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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열혈왕후(외전증보판) 3권

불유체 지음도서출판 가하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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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 979-11-295-187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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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품 소개
“칠 일의 여유를 주지. 그 안에 나를 설득한다면 나머지 시간도 돌려주도록 하겠다.”
궁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려던 단영의 발목을 잡은 것은 의종의 강요 아닌 제안이었다.
단영은 그에게 협조한 후 궁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엉켜버린 실타래는 쉬이 풀리지 않는다.
“신첩이 모른다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십니다. 언제 이 몸을 내쳐야 할지 그 기회만 엿보고 계실 것 아닙니까?”
2. 작가 소개
불유체
필명 불유체 / 박정희
현재 피우리넷에서 활동 중.
▣ 출간작
한여름 밤의 꿈 1, 2
플러스
업타운 걸
그녀를 겨냥하라(ebook)
그대로부터 일주일(ebook)
이다지도 사소한 사랑(ebook) 外
3. 차례
#제1장. 흉계(凶計)
#제2장. 하늘 천(天), 검을 현(玄)
#제3장. 어둠은 또 다른 시작
#제4장. 꼬리를 치고 머리를 자르다
4. 미리 보기
같은 시각, 남장을 한 채 북악산을 오른 단영은 당황한 기색으로 홍 내관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갑자기 하얀 보로 덮인 오동나무 함을 내민 때문이었다. 안에는 봉서(封書, 밀봉된 서찰.),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자.), 사목(事目, 규칙과 임무 수행 목적.), 마지막으로 동그란 마패(馬牌,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패.)가 놓여 있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다시 홍 내관에게로 시선을 돌리니 그 또한 넌지시 단영을 마주보다가 곧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함께 당황하였다.
“전해들은 게 없는 것이오?”
무엇을 말인가. 단영은 고개를 저었다. 홍 내관이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전하께서 그대를 종4품 안핵어사(按覈御史, 임금에 의해 비밀리에 파견되던 어사의 한 종류.)로 등용하셨소. 정녕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어사? 단영 또한 황당할 뿐이다. 아침나절 갑자기 교태전을 찾은 의종이 검은색 도포와 삿갓을 내어주며 입으라기에 받긴 하였지만 그게 어사를 만들어준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잘 들으시오. 오늘 낮, 전하께선 그대 윤단성이를 비호단과 결부된 비리를 캐내기 위한 안핵어사로 임명하셨소. 본래는 승정원을 통해야 하나 이번의 경우 전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자 생략되었으며 이 일은 전하와 그대, 그리고 이 몸 외에는 아는 자가 없소이다.”
윤단성이는 또 뭐야. 가명인가? 떨떠름해하는데 홍 내관이 봉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임명 취지와 임무가 자세히 적혀 있는 전하의 밀서요. 필히 혼자서만 열어보아야 하며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해주어야겠소. 그리고 이것은…….”
그의 손이 두 번째, 유척을 가리켰다.
“보다시피 겉은 놋쇠로 만들어진 평범한 율척(律尺, 자. 어사에게 내려지는 자는 유척이라 불린다.)이오만,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그 외에 숨겨진 다른 쓰임이 있을 것이니 잘 살펴 사용 방법을 알아내라 하셨소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과 이것은……,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그 목적과 또한 이에 적용되는 규칙이 적혀 있는 사목, 그리고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마패라는 것이오. 특히 사목을 여러 번 숙독하여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숙지하는 것은 중요한 책무이니 게을리 해선 안 될 것이오. 이제 이해가 되었소?”
단영은 껄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족쇄이자 날개라던 그것?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일단 상자 속 내용물을 잘 갈무리하고는 엄숙히 정렬해 있는 흑의인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그럼 누구입니까? 저들 또한 제가 필요 시에 부릴 수 있는 자들이란 뜻입니까?”
홍 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비밀 지령에 의해 정전위(靜電衛)라는 이름으로 결성된 전하의 직속 친위대로서, 지금까지는 전하의 명에 의해서만 움직여온 자들이외다. 무슨 의도신지 모르겠으나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저들의 친권을 허용하리니 그대가 원하는 만큼 적절히 다스려보라 하였소이다.”
단영은 이마를 긁적거렸다. 이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사실 이기와 둘이서만 움직이던 것이 버릇이 되어 무엇무엇의 수장, 이런 식의 호칭은 어색하기만 했던 것이다.
다음날, 의종은 지난밤의 일을 전해 들으며 가은당을 향해 걸음을 하였다.
“그래서, 자네가 내민 모든 것을 윤가가 수용했다는 말이지?”
커다란 슈룹(우산.)을 받쳐 든 나인 둘이 종종걸음으로 그런 의종을 따르고 있었다. 임우(霖雨, 장마.)가 시작된 것인지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끝날 줄을 몰랐다.
가은당에 이르러 섬돌을 오르던 의종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난데없는 초영의 모습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의종이 가은당 지밀상궁을 향해 물었다.
“중전도 안에 들어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전하.”
그런데 어째서 저 아이가 이곳에 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홍 내관이 난감해하며 자초지종을 일러주었다. 무표정하게 듣던 그가 훗, 웃으며 발길을 돌려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홍 내관의 물음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서궤 앞에 앉자마자 열어놓은 창을 통해 빗줄기를 바라봤는데, 그만 공상으로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의종은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인 문서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고개가 또다시 창 밖으로 향하고 말았다.
그는 초영에 대한 중전의 처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째서 그녀가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 짐작 중이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갑자기 의종의 얼굴 위로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초영을 가은당으로 보낸 단영의 속내를 알 것 같아서였다.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해도 결국 그녀 또한 지아비에 관한 한 질시를 내보일 수 있는 여인이란 뜻인가.
“전하, 혹 어디가 미령하신 것이옵니까?”
좀처럼 볼 수 없는 무방비한 미소가 오히려 걱정되었던지 홍 내관이 또다시 그의 몽상을 방해했다. 의종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어 그를 멀찍이 보낸 후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생각만 머릿속을 헤맬 뿐이다. 중전은 그 조그맣고 오만방자한 머리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내던가, 하는 그런 것들이. 단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당분간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때, 단영은 의종이 어떤 식의 망상을 만들어내는지 꿈에도 모른 채 부지런히 영루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경진의 연통이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제 단영이 훤한 대낮에 도성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의종 덕분이었다.
영루관에 도착하니 익숙한 하녀가 뒷문을 열어주며 반기었다.
“낮에 보니 그래도 인물이 좀 나아 보이우.”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뒤채로 안내한 그녀는 곧 술과 안주 몇 가지를 내어 왔다. 배가 고팠기에 상 위에 차려진 나물이며 전 등을 열심히 집어 먹는데 경진이 화사한 모습으로 들어섰다.
경진은 자리에 앉자 목소리를 낮추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선 지난번 의혹을 제기했던 상장군이란 자의 소문입니다. 한 1년 반 전까지는 한 가지 모습으로만 알려져온 것이 아니냐는 나리의 지적은 맞았습니다. 즉 전에는 그저 키가 크고 사내대장부답다는 말이 돌았다면 1년여 전부터는 작고 볼품없다는 식의 반대되는 소문이 갑자기 나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그 상장군이라는 자가 스스로 진면목을 가리기 위해 느닷없는 거짓 소문을 퍼트린 것인지, 혹은 다른 이유인지는 파악을 못하였습니다.”
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성과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마전이란 자의 근간 행적에 대한 보고입니다. 그자는 어찌 된 일인지 지난 단오를 전후하여 마구(馬具)를 대량으로 사들였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소인이 그 사들인 종류가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마탁(馬鐸, 말방울.)이나 마령(馬鈴) 등의 가슴걸이 하며 면식(面飾, 굴레에서 재갈 쪽으로 늘어뜨리는 장식품.), 마주(馬胄), 마갑(馬甲) 등의 장식용이라고 답하였다는 것입니다. 허나 아무리 전국적인 마구점을 운영한다 해도 제어용이나 안장용이 아닌 장식용을 사백여 상자나 들여놓는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가는 행위 아닙니까?”
경진의 말에 단영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특권층 외엔 잘 사지도 않는 장식용 마구만 사백여 상자라. 이는 무언가를 가리기 위한 눈속임일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말굴레[馬勒]니 등자(鐙子)니 하는 필수용품으로 가장하였으면 의심을 피하기 용이했을 것을, 왜 굳이 장식용을 선택하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그 물건을 다루면서 다른 이상한 말이나 행동은 없었는가?”
“음, 글쎄요. 중간에 의문이 생겼다가 그러려니 넘긴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 상자들을 나를 때 마전이 왠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를 하였는데, 연유를 물으니 구슬 등이 깨지면 손해가 막심해 그런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때는 장식용 마구라는 핑계를 좀 더 그럴싸하게 하려는 거라 여겼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
단영은 생각에 잠겼다. 경진의 말대로 자신의 핑계를 보충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러느니 대충 다뤄도 괜찮을 필수용품으로 가장하는 편이 더 수월하고 의심도 덜 살 것이니, 그보다는 안에 든 물건이 정말로 조심히 다뤄야 할 물건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단영은 한쪽 이마를 긁적였다. 깨질 수 있으니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기 제품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 그러나 사기 제품이면서 마전 같은 자가 사재기를 할 물건이라고는 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비호단이나 조창주와 연관을 시켜보아도 마찬가지다. 단영은 경진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그것을 직접 확인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인이 조만간 마전의 집 비우는 때를 알아내어 연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방물장수를 만나러 가야 한다 핑계를 대었기에 오랜 시간 지체할 수 없었다. 경진은 다음을 기약하며 서둘러 나갔고 잠시 후 단영도 처음 들어왔던 뒷문을 통해 영루관을 빠져나왔다.
상장군과 마전, 그리고 그의 마구 상자라. 그것들이 가진 연관성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다음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단영은 서둘러 북악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전위의 집결지이며 훈련장이라는 거대한 토굴에서 의종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꽤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의종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아침부터 종일 도성 내를 돌아다녔더니 이미 해시(亥時)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내내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을 최 상궁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또 곤하기도 했다. 보고를 모두 마친 후 서둘러 돌아가려는데 그런 그녀를 의종이 불렀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품이 무언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곁에 놓인 찬장을 열더니 술병과 술잔을 꺼낸다.
“한 잔 들겠나?”
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종이 경고하듯 말했다.
“청에서 들여 온 분주(汾酒, 펀주.)라는 것이지. 평소 즐기던 것과 그 맛과 정도가 다를 게야.”
그래봤자 술이지요. 단영은 별일을 다 걱정한다는 표정으로 앉았다가 그가 손수 따라 내어주자 일단 냄새부터 맡았다. 첫 향은 달콤한데 어쩐지 그 뒤가 쓰다. 그녀가 겁 없이 한 잔을 모두 마시자 의종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그대가 내게 장담했던 기한은 잘 지켜질 것 같은가?”
단영은 그저 오리무중인 얼굴로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 뿐이었다. 의종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런데 오늘 보아하니 그대의 그 장담이 그다지 미덥지가 못하군.”
“무슨 뜻입니까?”
단영의 날 선 질문에도 의종은 먼저 술잔을 천천히 비운 후에야 대답을 하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대는 그 배후가 무령군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가정에서 벗어나질 못하더군. 그건 즉 무령군 외의 다른 인물도 모두 용의선상에 남아 있다는 뜻이니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결론이 아닌가?”
단영의 속내를 콕 집어 말함이었다.
“심중에 짚이는 자라고 무조건 표적화하는 것보단 신중한 처사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영루관에서 의종이 대뜸 무령군을 지목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단영으로서는 의종의 그 지목이 너무 성급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의종이 말하였다.
“내가 그날, 누군가를 지목했다고 여기는 것인가?”
“그럼 아니었습니까?”
의종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모르게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같은 표정이어서 단영의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나는 단지 그대에게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대는 가장 역모의 가능성이 많은 자를 가려내기 위해 모든 왕자군들의 지난 전적을 탐색하기 바빴겠지.”
단영이 반문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지금 제1왕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궐 안팎에서 공공연하게 주시의 대상이 되는 무령이라는 존재를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궐내 세력과 관련이 없는 일반 백성들로서는 알 수 없는 왕실만의 사정으로서, 의종은 단영에게 그 점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이다.
의종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얇은 서책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지난 이태 동안 자경전을 들락거린 왕자군들의 기록이지.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자경전이라. 역모를 꾸미는 자라면 대비전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할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음, 도움이 되겠어. 단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서책을 잘 갈무리하였다.
“혹 이것이 전하께선 이미 누구의 소행인지 그 배후를 짐작하셨다는 뜻도 됩니까?”
“염두에 두는 인물은 있다. 아직 의심에 그칠 뿐이지만.”
의종의 말에 단영이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으며 물었다.
“그게 누구입니까?”
의종이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차갑게 말하였다.
“그런 걸 일일이 알려주려고 달포라는 기한을 보장한 게 아닐 텐데? 그대는 거래를 늘 그런 식으로 하나?”
단영의 얼굴에 순간 붉은 기가 어렸으나 곧 사라졌다. 근 석 달을 궁에 살면서 의종이란 인물이 내뱉는 농이며 비아냥거림을 많이 들어봤지만 감정이 상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일을 맡기기에 그대는 아무래도 미흡한 점이 많아 보이는군.”
어쩐지 어투가 불안하다 싶어 단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의종이 더 빨랐다.
“칠 일의 여유를 주지. 그 안에 내가 왜 이 달포의 거래를 지속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지고 오면 나머지 시간도 돌려주도록 하겠다.”
“그럼 저와의 약조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전하께선 늘 약속을 그런 식으로 하십니까?”
의종의 얼굴로 희미한 미소가 잡혔다. 그가 상체를 뒤로 기대며 단영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대는 순진한 건가, 아니면 그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인가?”
단영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그녀가 미처 대답을 못하자 의종이 말하였다.
“한 나라의 군주는 자신이 부려야 할 신하를 상대로 약속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명령만이 존재할 뿐이지. 믿고 맡기되 전부를 주지 않으며, 그자로 인해 일을 망칠 기미가 보이면 가차 없이 잘라내는 것, 그것이 정치다.”
할 말이 없어 또다시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의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들 주먹구구식 놀이도 아닌데 나라의 큰일을 두고 그녀와의 약조에만 매달릴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됨에도 기분은 나빴다. 단영은 술 주전자를 향해 거칠게 손을 뻗었다.
“독한 술이라고 이미 경고를 한 것 같은데, 잘못 전달되었나?”
그의 말에도 단영은 별다른 대답 없이 술만 마셨다. 처음엔 가슴속이 찌르르하며 머리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더니 지금은 그 은근한 열기가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신첩을 놀리시려고 이리 준비를 하신 겁니까?”
술기운이 오르니 평소에 하지 않던 말도 술술 나온다. 단영은 느닷없이 터져 나온 투정 어린 말이 스스로도 못마땅했다. 그런데 생각과 다르게 시선은 의종의 눈을 당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그대 같은 여인을 잘못 놀렸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것을 아는데 무엇 하러?”
의종은 단영이 내려놓은 주전자를 가져와 자신의 잔을 채웠다. 조르륵, 술 차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초조하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초조함인지 의종은 알 길이 없다.
“흠, 신첩이 모른다 생각하시면 큰 오산이십니다. 말씀은 그리 하셔도 언제 이 몸을 내쳐야 할지 그 기회만 엿보고 계실 것 아닙니까.”
의종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는 물끄러미 단영을 내려다보다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그런다고 답답한 속이 가라앉는 건 아니건만. 그러나 이 문제의 시발점은 자신이었다. 심하게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 장본인도 자신이었다.
문득 단영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의종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딱히 대항하고픈 마음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리다 보니 이런 형상이 된 것이다. 의종이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한다면, 그 일이 무마되겠는가?”
탁자를 짚은 채 꼿꼿이 내려다보던 단영의 고개가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그 무게에 끌려 어깨도 같이 수그러진다. 의종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것은…….”
단영의 입술이 무언가 말을 꺼낼 듯 달싹였다.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미소가 지어졌다. 의종이 그 미묘한 웃음을 바라보는 동안 사이는 점점 좁혀졌다. 흉측하게 변모해 있는 얼굴, 그러나 실제로 흉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단영, 의종의 한 손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감쌀 듯 다가섰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옆으로 쓰러져버리는 단영. 의종은 넘어지는 그녀를 재빨리 품으로 받았다. 어느새 단영의 눈은 꼭 감겨 있었다. 풀로 뒤범벅이 된 눈꺼풀은 그가 보기에도 무겁기 짝이 없다. 한동안 단영을 내려다보던 의종, 어느덧 실소가 터져 나온다. 표현할 수 없는 미진함을 달래던 그는 내키지 않는 듯 그녀를 근처의 돌침상 위에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