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엄청난 빚더미에 허우적거리는 암담한 현실에서도 착하기만 한 약혼자가 있어서 그래도 숨을 쉬며 살고 있는 그녀, 아시아. 점차 쌓여만 가는 빚더미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녀는 제 자신을 팔기 위해 나선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십년 전, 자신을 창부쯤으로 치부하고 쫓아낸 첫사랑이 나타난다.

언론, 영화 제작·배급, 금융, 보험, 명문 축구클럽 구단주, 광고·홍보회사까지 이탈리아의 재력가이자 가르코 가문의 수장인 로사노 가르코.
항시 그의 자리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로 인해 용서를 모르는 냉혹한 성격이 되어버린다. 아시아와의 만남 자체가 실수였다. 그는 십년 동안 그리 굳게 믿어왔었다. 하지만 그녀가 약혼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앉아서 축하를 해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전에 그는 아시아의 앞에 나타난다.

작품 소개용도의 본문발췌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탈리아어에 흠칫 놀란 아시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아니, 철저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이탈리아어를 한국 땅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아시아는 말없이 서 있던 남자와 나이든 노신사가 함께 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살기 위해 잊어야만 했었다.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제 자신과 험난한 싸움을 한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설마…… 아닐 것이다.’
아시아는 애써 불안한 걱정을 지워버리기 위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탈리아어만 듣고서도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자신을 보면 아무래도 십년이란 세월도 부질없었던 모양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시아는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소파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았다.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 이탈리아…….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준 그 사람…….
아시아는 강렬한 검은 눈빛이 그녀의 뇌리 속에 스쳐 지나가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처음부터 비켜나간 인연이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도 만나서도 안 되는 그 남자를 이제는 지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수십 번도 되새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뇌리 속에 각인 될 뿐이었다. 열두 시간이 넘는 머나먼 곳에서 살고 있는 그 남자의 기억 속에 동양인 여자 따윈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는 오래 전에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 남자를 생각하는 제 자신이 한심스러운 듯 그녀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물들었다.
[오랜만이야, 아시아. 아니지, 우리가 안부를 물어볼 사이는 아닌 것 같군.]
아시아는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어버리기는커녕 또렷이 뇌리 속에 박혀 있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가까스로 벌리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사노…….]
꿈은 아닐까? 이제는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시아는 갑자기 아찔해지면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는 어떻게든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저도 모르게 꽉 깨물었다. 이런 곳에서 그를 다시 만나리라고는 꿈엔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아니,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곳이 아닌 이탈리아였다.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서 그의 얼굴을 편안히 볼 수 있는 나이가 될 때 말이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그에게 받았던 수치와 모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날 기억하고 있어주다니,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로사노는 창백한 아시아의 얼굴을 훑어보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녀의 심장에 사정없이 박혔다.
[당신이 왜 이곳에…….]
이곳에 왜 당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들려오는 로사노의 코웃음에 아시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괜히 순진한 얼굴로 모르는 척 하지 말라고. 나도 네 약혼자처럼 아무것도 몰랐다면 네 순진한 얼굴에 아직까지도 속고 있었을 테니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아시아는 로사노의 한 마디, 한 미다가 그저 어리둥절했다. 그의 말뜻에 담긴 숨은 의도 또한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약혼자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까지 몸을 팔고 다닐 정도로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을 테고 단순히 즐기기 위함 인가?]
[뭐, 뭐라고요?]
아시아는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를 느끼며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한국으로 당장 떠나라고 소리를 치던 남자가 십년 만에 다시 나타나 모욕을 주는 이 상황을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이 처음부터 이런 여자인줄 처음부터 알았다면 널 쉽사리 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쉽군. 아니지. 아마 처음부터 알았다면 네 목을 비틀어 버렸겠지.]
아시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당당히 로사노 앞에 섰다. 마른 침을 삼키고서야 그녀는 가까스로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찾아온 것 같군요. 그만 가봐야겠어요.]
이곳으로 들어왔던 문으로 향하던 아시아의 발걸음은 한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멈춰야만 했다.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내가 네 사용주라는 사실을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아시아는 몸을 홱 돌려 차디찬 검은 눈동자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로사노의 조용한 한마디가 아시아에게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랬다. 그녀는 잠시 동안 잊고 있었다. 처음 로사노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말이다. 에이전시에서 통장으로 계약금을 받는 순간부터 로사노는 그녀의 사용주였다. 그리고 계약금은 일원도 남지 않고 고스란히 카드 회사와 사채회사에 지불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과 달리 냉혹한 현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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