 이성 친구는? 수시로 전화하고 만나는 이성 친구는?”
원진은 치윤의 질문을 귓등으로 들으며 시선은 양숙에게 붙어서 안달을 냈다. 돌아봐라. 돌아봐라. 그녀 얼굴이 보고 싶었다. 큰 부탁도 아니건만, 양숙은 아주 매정했다. 힘이 풀린 원진의 목소리가 잠겼다.
“가까이 둔 이성은 양숙이뿐입니다.”
“교륜은? 양숙이만큼 교륜과도 오래된 친구라고 들었어. 교륜이 더 위험한 일을 할 텐데 거기도 걱정하느라 잠을 못 자나?”
“어린애도 아닌 성인을 뭐 하러 걱정합니까? 맷집으로 따지면 교륜이 저보다 훨씬 셉니다.”
맷집만 센가. 교륜은 형사 시리즈에 나오는 배우처럼 죽어라 고생을 하고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강력사건 터지면 진압 때 선봉장이고, 직접 검거해 잡아넣은 놈들 천지라 사방이 겹겹이 적이다. 장인 될 분도 교륜을 죽이겠다고 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재벌가 친정을 둔 마누라는 납치되어 생이별도 했지만 결국 FBI가 돼서 돌아오고, 몸에 총구멍이 치즈처럼 슝슝 뚫리고…… 악운에도 역시 강해서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녀석이다. 걱정은 안 된다.
그에 비해 자신은 머리가 좀 좋고 총 잘 쏘고 배짱 좋은 것만 빼면 여느 형사들과 비슷하다. 평범한 대한민국 경찰이다. 그러니 시끄럽지 않게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다.
“자넨 이미 양숙이를 사랑하고 있어. 그 어떤 남자도 그냥 친구에게 자네처럼 유난을 떨지 않아.”
“그건……!”

김민

사랑이야기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 업이 돼버림.
글을 쓰는 것보다 읽는 것이 더 좋은 활자중독자.
최후까지 글을 쓸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생각함.

한국로맨스소설작가협회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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