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기억하니, 그 봄밤을?

그 노을과 그 꽃비를.

달빛보다 애틋했던 키스를.

평생보다 깊었던 우리의 순간, 순간, 순간들을.

슬픔이 무성했던 계절에도 빛나던 너는.

여자의 장미향 배인 입술이 그의 입술 사이에 갇혔다.

나의 꽃, 나의 가시.

나의 가시, 나의…….

여자가 관객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리는 것을 보다

하진은 눈을 감았다.

작은 가시 하나가 심장에 박힌 것 같았다.

온몸이 저리는데, 심장이 부서질까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하진은 눈을 떴다.

여자의 까맣고도 투명한 눈동자가

늪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혹적인 눈동자에 물고기 한 마리가 얼비쳤다.

바늘에 입을 꿰인 채 피 흘리는

어린 물고기였다.

- ‘가시꽃의 이중주’는 픽션입니다. 인명, 인물, 장소, 기업명과 사건들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 유사한 부분이 본문에 등장한다면 전적으로 우연의 일치임을 밝힙니다.

- 본문에서 “ ”는 한국어, 『 』는 영어 대화입니다.

2. 작가 소개

나자혜

‘사랑과 지혜’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사람

야구팬. Runner.

블로그 http://lovenwisdom.tistory.com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 출간작

플로라 (ebook)

우리들의 시간꽃

꿈꾸는 오아시스

13월의 연인들

얼음불꽃

별의 바다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3. 차례

#6. 진실 앞의 장님들

#7. 나의 꽃, 나의 가시

#8. 얼어붙은 강

#9. 이렇게라도 우리 사랑할 수 있어서

4. 미리 보기

“이 정도면 프러포즌데?”

차연의 의미심장한 시선을 영채는 외면했다.

“감정 표현이 좋은 사람이라 그래요.”

차연이 영채의 손을 쥐어 올렸다.

“회사 사정이 어떤지 엄마가 설명한 걸로 아는데. 효원 군과 교제한 지 한 달이다. 아직까지 프러포즈도 받지 못했다니, 엄마는 실망이야. 엄마 기대를 한 번도 저버린 적 없는 영채가 요즘 왜 이럴까?”

“정효원 씨, 좋은 사람이지만 전 결혼 생각이 없어요.”

영채는 잡힌 손을 빼려 했지만 차연의 손이 수갑처럼 손을 옭아맸다.

“공부 계속하고 싶지 않니, 영채?”

“네?”

“가족이란 시절이 험할 때 서로 의지하고 돕는 거 아니겠어? 어려운 아버지 상황 모른 척하는 널 엄마가 어떻게 계속 지원할 수 있겠니?”

“대학원 등록금은 제가 받은 장학금…….”

“출국 못 할 거다.”

차연의 싸늘한 단언에 영채는 소름이 돋았다.

“효원 군과 약혼하고 함께 미국으로 가든지, 학교 정리하든지 둘 중에 하나다. 잘 생각하고 선택해.”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어요.”

“물론 선택은 네가 하는 거지. 네 인생은 네가 사는 거니까. 결정되면 알려주렴. 엄마는 네 뜻에 따를게.”

어느새 유려한 미소를 머금은 차연이 손을 도닥이고 방을 나서다 문가에서 돌아섰다.

“서울에 남겠다면, 엄마가 미술관에 자리 마련해볼게. 나이 지긋하신 정재계 인사들 대접하는 거 이젠 엄마 힘으로 무리야. 젊고 싱싱한 네가 그분들을 상대하는 게 좋겠어. 우리 앞으로 아버지 사업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마음을 모아보자. Good night, 영채.”

차연이 도도한 눈인사를 남기고 문을 닫자 영채는 방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나이 지긋하신 정재계 인사들을…….

젊고 싱싱한 네가…….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 눈앞이 캄캄했다.

정신을 가다듬은 영채는 서 회장의 서재로 내려갔다.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보고 노크를 하려는데, 노기에 찬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지금 수산 시장을 인수할 때가 아니야. 현금 사정이 좋지 않다고 몇 번을 말해. 차세대 프로젝트도 상황을 봐가며 가동시키는 거야. 그래도 이놈이. 아들이라고 밀어줬더니 앞뒤 분간을 못 하고! 좋은 말로 할 때 손떼. 그리고 당장 본가로 들어와. 분탕질을 해도 소리 소문 없이 해야지, 혈기만 왕성해서는.”

서 회장이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더 좋은 때를 엿볼까 망설이던 영채는 숨을 고른 뒤 문을 노크했다.

“누구야!”

“영채예요.”

“들어와.”

다행히 서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서재로 들어선 영채는 얼굴이 붉게 상기된 서 회장의 눈치를 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서 회장이 책상 앞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더니,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영채는 서 회장을 마주하고 앉아 양손을 모아 쥐었다.

“아버지, 저 공부 계속하고 싶어요.”

“누가 그만하래?”

“결혼 생각 전혀 없어요. 다른 욕심 안 부릴 테니까, 하던 공부 마치게 해주세요.”

“정효원이 마음에 안 들어?”

“결혼 전제로 교제하는 게 부담스러워요. 시간을 갖고 알아갈 테니까, 공부는 계속하게 해주세요.”

서 회장은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 같은 영채를 바라보았다. 영락없이 네 어미 젊었을 때 모습이구나. 네 어미도 그 곱고 처연한 얼굴로 사내 애간장을 녹였지.

「영채가 생모를 찾고 있었던 건가 봐요. 일단 내가 손을 쓰긴 했는데. 우리 몰래 그 아이가 다시 일을 꾸미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당신이 그 여자를 어떻게 얻었는지, 영채가 진실을 알면 안 되잖아요? 이것저것 들쑤시기 전에 시집보내요. 재성그룹 며느리 자리면 누가 봐도 많이 남는 딜이니까.」

차연의 경고가 떠오르자 서 회장은 골치가 아팠다. 이래저래 꼬이고 있는 그룹 안팎의 상황이 신경을 긁는 판이었다. 하진이 해명 주식을 취득한 후, 오디세이가 해명을 적대적 인수 대상으로 찍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해명의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고, 주식을 추가로 매입하려 현금을 풀어야 했다. 부동산 처분을 하려 해도 서주의 현금줄이 말랐다는 소문이 두려워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거기다 그가 홀대했던 정치 야인이 오랜 공백을 깨고 나와 대선 후보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 중이었다. 보험 드는 셈 치고 인사를 가자니, 현금 상자 준비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재성 현금 많은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아끼는 막내아들이 영채한테 목매는데, 우리가 도와달라면 신 회장이 모른 척하겠어요? 은행장들한테 로비하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못 이기는 척 영채 내주라고요.」

재성과의 연합이 탈출구가 될 수도 있겠어.

“영채야.”

서 회장은 묵직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재성 신 회장, 고루한 옛날 여자 아니다. 네가 공부 계속하고 싶다면 후원자가 되어줄 거야.”

영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젖어드는 영채의 눈동자를 외면하면서, 서 회장은 영채의 손을 잡아 다독거렸다.

“신 회장이 유학 생활비 짜게 주면, 내가 용돈 보태줄게.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정효원이랑 잘해봐.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

영채는 서 회장의 유들유들한 미소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물며 잡힌 손을 빼오는 동안, 가슴 한편이 와스스 무너져 내렸다.

다음 날, 영채는 효원의 데이트 신청을 받고 외출했다.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들을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한 후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효원이 좀 걷자고 했다.

“저, 할아버님께 야단 들었어요, 영채 씨.”

“왜요?”

“조부모님 댁이 이 근처거든요. 그런데 이 동네 드나들면서 영채 씨만 보고 간다고요. 아무리 그 아이가 좋아도 그렇지, 이 무정한 놈. 이러시던데요.”

“할아버님 복분자주 좋아하신다면서요? 한 병 사 가서 말벗 해드리세요. 어르신들이 화를 내시는 건 외로움의 표현이래요.”

“같이 가실래요?”

“네?”

영채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효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렸다.

“어르신들께 영채 씨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어요.”

영채는 손을 빼려 했지만 효원이 그녀의 손을 가두었다. 한 달여 교제하는 동안 효원이 스킨십을 해온 것은 처음이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손처럼 효원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알아갈수록 영채 씨가 좋아져요.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란 확신이 들어요.”

“효원 씨, 저는…….”

“제가 경영에 관심이 없어서 영채 씨에게 많은 걸 못해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남은 공부 마칠 때까지 같이 공부하며 의지할 수 있을 테고, 미국에서 자리 잡으면 한국에서보단 자유로울 거예요.”

영채는 효원의 고백을 들으며 차연의 말을 떠올렸다.

「효원 군과 약혼하고 함께 미국으로 가든지, 학교 정리하든지 둘 중에 하나다.」

「나이 지긋하신 정재계 인사들, 젊고 싱싱한 네가 상대하는 게 좋겠어.」

그건 협박이었다. 그녀를 평생 데리고 살겠다던 아버지도 효원과의 결혼을 바라는 눈치였다.

어제 아버지 서재에서 나와 그녀 명의의 재산을 따져보았다. 사업을 모르는 상황에서 주식을 함부로 매각할 수는 없고,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현금은 의외로 적었다. 그녀 명의의 오피스텔과 보석류를 처분하면 현금이 나오겠지만 처분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은밀히 처리할 수 있느냐도 문제였다. 서주그룹의 그늘에서 멀어질수록 안전할 거란 불길한 예감이 드는 요즘, 그녀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효원 씨, 제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요?”

영채는 용기를 내어 효원을 마주 보았다. 효원과 약혼하고 서울을 벗어나자. 미국에 가서 다음 수를 생각하자.

“뭐든지요.”

효원이 환하게 웃었다.

마주하기 너무 맑은 미소여서, 영채는 눈을 감아버렸다. 미안합니다. 당신의 진심을 이용해서. 하지만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제발, 감옥 같은 집에서 날 좀 빼내주세요. 당신에게 진 빚은 절대 잊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