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을 코앞에 둔 승연 앞에 나타난 첫사랑 아니 짝사랑 진환 선배.
블랙커피처럼 쓰디 쓴 맛만 안겨줬던 그가 밀크커피처럼 부드러워졌다.
승연은 달달해진 그를 보며 가슴을 설레는데,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던 동성친구 보다 더 친한 친구 ‘진수’가 수상하다.
그가 진한 수컷 냄새를 풍기며 승연에게 자꾸만 다가오고 있다.



[본문 중에서]

“그러니까 오늘 우리 회사에서 네 첫사랑을 만났다는 거냐?”
진수가 내가 깐 땅콩을 덥석 집어 입 안에 탁 털어 넣었다.
“응.”
“근데 그 인간은 핸드폰 번호도 안 주고 그냥 사라졌다고?”
“그렇다니까.”
난 500cc 잔을 들이켰다. 그 인간이 나를 또 술을 먹게 만들었다. 이게 뭐냐?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진짜 첫사랑 맞아?”
“맞다니까. 내가 그 인간 때문에 대학 1학년부터 2학년까지 폐인 되어 살았잖냐.”
“그게 아니고, 내 말은 진짜 첫사랑 맞냐구.”
진수는 내 손에 들려진 맥주잔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십 년 만에 나타난 첫사랑 때문에 금주 결심한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내 혈관에 알코올이 흐르다니.
“왜 그래? 첫사랑 맞다니까. 내가 좀 순진해서 고딩까지는 남자를 몰랐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랑 같이 잔 첫 남자란 말이지?”
진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눈을 들여다봤다.
“무슨 소리야? 세상에 첫사랑이랑 꼭 하란 법 있냐?”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그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물론 너에게도.”
진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넥타이 매듭을 당겨 목덜미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저 녀석, 아니 남자들의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는 걸까? 오로지 허리 아래, 그 생각 밖에는 없는 게 아닐까?

입사 동기 중 유일한 군 미필이었던 진수는 남자 동기 중 가장 어렸고, 동갑이었던 나와 군 미필이라는 공통점으로 친해졌다. 우리는 정말 잘 맞아서 가끔은 그가 고추 달린 남자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여직원들로부터 인기 좋은 그와 친한 덕분에 그의 끊임없는 바람기로 상처 받는 여직원들은 하나같이 나를 찾아와 그와의 연애 상담을 했고, 나는 그녀석의 단점을 일일이 열거하며 그녀들을 단념시키는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게 귀찮다는 점만 빼고는 그는 동성친구 같은 완벽한 이성 친구였다.
그러나 이런 주제로 빠지는 경우에는 그가 남자임을 극렬하게 보여줬다. 우리 둘 사이에 의견이 다른 유일한 주제였다.
“이럴 땐 너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수컷냄새 풍기더라. 꼭 해야 사랑이냐? 그건 사랑을 하면 따라오는 부수적인 거야. 음식으로 말하자면 더욱 맛있게 만드는 양념이라고나 해야 할까?”
“오우, 노우! 그렇지 않아. 넌 정말 섹스의 참된 맛을 아직 못 봐서 그래.”
“이런 밝히는 놈 같으니……. 정신적 교류와 감정이 더 중요하지, 그깟 섹스가 더 중요하냐?”
“그깟 섹스? 그렇지, 원래 이 주제는 예로부터 여자와 남자의 고전적인 토론 주제였지. 하지만 난 그렇다. 같이 자보지 않았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잘 맞고,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면서 서로 아끼지만 사랑이 아니라 우정인거지.”
“놀고 있네. 이런 짐승 같은 놈. 그럼 룸살롱이나 그 거시기한 동네에서 한 번씩 몸 푸는 김 차장 같은 인간들은 매번 사랑에 빠진 거냐? 에이, 입에 올리기도 더럽네.”
“그건 또 다르지, 넌 보약 하고 불량 식품하고 밥 하고 간식 하고 같아?”
“그게 먹는 거랑 같아?”
“먹는 거에 비유한 건 네가 먼저였어.”
말로는 절대 지지 않는 녀석.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문어체를 구사하던 녀석에게 자연스러운 한국말 가르쳐 놨더니 이제는 스승을 찜 쪄 먹는다. 나는 분해서 씩씩거렸다. 보는 놈마다 내 비위를 건드리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주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그럼 넌 고딩 때 옆집 누나 좋아했다며. 그건 사랑 아니야?”
“그건 그냥 짝사랑이지, 첫사랑은 아니지. 내 첫사랑은 대학 신입 때 선배 누나지. 왜냐? 좋아했고, 같이 잤으니까! 넌 그 첫사랑이라고 우기는 그 남자랑 잤냐? 아니잖아. 그러면 그건 그냥 짝사랑인거야.”
진수는 세상의 진리를 알려주는 것처럼 허공에 밑줄까지 쳐가며 나를 가르쳤다. 그러나 여전히 내 생각은 달랐다. 난 정말 진환 선배를 사랑했는데…… 사랑한 게 맞는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이라는 말이야?

낙천적이면서 소심한 물병 자리.

읽으면 깔깔 웃음이 터지면서도 무엇인가 아련하게 그리워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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