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사랑해, 우리 여길 벗어나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범족의 여인’, ‘러브 바이러스’, ‘만취’ 등 이진세 작가가 선보이는 색다른 단편 10선!

2. 작가 소개

이진세

필명 빈집.

‘마스카라’, ‘그 남자는 교정이 필요해’ 출간

‘시작하다(단편집)’, ‘초대’ 전자책 출간

단미그린비에서 일수장 찍으며 느리게 느리게 ‘나비내기’와 ‘마르스’ 연재 중.

3. 차례

#1. 범족의 여인

#2. 하지(夏至)

#3. 동지(冬至)

#4. A/S(After Service)

#5. 유턴(U-Turn)

#6. 몽(夢)

#7. 러브 바이러스(Love Virus)

#8. 인도사과

#9. 만취

#10. 터미널에서 다시 시작하다

4. 미리 보기

머리를 뒤로 젖히며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멋진 바가 아닌 뒷골목 꼬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첫눈에 끌렸던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의 친구와 말이다. 아, 제길.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는 빈 잔에 남자가 술을 채운다. 스테인리스 컵을 들어 물을 마신 그는 버너를 켜서 찌개를 데운다. 아무리 봐도 서비스맨으로 태어난 사람 같다. 짜증이 치민다.

“아 씨……팔.”

저에게 향한 욕인지도 모르는지 반응이 없다. 짜증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냥 심심할 뿐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약혼자가 있다 그 말이니?”

“예.”

예, 그걸로 끝이다. 답답해 죽겠다. 하나하나 물어봐야 예, 아니요 정도로 대답해 줄 모양이다. 애인도 아닌 약혼자 있는 남자를 찍었던 나도 한심하지만 그런 여자에게 친구 대신 나타나서 뒤처리해주는 너도 참 한심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고 다녔대?”

“그녀가 좋아해요.”

그녀? 일상대화에 그녀라는 대명사가 등장하다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 외국에서는 흔하디흔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혹시 이 녀석 ‘그녀’를 좋아했거나 좋아하고 있는 건 아냐?

“좋아해? 뭘?”

“다른 여자가 그 녀석에게 대시하고 탐내는 것.”

“허, 참.”

낯간지럽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보다. 내가 한 짓을 제삼자의 입에서 듣게 되니 쪽팔린다. 그나저나 그 약혼자란 여자 정신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냐? 나 같으면 그렇게 잘난 남자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해도 방방 뛰면서 난리를 칠 텐데. 어쩌면 열 여자가 아무리 벗고 춤춰도 그 남자는 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군. 하여간 잘난 것들이란. 다시 한 잔을 마셨다. 이젠 쓴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가장 지랄 같은 오늘이 가장 소주 잘 받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잔을 내려놓고 보니 소주보다 투명한 안경이 보인다. 딱 범생이 스타일. 저 안경 벗겨지면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주위를 더듬거리겠지.

“그럼 넌 뭐니?”

안경 속에서 무엇인가 반짝한 것 같다.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 약혼자는 딴 여자가 지 남자에게 대시하고 침 흘리는 걸 좋아한다고? 그 남자 역시 그렇게 제한된 자유에 충실했다고 치자. 그럼 그 뒷정리 하는 넌 뭐냐고, 허영덩어리 여자가 자기 주제파악하게 되는 장면 감상하시는 게 취미쯤 되는 거니?”

인간 박하영, 막가기 시작한다. 그러게 소주 한 병 이상은 마시지 말자고 늘 다짐을 하지만 오늘같이 기분 엿 같은 날은 내 기분 내가 주체할 수 없는 걸 어쩌란 말이냐. 

“그런 식으로라도 정리를 하실 수 있게 된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뭐? 네 말은 내가 너에게 시비 걸면서 내 기분을 정리하고 있다 그거니?”

“아닙니까?”

이제 보니 대답하는 목소리가 제법 무뚝뚝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면이 있다. 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아마도 술기운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그 동네 사는 족속들은 그렇게 다들 제멋대로니? 게다가 되지도 않는 존대는 또 뭐야? 너, 나보다 한 살 많지 않았었니?”

“한 살이 아니라 두 살입니다.”

아 머리야. 관자놀이에서 푸득푸득 맥박 뛰는 게 느껴진다. 속에서 뭔가 울컥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지고는 못 살고, 때리고는 발 뻗고 자도 맞고는 잠 한숨 못 자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형이다.

“아, 답답해. 이러고 마주 앉아 있는 내가 미친 거지 누굴 탓해.”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지갑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서는데 어찔어찔하다. 참 가지가지 한다. 이러다 제대로 집에 갈 수나 있을지 심히 걱정된다.

기우뚱기우뚱 걸어 카운터까지 가는 거리가 마라톤 완주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빌어먹을 인간, 여자가 비틀거리면 최소한 부축이라도 해 줘야 되는 거 아니냐?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그 서비스맨십은 어디다 던져버린 거냐, 정말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 그 자식, 윤월형이라는 인간보다 더 재수 없다. 생각해보니 이름도 되게 웃긴 자식이었네, 윤월형? 윤달형 아냐, 윤달형. 아침형 인간도 아니고 윤달형 인간이라니 넌 보였다 안 보였다 하겠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 남자의 등이 있다. 지갑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걸 보니 나를 앞질러 와서 계산이라도 한 모양이다. 쪼금, 개미 눈알만큼 마음에 들려고 한다. 

그래, 앞으로 평생 못 볼 인간이니 조금은 좋게 기억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가 술 마신 김에 인심 쓰는 거다. 참이슬에 감사해라.

흠.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 인간 이름도 모르는군. 하긴 알 필요도 없는데 뭐. 아, 밤바람이 제법 부드럽다. 꽃샘추위도 다 지나고 이제 진짜 봄인가 보다.

“저쪽에 차가 있습니다. 술도 깰 겸 주차장까지 걸어가시죠.”

웬만하면 쫓아가고 싶은 게 속마음이다. 몇 번 본 것에 불과하지만 저 성격으로 보아 운전에 무리를 할 사람도 아니니 집에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유혹에 굴하지는 않을란다. 제길, 꼬시려다가 실패한 남자의 친구에게 내 집을 알게 할 정도로 무신경하지는 않으니까.

남자가 간 쪽과 반대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몇 걸음 떼었는데 갑자기 몸이 휘청한다. 정말 취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남자가 내 팔목을 잡고 제 쪽으로 돌려놓은 모양이다. 팔목이 욱신거린다. 제법 손아귀 힘도 세네.

“그 꼴로 이 시간에 혼자 가면 망가지려고 작정한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내 꼴이 뭐가 어때서? 망가져? 망가지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항상 이런 식으로 뒤처리하고 다녔니? 윤달형 그놈에게 들러붙는 여자는 이런 식으로 니가 안전하게 집에다 모셔다 줬어? 내가 몇 번째니? 네가 얻는 대가는 뭔데? 뭐 얻어먹으려고 이런 짓이나 하고 다니는 거냐고!”

역시 막 나온 말이다. 꼬치집에서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밖이라서 그런 것일까, 얼굴이 좀 험악해 보이는 것 같다.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아니 화조차 내지 않고 그대로 나를 끌고 간다. 조금은 겁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끌려가고 있는 건데 오히려 편안한 기분이다.

인간 박하영 점점 이상해진다.

조수석에 태우는 손길은 거칠지 않다. 오히려 처음에 이것저것 챙겨주던 때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하다. 이 남자가 어떤 태도이든 나와 상관이야 없지만.

한번 타보았던 윤달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급스런 차다. 윤달이 건가? 하긴 돈 세기도 귀찮을 정도로 잘사는 집 외동이라니 차도 한두 대가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그런 남자를 내가 욕심냈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뭘 몰랐으니 그렇지. 그 정도로 부자인지도 몰랐고, 약혼녀가 있는지도 몰랐고, 이런 귀찮은 친구가 있는 줄은 더더욱 몰랐고.

내가 그 남자에게서 얻고 싶었던 게 뭘까? 처음 보았던 그의 모습은 기억나는데 그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안전벨트.”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나를 현실로 돌려놓은 것은 무뚝뚝해진 남자의 목소리. 뭔가 상당히 못마땅한 것 같기도 하고 불쾌해 보이기도 한다. 벨트를 매고 나니 차는 미끄러지듯 출발한다. 안락하고 조용하다. 윤달이의 시끌벅적하던 차에 비하면 진공상태처럼 느껴질 정도다. 술이 깨려는지 한기가 들면서 두통이 느껴진다.

총 0개의 독자서평이 있습니다.

올려주신 서평은 자신의 소중한 마음의 창 입니다. 모두와 함께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서평을 부탁드립니다.
한줄 서평은 한번만 남길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소식 : 이북 열람 후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도 별점과 서평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