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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인연

비누맘 지음로망띠끄201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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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녀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나에게 돌진했다. 그 소녀는 내 팔 하나를 부러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13살 소년의 심장을 가져갔다. 15년이 흐른 뒤, 소년이었던 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심장이 없는 어른이었다. 어느 날, 다 큰 여자 하나가 고물 자전거를 타고 나에게 돌진했다. 두 번이나 나에게 돌진한 그 여자는 자신이 소녀였을 때 가져갔던 내 심장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소녀였던 그 여자를 내 인연이라 부르기로 했다.
어느 날 소년 하나가 내 인생에 들어왔다. 딱지치기 구슬치기가 좋았던 나는 난생처음 새끼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였다. 그렇게 내 가슴을 핑크빛으로 물들여 놓고 어느 날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던 소년은 15년 만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내 손톱 끝엔 소년을 생각하며 들인 꽃물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소년이었던 남자를 내 인연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본문 증에서】
8월의 한더위에 온 몸은 땀에 절고 지칠 대로 지쳐 나무 그늘에라도 들어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수마저 떨어졌다. 난감함에 미소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미소는 이장 아저씨께 낡은 자전거 한 대를 빌려 부둣가로 향했다. 뒷바퀴에 바람이 살짝 빠지고 녹이 슬어 뻑뻑한 자전거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부두까지는 무난히 갔으나 생수를 두통이나 실었더니 몸이 자전거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자꾸만 눈으로 들어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고 다리는 점점 힘이 풀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스스로를 독려해 가며 한발 두발 자전거의 페달을 돌려 미소는 겨우 오르막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완만한 경사라 해도 내리막길은 조심해야 했다. 미소는 잔뜩 힘을 주던 다리에 힘을 푸는 대신 브레이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순간 달칵거리며 브레이크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미소는 브레이크를 더욱 힘껏 잡았지만 가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통제 불능인 체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삼십여 미터 앞, 웬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등을 지고 있는 남자는 미소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저 남자를 피해가야 했지만 이미 자전거는 제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늦었다.
“비, 비, 비켜요!”
남자가 돌아보는가 싶었고 미소는 돌진하는 자전거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쿵 소리와 함께 자전거는 길가 나무를 들이받고 도로 아래 낮은 해안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쿵쾅 자전거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미소는 남자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남자가 자신을 받아준 것인지 그녀가 살아보겠다고 남자를 붙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픔이 덜 한 것으로 보아 딱딱한 아스팔트가 아닌 남자의 가슴 위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남자의 가슴근육에 얼굴을 폭 묻은 미소는 그에게서 나는 땀 냄새와 옅은 스킨 향을 저도 모르게 깊이 호흡했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보다 폐부 깊숙이 전해지는 남자의 체취가 더욱 강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단단한 팔로 미소의 등을 휘감고 다른 팔 하나로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밀착이 주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남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이제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낮게 투덜대는 남자의 목소리에 미소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미소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옆으로 비켜나 앉았다.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숱 많은 눈썹과 날렵하게 솟은 콧날이 살짝 드러났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미소는 머뭇거렸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의 원인을 더듬느라 바닥에 앉아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는 얼른 눈길을 내리며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이 남자 목소리도 괜찮다.
“아, 네 괜찮아요. 괜찮고말고요.”
미소는 마법에 걸린 듯 웅얼거렸다.
“자전거 말이에요.”
“자전거?”
“저 아래로 떨어지던데?”
남자의 손가락이 절벽을 가리키자 미소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아, 맞다. 생수!”
미소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 4미터 아래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형편없이 찌그러진 자전거와 널려있는 생수병들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생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낭패감과 함께 짜증이 밀려왔다.
“아이 정말. 저 아까운 걸! 얼마나 힘들게 가져왔는데……. 어떡해요? 그러게 아저씨는 왜 길 한가운데 서 있어서….”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들며 미소가 원망하듯 따져 물었고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던 남자가 어이없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쏘아보았다. 몇 초인가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고 잠시 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매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진성은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을 노려보는 미소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쪽 이야기군요.”
“뭐라구요? 제가 언제?”
지금껏 남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미소의 눈에 아차 하는 후회가 서렸다.
“아! 맞다. 맞아요. 제 잘못이죠. 생수가 너무 아까워서…….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그만 못쓰게 돼버려서 저도 모르게……. 미안합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던 것도 잊고 금세 풀이 죽은 미소를 보며 진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억을 못한다. 자신은 한눈에 알아보았는데 역시 이 여자는 둔하기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게다가 어수룩한 것 같으면서도 앞뒤 안 가리고 욱하는 성격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그의 입장에서 어쩌면 다행한 일인데 묘하게 서운해 진성은 얼른 부둣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시죠.”
“네? 어딜요?”
“생수 가지러 말입니다. 다리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요?”
미소는 그제야 반바지 아래 드러난 제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진성은 괜찮다며 사양하는 미소를 의료 자원봉사 팀이 있는 막사로 데리고 갔다.
“아야… 아야….아파요.”
“참아요. 엄살은…….”
꿰맬 정도로 찢어진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다친 면적이 넓었다. 간호사 하나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진성은 아무 말 없이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댄 뒤 반창고를 붙였다. 아프다는 생각도 잠시, 미소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다친 무릎을 치료해주는 남자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손길이 닿는 부분이 간지럽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야릇한 기분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
치료가 끝나자 황급히 인사를 건넨 미소는 의료 봉사 팀의 막사 옆에 마련된 자원 봉사 팀 막사로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부두에 세워진 트럭을 잡아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자신이 생필품을 나눠주던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차에 오른 미소는 두근거리는 심장 위로 가만 손을 대어보았다.
“미쳤나봐. 내가 미쳐가는 게 틀림없어. 남자를 너무 오래 참다보니 금단현상이 생긴 건가?”
왠지 낯설지 않은 눈빛의 남자가 자신을 꿰뚫을 듯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었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살짝 살짝 무릎을 스칠 때마다 목 뒤부터 짜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비디오의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 남자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이 정지하는 느낌이었고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나 않을까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거침없지만 유연한 그 남자의 손길이 다친 무릎 위를 떠나자 미소는 다치지 않은 오른쪽 무릎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쉬움을 느꼈다.
28살. 옛날 같으면 애를 셋은 낳았을 적지 않은 나이에 이런 소녀 같은 감성이라니! 더군다나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마을 회관으로 되돌아온 미소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여전히 그 낯선 남자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간호사들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으로 보아 의료팀과 함께 온 자원 봉사자임에 틀림없는데…….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섬에서 격포항으로 가는 마지막 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그 남자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느낌에 미소는 생수병을 동료에게 맡긴 채 부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미 봉사를 마치고 섬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친 몸은 그녀의 의지만큼 빨리 움직여주지 않았고 몇 번을 자리에 멈춰 숨을 몰아쉬고는 또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의료봉사 팀의 미니버스가 철선 위에 실린 채 막 뭍을 떠나고 있었고 미소는 숨을 몰아쉬며 그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헛구역질이 나와 미소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무함과 함께 왼쪽 무릎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사물이 부옇게 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물이 고여 왔고 미소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15년 전 진성이 말없이 떠났을 때 미소는 그 아이가 한번쯤은 자기를 찾아올 거라 믿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진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이전엔 슬픔과 자책에 빠진 아버지 정운을 위해, 저만 보면 불쌍하다며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는 고모를 위해 억지로 웃어왔다면 미소가 온전히 스스로를 위해 웃게 된 것은 모두 진성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 빼고는 늘 붙어있으면서 잠시라도 안보이면 진성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미소의 하루는 오롯이 진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별장이 팔렸다는 말을 낯선 사람들에게 듣고 언덕길을 내려오던 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 뒤로도 얼마나 오랜 시간 진성을 기다리며 지내왔던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진성을 생각하는 횟수는 줄어갔지만 그래도 그 기억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았다. 진성이 좋아했던 노래, 음식, 색깔 등을 보면 무시로 그 아이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그 아이를 닮은 남자. 왠지 익숙한 얼굴, 낯설지 않은 그 눈빛. 이젠 잊힐 때도 됐는데 갑작스런 이별은 진성의 환영을 차마 가져가지 못한 것 같았다.
어느 날 소년 하나가 내 인생에 들어왔다. 딱지치기 구슬치기가 좋았던 나는 난생처음 새끼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였다. 그렇게 내 가슴을 핑크빛으로 물들여 놓고 어느 날 갑자기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던 소년은 15년 만에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내 손톱 끝엔 소년을 생각하며 들인 꽃물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때 소년이었던 남자를 내 인연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본문 증에서】
8월의 한더위에 온 몸은 땀에 절고 지칠 대로 지쳐 나무 그늘에라도 들어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끝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생수마저 떨어졌다. 난감함에 미소는 허리에 손을 얹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몰려드는데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미소는 이장 아저씨께 낡은 자전거 한 대를 빌려 부둣가로 향했다. 뒷바퀴에 바람이 살짝 빠지고 녹이 슬어 뻑뻑한 자전거였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부두까지는 무난히 갔으나 생수를 두통이나 실었더니 몸이 자전거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이 자꾸만 눈으로 들어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고 다리는 점점 힘이 풀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스스로를 독려해 가며 한발 두발 자전거의 페달을 돌려 미소는 겨우 오르막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완만한 경사라 해도 내리막길은 조심해야 했다. 미소는 잔뜩 힘을 주던 다리에 힘을 푸는 대신 브레이크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순간 달칵거리며 브레이크가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미소는 브레이크를 더욱 힘껏 잡았지만 가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통제 불능인 체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삼십여 미터 앞, 웬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등을 지고 있는 남자는 미소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저 남자를 피해가야 했지만 이미 자전거는 제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늦었다.
“비, 비, 비켜요!”
남자가 돌아보는가 싶었고 미소는 돌진하는 자전거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쿵 소리와 함께 자전거는 길가 나무를 들이받고 도로 아래 낮은 해안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쿵쾅 자전거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울리고 미소는 남자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남자가 자신을 받아준 것인지 그녀가 살아보겠다고 남자를 붙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픔이 덜 한 것으로 보아 딱딱한 아스팔트가 아닌 남자의 가슴 위로 떨어진 것이 분명했다. 남자의 가슴근육에 얼굴을 폭 묻은 미소는 그에게서 나는 땀 냄새와 옅은 스킨 향을 저도 모르게 깊이 호흡했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보다 폐부 깊숙이 전해지는 남자의 체취가 더욱 강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단단한 팔로 미소의 등을 휘감고 다른 팔 하나로는 그녀의 머리를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밀착이 주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 것도 잠시 남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이제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낮게 투덜대는 남자의 목소리에 미소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미소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옆으로 비켜나 앉았다.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숱 많은 눈썹과 날렵하게 솟은 콧날이 살짝 드러났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미소는 머뭇거렸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의 원인을 더듬느라 바닥에 앉아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는 얼른 눈길을 내리며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이 남자 목소리도 괜찮다.
“아, 네 괜찮아요. 괜찮고말고요.”
미소는 마법에 걸린 듯 웅얼거렸다.
“자전거 말이에요.”
“자전거?”
“저 아래로 떨어지던데?”
남자의 손가락이 절벽을 가리키자 미소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아, 맞다. 생수!”
미소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 4미터 아래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형편없이 찌그러진 자전거와 널려있는 생수병들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생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낭패감과 함께 짜증이 밀려왔다.
“아이 정말. 저 아까운 걸! 얼마나 힘들게 가져왔는데……. 어떡해요? 그러게 아저씨는 왜 길 한가운데 서 있어서….”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치켜들며 미소가 원망하듯 따져 물었고 옷에 묻은 흙을 툭툭 털던 남자가 어이없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쏘아보았다. 몇 초인가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고 잠시 뒤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입매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진성은 허리에 손을 얹고 자신을 노려보는 미소를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쪽 이야기군요.”
“뭐라구요? 제가 언제?”
지금껏 남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미소의 눈에 아차 하는 후회가 서렸다.
“아! 맞다. 맞아요. 제 잘못이죠. 생수가 너무 아까워서…….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그만 못쓰게 돼버려서 저도 모르게……. 미안합니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던 것도 잊고 금세 풀이 죽은 미소를 보며 진성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억을 못한다. 자신은 한눈에 알아보았는데 역시 이 여자는 둔하기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게다가 어수룩한 것 같으면서도 앞뒤 안 가리고 욱하는 성격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그의 입장에서 어쩌면 다행한 일인데 묘하게 서운해 진성은 얼른 부둣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시죠.”
“네? 어딜요?”
“생수 가지러 말입니다. 다리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요?”
미소는 그제야 반바지 아래 드러난 제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진성은 괜찮다며 사양하는 미소를 의료 자원봉사 팀이 있는 막사로 데리고 갔다.
“아야… 아야….아파요.”
“참아요. 엄살은…….”
꿰맬 정도로 찢어진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다친 면적이 넓었다. 간호사 하나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지만 진성은 아무 말 없이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댄 뒤 반창고를 붙였다. 아프다는 생각도 잠시, 미소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다친 무릎을 치료해주는 남자의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손길이 닿는 부분이 간지럽다는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야릇한 기분에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
치료가 끝나자 황급히 인사를 건넨 미소는 의료 봉사 팀의 막사 옆에 마련된 자원 봉사 팀 막사로 절룩거리며 걸어갔다. 그리고 부두에 세워진 트럭을 잡아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자신이 생필품을 나눠주던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차에 오른 미소는 두근거리는 심장 위로 가만 손을 대어보았다.
“미쳤나봐. 내가 미쳐가는 게 틀림없어. 남자를 너무 오래 참다보니 금단현상이 생긴 건가?”
왠지 낯설지 않은 눈빛의 남자가 자신을 꿰뚫을 듯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었다. 상처를 치료해주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살짝 살짝 무릎을 스칠 때마다 목 뒤부터 짜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비디오의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 남자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물이 정지하는 느낌이었고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그의 귀에 들리지나 않을까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거침없지만 유연한 그 남자의 손길이 다친 무릎 위를 떠나자 미소는 다치지 않은 오른쪽 무릎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쉬움을 느꼈다.
28살. 옛날 같으면 애를 셋은 낳았을 적지 않은 나이에 이런 소녀 같은 감성이라니! 더군다나 오늘 처음 본 남자에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의 자신답지 않았다. 마을 회관으로 되돌아온 미소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여전히 그 낯선 남자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간호사들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 것으로 보아 의료팀과 함께 온 자원 봉사자임에 틀림없는데…….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섬에서 격포항으로 가는 마지막 배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그 남자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느낌에 미소는 생수병을 동료에게 맡긴 채 부두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미 봉사를 마치고 섬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친 몸은 그녀의 의지만큼 빨리 움직여주지 않았고 몇 번을 자리에 멈춰 숨을 몰아쉬고는 또다시 뛰기를 반복했다.
의료봉사 팀의 미니버스가 철선 위에 실린 채 막 뭍을 떠나고 있었고 미소는 숨을 몰아쉬며 그 모습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헛구역질이 나와 미소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허무함과 함께 왼쪽 무릎의 상처가 욱신거리며 아파왔다. 사물이 부옇게 흐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물이 고여 왔고 미소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15년 전 진성이 말없이 떠났을 때 미소는 그 아이가 한번쯤은 자기를 찾아올 거라 믿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진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이전엔 슬픔과 자책에 빠진 아버지 정운을 위해, 저만 보면 불쌍하다며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는 고모를 위해 억지로 웃어왔다면 미소가 온전히 스스로를 위해 웃게 된 것은 모두 진성 때문이었다. 잠을 잘 때 빼고는 늘 붙어있으면서 잠시라도 안보이면 진성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미소의 하루는 오롯이 진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별장이 팔렸다는 말을 낯선 사람들에게 듣고 언덕길을 내려오던 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 뒤로도 얼마나 오랜 시간 진성을 기다리며 지내왔던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진성을 생각하는 횟수는 줄어갔지만 그래도 그 기억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이 작용했던 것 같았다. 진성이 좋아했던 노래, 음식, 색깔 등을 보면 무시로 그 아이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그 아이를 닮은 남자. 왠지 익숙한 얼굴, 낯설지 않은 그 눈빛. 이젠 잊힐 때도 됐는데 갑작스런 이별은 진성의 환영을 차마 가져가지 못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