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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기망하다

진진필(이주연) 지음스칼렛2016.08.25979-11-315-7318-1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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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315-7318-1 (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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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이름의 전자책 모음  (전권 구매시 7,200원)


<프로필>

 

진진필(이주연)

 

현재 로망띠끄에서 활동 중입니다.

로맨스 판타지의 정점을

가장 사랑받는 느낌’에 맞추려 애씁니다.

책장 속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같은 글들을

많이 낳고 싶습니다.

 

 

<카피글>

 

시혁의 집에 새로 들어온 찬모, 민수는 숨 막히게 고왔다.

우유를 쏟아부은 것 같은 피부와

도톰한 윗입술에 색기가 조르륵 흘렀다.

“그 나이에, 그 얼굴로…… 남의 집 식모 일을 했었다?”

가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어리고 아름다운 여자라.

동정심을 끌어내려는가, 베갯머리송사를 할 것인가.

 

그러나 엉망이 될 줄 알았던 생활은

오히려 더 만족스럽게 유지되었다.

편하자고 화해를 청했지만 시혁은 그녀가 조금씩 더 불편해져 갔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던 노력은 슬슬 한계에 부딪혔다.

 

“차라리 그냥 침실로 뛰어들지, 왜 그런 짓을 했어?”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었다.

“넌! 몸은 불편할지언정, 모자라지 않아.

유나에게 반항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매를 맞더군.

내 마음을 끌려고 노력한 네게, 내가 고스란히 놀아난 건가?”

 

옳았다. 처음부터 시혁은 민수를 원했었다.

그의 시선은 항상 속절없이 그녀에게 끌려다녔다.

도발을 품은 그녀의 눈빛에 어린 짙은 원망.

“난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어.”

그는 지금, 그녀를 안을 이유가 충분했다.

아니, 이유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끝까지 그를 기망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진심 때문이었을까.

 

 

<목차>

 

1장 새로 온 찬모

2장 불편한 그녀

3장 휴일의 손님

4장 화해, 그리고 싸움

5장 아버지, 권갑수

6장 결별

7장 민수 이야기

8장 초야

9장 사랑에 눈멀다(1)

10장 사랑에 눈멀다(2)

11장 서로의 의미(1)

12장 서로의 의미(2)

13장 프러포즈

14장 기망하다

15장 안녕, 에몬

16장 베일 속 이야기

17장 재회

18장 끝내야 할 악연

19장 악연의 끝

20장 그들의 시간

 

작가 후기

 

 

<현대물/재회물/복수/다정남/까칠남/절륜남/애잔물>

 

 

<본문 중에서>

 

시혁은 그녀를 지나쳐 창가의 진녹색 벨벳 커튼을 열어젖혔다. 한껏 갇혀 있던 햇빛이 와르르 쏟아졌다. 여자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눈도 마주쳤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 인사하기는커녕 빤히 올려다본다.

“하아!”

기가 찼다. 시간을 좀 더 줬지만 인사를 먼저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더욱이 한 발 한 발 다가설수록 ‘영후각 출신’이란 실낱같은 기대는 툭 끊겼다.

“부엌일은 해 보았습니까.”

물론 예의상 물었다. 많이 봐 주어야 스물둘? 스물셋? 저 나이에 찬모 일을 해 봤자 얼마나 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입도 벙긋하지 않고 까딱, 고갯짓으로 답했다. 시혁은 저도 모르게 ‘하하’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건방진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조소였으나마 입가에 맺힌 웃음기가 말끔히 걷혔다.

여자는 숨 막히게 고왔다. 우유를 쏟아부은 것 같은 피부, 선명하고 동그란 눈, 홍채가 비치도록 시린 다갈색의 눈동자. 도도하게 뻗은 날렵한 콧날, 오목조목 앙증맞은 콧방울, 아랫입술만큼이나 도톰한 윗입술.

여자가 눈을 깜빡이자 가느다란 쌍꺼풀의 라인이 짙은 속눈썹의 수풀로 숨었다. 숱 많은 그 끝에 눈물이라도 한 방울 매달면 웬만한 사내의 가슴쯤 녹여 없애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야아, 이거, 가관이군!”

말간 얼굴엔 화장기조차 없었다. 빈정거림이 여과 없이 입 밖을 뚫고 나왔다. 그녀의 옷차림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정강이까지 오는 푸른색 체크무늬 주름치마에 흰 양말을 접어 신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는 더운 날씨였다. 다 늘어진 긴팔의 흰 티셔츠는 그렇다 치고, 목에 감고 있는 스카프까지.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설정을 하더라도 웬만해야지. 어설프기보다는 노골적이었다.

그래, 딱 저런 계집이 있었다. 청소를 하던 잡역부였는데 책상의 서류를 훔치고 전화를 엿들었다. 다행히 거짓 정보를 흘려 역으로 이용할 기회를 만들어 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 계집은 어수룩하게라도 생겼었다.

가난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어리고 아름다운 여자라. 동정심을 끌어내려는가, 베갯머리송사를 할 것인가, 기대가 되다 못해 목구멍에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영후각서 찬모로 있던 이, 그이 외동이래유.’

 

예산댁을 의심치는 않았다. 그런 줄로 알았을 것이다.

“그 나이에, 그 얼굴로…… 남의 집 식모 일을 했었다?”

작정하고 침실로 뛰어들려는 여자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다. 콘셉트가 도도함인가. 여자는 여전히 입을 꼭 닫은 채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시혁은 잔잔히 떨고 있는 그 손을 흘깃 바라보았다. 손이 참 고왔다. 남의 집 부엌일을 해 왔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좋아, 집안일 중 할 줄 아는 게 뭐야? 청소기, 세탁기 돌리는 거? 남이 다 해 놓은 음식, 가져다 차려 놓고 숟가락이나 올리는 거? 예산댁이 뭐라 하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쪽 손에 밥이나 한 끼 얻어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눈을 내리깐 여자는 여전히 도도하게 말이 없었다. 빽빽한 속눈썹의 짙은 음영 아래로 발그레한 색기가 조르륵 흘렀다.

“왜 보란 듯이 이런 차림으로 왔지? 차라리 어느 룸살롱 호스티스인 척 꾸미고 매달리지. 그랬으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기라도 했을 텐데. 너, 누가 보냈어? 영신? 진영? 어디야? 어디에서 너 보냈어? 계속 그따위로 입 안 열래?”

제풀에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드디어 고집스럽게 닫혀 있던 도톰한 입술이 열린다. 그러나 말 대신 긴 한숨 소리가 새었다.

“하아…….”

시혁의 가슴이 철렁,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나 흉하게 일그러졌다.

“하아, 하아……. 이, 이, 이, 일을 시, 시, 시, 시키지, 않으, 않으시려면, 고, 고, 고, 고이 보내시면 그만입니다!”

간신히 쥐어짜듯 몇 마디를 토했다. 여자의 오른손은 부리나케 옆에 있는 가방을 쥐었고, 왼손은 소파의 팔걸이를 짚고 기우뚱, 힘겹게 일어섰다. 절름, 절름, 절름, 절름, 그녀가 걸어 나갔다. 절름, 절름, 춤을 추듯 리드미컬해서 허리부터 엉덩이, 다리가 둥그렇게 휘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절름, 절름, 절름, 절름, 아주 바쁘게 걸었다.

시혁은 얼어붙은 채 그녀를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저건, 저건…… 그래, 거짓이다. 거짓으로 연기를 하는 거다. 비록 진짜처럼 자연스럽더라도 그래도 가짜다. 어디에서 데려온 배우 지망생이다.

‘드르륵’ 그리고 곧 ‘탕!’ 현관문이 닫히자, 시혁은 채광창의 커튼을 젖히고 조용히 내다보았다. 평지는 그럭저럭 잘 흉내 냈지만 계단 연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툭, 툭, 툭, 계단을 엇갈려 내려가지 못했다. 대신 석축의 끄트머리를 잡고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려 내려갔다. 검은 가방은 벌써 흙 범벅이었고,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래, 참 덥기도 하겠지. 치렁치렁한 긴 치마, 후줄근한 긴팔 티셔츠, 그 가련한 스카프까지! 놀라운 연기력에 화가 더 치밀었다.

이 정도라면 확인을 해 주는 게 예의다. 알아내야 했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어떤 사주를 받았는지.

시혁은 재빠르게 현관을 나서 단숨에 계단을 탁, 탁, 탁, 뛰어 내려갔다. 여자는 정원을 반도 지나치지 못하고 있었다. 시혁은 여자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참, 치밀하게도 준비해 왔군.”

원망 어린 다갈색 눈동자가 시혁의 가슴을 쿡 찔렀다. 색기 어린 눈빛이 도발을 품었다. 시혁은 차갑게 웃으며 여자의 어깨를 비틀어 쥐었다. 그런 눈빛으로 배우를 하지 그랬어.

여자는 어깨를 털었으나 반항쯤은 가볍게 무시했다. 억지로 목을 잡아 비틀고 스카프를 강제로 끌러 내렸다. 궁금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이렇게 눈에 띄는 스카프 안에 무엇을 준비해 온 건가.

“하아, 아무리 빤하더라도, 너무 노골적이야! 안 그래?”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 오른쪽에는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거즈가 단정히 붙어 있었다. 상처를 가리자고 눈에 띄도록 스카프를 두르셨다? 상처투성이의 여자, 동정심을 이끄는 극단! 시혁은 바르작거리는 여자의 목을 강제로 그러쥐었다.

“으으으…….”

땀에 불은 거즈가 쉽게 떨어졌다. 그러나 그 안엔 상처 분장도 그려져 있었다. 마치 화상 자국같이, 붉게 흉이 진 것같이. 시혁은 바들바들 떠는 여자의 눈을 잔인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치밀하군! 아주 최악이야!”

그렁그렁 매달렸던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안됐지만 시혁은 여자의 눈물에 약하지 않았다. 그동안 침실로 뛰어들었던 수많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빠짐없이, 마지막엔 눈물을 무기로 삼았었다.

“이따위 장난에 내가,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했나?”

시혁은 망설임 없이 여자의 상처 분장을 엄지손가락으로 세게 문질러 지워 주었다.

“꺄악!”

외마디의 날카로운 비명이 그의 귀를 베었다.

“제길…….”

깜짝 놀라 거머쥐었던 손을 삽시간에 풀었다. 무언가 새하얀 목에서 몽글몽글 배어 나왔다. 신선한 붉은 피였다!

“하아!”

약한 새살이 밀려나서 벌겋게 벗겨졌다. 다친 지 얼마 안 되는 상처였다.

“아아앗…….”

여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시혁은 등줄기가 저릿했다. 소년 시절, 혼쭐이 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던 기분이었다.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상처의 피고름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황급히 눈물을 팔뚝으로 쓰윽 닦았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스카프를 휙 빼앗아 들고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절름, 절름, 아까보다 더 다급하게 절름거리며 대문을 향했다.

틀렸다! 내가 틀렸다!

시혁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런 식으로는 보낼 수 없었다. 황급히 뒤따라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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