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네가 내게로 달려오는 꿈을 꿔. 너를 안고, 입 맞추고, 사랑을 하면 너는 언제나 내게 속삭여주었어. 나를 사랑한다고…….”

반역자라는 누명을 쓰고 가문이 몰락한 아름다운 안젤리나, 악마의 손아귀로 떨어질 뻔한 순간 그녀를 구해준 용맹한 17기사단의 수장인 후작 타일러였다. 깊이 사랑하게 된 안젤리나와 타일러. 하지만 그녀에게 무섭게 집착하는 그랜드우드 백작과 가넷 공주의 음모는 그들의 사랑을 위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떠나는 안젤리나. 그녀는 다시 타일러를 만나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난 당신을 사랑하면 안 돼요.”

“이미 늦었어. 네가 아니면 누구도 안 돼. 너 역시…….” 

타일러는 안젤리나를 돌려 세웠다. 애처로운 눈길로 타일러를 바라보는 안젤리나의 두 뺨을 그의 두 손이 감쌌다.

“너 역시 내가 아니면 안 돼. 그렇지?”

“난…… 반역자의 딸이에요.”

“아니, 넌 그저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여자일 뿐이야.”

가슴 벅찬 고백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신민영

사소한 인생을 근사하게 살고 싶다.

촌스러운 낭만을 기억하면서.

블로그 : http://blog.naver.com/ajwannabe

▣ 출간작

불꽃

▣ 출간 예정작

불가분의 연애

친절한 여자

뜻밖에, 우리는

유혹의 기술

3. 차례

#프롤로그

#1장.

#2장.

4. 미리 보기

잘 익은 포도주와 향기로운 음식이 온 방을 채우고도 남을 긴 식탁에 차려졌고 타일러는 왕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았다. 은은하고 달콤한 청포도를 먹으며 재미없는 정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시간이 꽤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면 격식 없이 둘러앉아 멧돼지를 구워 먹으며 독한 술을 마시던 전투에서의 캠프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귀에 닿지 않는 왕의 악사대신 투박한 악기로 흥겹게 불어대던 집시의 음악 역시 그리워 졌다. 포도주를 마시는 타일러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은 존이 귓속말로 무어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가넷 공주님께서 후작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계십니다.”

타일러는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왕의 옆자리에 도자기 인형처럼 앉아 있는 세 딸들 중 가장 장성하고 아름다운 가넷을 보았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피부와, 굽이치는 아름다운 금발,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일이 숨 쉬는 것과도 같이 익숙해 보이는 우아한 은회색 눈동자의 여인. 

숨이 턱 차오르게 아름다운 여인임에는 분명했지만 타일러는 어쩐지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적의 숨통을 끊는 잔인하고, 거친 기사에게는 분에 넘치게 여리고 가냘픈 여자였다. 저런 여자를 아내로 들여놓는다면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고 말 거라는 생각을 하는 그였다.

“그래도 난 좀 낫군. 자넨 왕의 둘째 공주께서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야.”

타일러가 낮은 귓속말로 속삭였고 둘째 공주의 얼굴을 본 존은 약간 얼굴을 굳히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세 딸 중 유일하게 살집이 좋고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올리비아는 아무리 왕이 아끼는 공주라 하더라도 사나이의 열정을 타오르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현명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헨리에타 왕비가 식탁을 둘러싼 귀족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 그레인 후작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나무랄 데 없이 눈부신 외모와 단단한 몸, 어느 곳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명예를 가진 그레인가를 이끄는 데다 왕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고 있는 청년이니 큰딸 가넷의 신랑감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라고 한눈에 직감했다. 왕비가 몸을 조금 기울여 왕에게 무언가를 귀엣말로 전달했고 왕 역시 그레인 후작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왕이 술잔을 들고 심중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려 했을 때 시중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왕은 술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곧 좌중을 고요하게 만드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간 나라 안팎에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네. 프랑스와의 마찰은 그레인 후작의 용맹으로 일단락을 맺었으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지. 그레인 후작은 오랜 타지 생활로 왕실 소식에는 무감할 터이니 설명을 하도록 하지.”

존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던 타일러는 몸을 바로 하고 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근 2년간의 긴 싸움이었으니 나라 안 사정에 둔감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라 안에 왕의 권한을 찬탈하려는 자들의 반란이 있었네. 물론 오래지 않아 그 소란은 여기 있는 그랜드우드 백작의 민첩함으로 진압되었지만.” 

왕은 타일러와 마주 앉아 있는 그랜드우드 백작을 가리키며 말했고, 호명을 받은 백작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레인과 그랜드우드의 눈이 마주쳤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껄끄러운 적대감이 오갔다.

“휴이트 남작이 반역을 했다네.”

타일러는 이름도 한번 들어보지 못한 가문이었다. 그 작은 가문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이 큰 소란으로까지 이어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나 하는 의심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워낙 나라 안의 일에는 무감한 데다, 관심조차 잃은 지 오래였기에. 더구나 비열한 그랜드우드의 명예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면 더욱더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휴이트 남작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고, 장남은 콜드 바스 필즈 감옥에 수감되었지. 가문의 명예를 박탈한 것은 물론이고 남작의 가족들은 모두 노예로 전락했다네. 내 다시 이 듣기도 상서롭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여기 모인 자네들에게 이 선물을 주기 위해서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네.”

식탁을 둘러싸고 있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랜드우드 백작만이 무엇인지 짐작한다는 얼굴로 살짝 웃고 있을 뿐.

“끌고 오거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억세게 팔을 휘 잡힌 여자가 끌려들어 왔고 바닥에 매몰차게 내팽개쳐졌다. 여자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젖은 종이처럼 바닥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타일러의 눈에 신발도 신겨지지 않은 곱고 하얀 발등이 들어왔다. 헨리에타 왕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흡사 흉측한 괴물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왕이 손짓하자 여자를 끌고 들어온 시중이 여자를 바로 일으켜 고개를 쳐들었다.

감탄사 비슷한 소리가 고요하던 실내에 터져 나왔다. 비록 피곤과 공포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심장이 멈출 만큼 아름다운 여인임에는 분명했다. 고양이처럼 빛나는 눈빛은 여느 여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여자는 짓밟히고 더럽혀진 자존심을 끝내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으며 경멸의 눈빛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귀족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랜드우드를 바라보는 눈빛에 유독 살기가 어려 있었다.

“짐작은 했겠지만 휴이트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지. 반역죄인의 딸이라고 노예로 부리기엔 이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가 너무 아까웠기에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네. 정부로 삼아두면 밤이 외롭지는 않겠군.”

왕의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헨리에타 왕비를 비롯한 공주들 역시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며 비소를 지었다. 가넷 공주만이 씁쓸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랜드우드는 흡족한 얼굴로 결박당한 여자를 향해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타일러는 기름진 대지와 같이 짙고 윤기 흐르는 여자의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기분이 조금 불편해졌다. 남작의 외동딸이라면 단 한 번도 이런 치욕을 당해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는 섣불리 추측할 수도 없는 일이다. 관심을 끄고 다시금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그랜드우드의 끈적이는 눈빛이 타일러의 시선에 사로잡혔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희열에 찬 얼굴에서 역겨움을 느꼈다.

“반역죄인을 처벌한 그랜드우드 백작에게 여자를 하사하면…….”

“친애하는 왕이시여.”

에드워드 왕의 말을 타일러가 가로막았고,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왕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후작을 보았다.

“말해보게.”

“제게 그 선물을 내려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순간 놀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도, 헨리에타 왕비도, 가넷 공주도, 존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랜드우드 백작이.

“자네에게?”

“선물을 받을 만큼의 자격이 있다고 사료되는군요.”

“무…… 물론 그렇지. 그렇지만…….”

“그랜드우드 백작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이 친구에게 따로 부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일러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그랜드우드를 역시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랜드우드는 죽일 듯한 눈으로 타일러를 바라보다가 이내 억지로 조금 웃는다.

“그랜드우드 백작, 자네에게 일말의 인정이 남아 있다면 가여운 여인에게 동정을 베풀어주는 게 어떻겠는가?”

“반역자의 자제에게 동정을 베풀라는 말씀이시라면 글쎄요…….”

“반역자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힘없는 일개 여자일 뿐이네. 남자들은 대의를 여자들과 의논하지 않지.”

“그렇다면 어째서 후작님께 양보하는 일이 동정을 베푸는 일이라 말씀하시는지. 어차피 우리 모두는 그 대의를 가진 사내가 아닙니까?”

“아주 약간 성격이 다르지. 자네는 반역자를 처단한 무시무시한 사나이니까. 아버지의 피를 묻은 손에 농간을 당하다는 건 지나친 치욕이지 않겠나. 관용을 베풀어주게.”

타일러가 마치 즐거운 농담을 하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에는 칼보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랜드우드는 잠시 죽일 듯 타일러를 노려보더니 곧 다시 평정심을 찾으려 애쓰더니 활짝 웃는다.

“역시 후작님께서는 일개 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지고 계시군요.”

“양보의 말로 듣겠네.”

말을 마친 타일러는 단호하게 왕을 바라보았고 조금 난처해하던 에드워드 왕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 선물을 그레인 후작에게 내리도록 하지.”

헨리에타 왕비의 표정이 꽤나 씁쓸했다. 후작이 정부를 가지는 것쯤이야 이미 공공연한 풍습이지만 하필이면 가넷 공주 앞에서 이런 실랑이가 벌어지다니 말이다.

타일러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고 존은 자기 힘으로는 거의 서 있지도 못하는 여자를 들쳐 메고는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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