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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우리들의 시간꽃 1권

나자혜 지음도서출판 가하2014.11.02979-11-295-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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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정가 :  2,200
판매가격 :  2,200원
적 립 금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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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환경 :  PC/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타블렛
독자평점 :   [참여수 0명]
듣기기능 :  TTS 제공
ISBN :  979-11-295-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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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이름의 전자책 모음  (전권 구매시 4,400원)

1. 작품 소개

내가 이름을 부를 수 있기 전에 알았던
꽃처럼,
지금 그대를 기억합니다


사라진 약혼자를 기다리며 글을 쓰는 작가 예신. 어느 날 그녀의 앞에 나타난 화가 한준은 단조롭던 삶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순간, 예신은 과거의 사랑이 멀어져감을 깨닫는데…….


“예신 씨. 당신을 그리고 싶은데, 모델 해줄래요?”
“싫어요. 그림 속에 갇히기 싫어요.”
예신의 거절은 명료하고 확고했다. 자신의 담담한 목소리가 때로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긋는다는 것을 이 여자는 알까?
“파스텔로 그릴게요.”
“파스텔로 그리면 뭐가 다른데요?”
“파스텔화 그릴 때 난 고급 중성지 쓰고 보호제 뿌려요. 하지만 예신 씨가 원하면 그냥 종이에 그려서 보호제도 안 뿌릴게요. 빛에 변색되고 습기 타서 조금씩 사라지는 그림이 될 거예요. 그럼 예신 씨가 그림 안에 갇히는 건 아니겠죠?”
“사랑이랑 같겠네요, 그런 그림은.”
“어째서요?”
“시간에 닳으니까요.”


* 본문에서 “ ”는 한국어, 『 』는 영어입니다.


2. 작가 소개

나자혜

느린 여행과 굽 낮은 신발과 승패가 가려지는 야구 경기를 좋아하며, 걷거나 뛰면서 글쓰기 노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발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홈페이지: www.lovenwisdom.com
트위터: www.twitter.com/lovenwisdom


▣ 출간작

아이스크림처럼, 레몬처럼
별의 바다
얼음불꽃
13월의 연인들
꿈꾸는 오아시스
우리들의 시간꽃


3. 차례

#프롤로그
#하나. 이름 없는 것들
#둘. 바닐라 색 하늘
#셋.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
#넷. 다음을 기약하지 못해도
#다섯. 나의 외로움이 너의 외로움에게로 흘러


4. 미리 보기

안내방송이 나오고 버스가 속도를 줄였다.
준은 이어폰을 빼고 배낭을 집어 들었다. 지붕이 둥글고 투명한 정류장 앞에 버스가 멈췄다. 준이 하차하며 운전 로봇에게 팁을 남기자 로봇의 가슴에서 초록빛 하트가 반짝였다.
선선한 바람이 소르르 불었다. 정류장 주변을 둘러보던 준은 벤치에 앉은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무릎에 책을 펼쳐놓고 읽던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가 그를 보고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내렸다. 
예신은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할 것을 권하며, 정류장에서 기다리겠다고 이메일 했다. 자신을 삼십 대 초반의 단발 여자로 묘사하였는데 지금 그의 눈에 들어오는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준은 여자 앞에 가서 섰다.
“강예신 씨?”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이 햇살보다 눈부셔 준은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여자의 얼굴은 맑다 못해 창백해 보였다. 이마엔 여드름이 몇 개 돋았고 끝이 동그랗게 말린 머리카락이 귀를 살짝 덮었다. 목에는 꽃잎을 프레스 해 넣은 플라스틱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여자가 커다란 눈동자로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다 불안스럽게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반소매 셔츠 아래로 뻗은 팔이 보얗고 가늘었다. 긴 손가락도 가늘고 실핏줄이 살짝 내비치는 손목은 휘어잡으면 한 줌도 안 될 것 같았다. 우주소년 캐릭터가 박힌 셔츠를 입고 물 빠진 청반바지를 입은 여자는 삼십 대 초반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이고, 단발이라기엔 너무 짧은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강예신 씨 되십니까?”
준은 배낭끈을 고쳐 메며 목소리를 키웠다. 
“아, 네. 제가 강예신인데요. 혹시……, 한 화백님?”
펜던트를 놓은 여자가 꿈에서 깬 듯 물었다. 
“네. 한준입니다. 뭐가 잘못됐나요?”
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상하던 이미지랑 달라서요.”
“어떤 사람을 상상했는데요?” 
“선이 굵고 어두운 분을 기대했나 봐요.” 
“선이 가늘고 밝은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예신은 책을 덮고 일어서며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이런 반전이 있나. 음울하고 완고한 분위기의 예술가를 기다렸는데, 보헤미안의 풍모가 완연한 감각적인 남자가 나타나버렸다. 어깨까지 닿을 듯한 머리카락에 하이라이트까지 들어간 스타일이라니. 홍갈색 머리카락을 빛내는 온순한 햇살에 또렷한 이목구비와 강인한 얼굴 윤곽마저 아련해졌다. 
“강예신 씨?”
목소리는 어떻고. 저음의 울림이 듣기 좋긴 한데, 지나치게 서슴없잖아. 살면서 결핍이나 좌절이라고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의 목소리. 당신이 강예신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을 강예신으로 만들 테니까, 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남자는 함께 지내다 그녀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거슬리면 강예신이 되지 말아줄래요, 요구할 것 같고 그러면 그녀는 순순히 다른 생명체로 변신하게 될 것 같다.
“강예신 씨.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이 남자가 하필이면 노란색 셔츠를 입고 있으니까. 탄탄한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는 샛노란 반소매 셔츠가 봄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가슴팍에는 활짝 웃는 카툰 캐릭터가 박혀 있는데, 해먹에 다리를 쭉 뻗고 누운 캐릭터 아래 ‘Life is Good’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준. 심플하게 세련되고 경박하지 않게 밝은 남자. 도저히 슬럼프를 앓는 화가로 보이지 않는다. 셔츠의 캐릭터처럼, 사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를 여기로 보낸 장 화백의 의도가 의심될 지경이었다.
“한 화백님 작품들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색감이 어둡고 강렬했었는데. 컴퓨터 화면에서 봐서 그런 걸까요?” 
“그냥 이름 부르세요.” 
준은 그림에 대한 질문은 무시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네. 그럼, 한준 씨.”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는 예신의 손이 서늘했다. 
“짐은 배낭뿐인가요?”
“무겁게 여행하는 거 싫어해서요. 필요한 게 있으면 사고, 떠날 때는 버리고 가려고요.”
“아.”
쓴웃음을 지은 예신이 벤치 옆에 세워둔 화물운반용 카트를 잡았다. 그가 짐을 잔뜩 들고 올 것에 대비해 카트까지 끌고 나오다니. 예신의 치밀한 준비성이 예뻐 준은 재빨리 카트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이 맞닿자 예신이 그를 올려다봤다. 준은 손에 힘을 넣었다. 
“내가 끌게요.”
잠시 망설이던 예신이 카트를 놓고 책을 가슴에 품은 채 걸었다. 언틀먼틀한 자전거 도로를 따라 예신의 뒤에서 걷던 준은 잘 정돈된 적갈색 보도블록에 들어설 즈음 그녀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처음엔 여자 분인 줄 알았어요.”
외관이 고풍스러운 꽃집을 지나면서 예신이 말을 붙였다. 
“준은 보통 남자 이름인데요.”
준은 항변하듯 예신을 돌아봤다.
“한국에선 그렇죠. 하지만 미국 분이시니까 영어 이름일 거고, 해석하면……. June. 유월이.”
6월에 태어났다고 준이라는 이름을 받긴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해석해 유월이라니. 사극에 등장하는 몸종의 이름처럼 들려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침 읽고 있는 책에 같은 이름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자여서.”
변명하듯, 예신이 책을 들어 보였다. ‘조이 럭 클럽’이었다. 표지가 낡은 양장본 책 중간쯤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준은 책갈피에 달린 노란색 술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마디만 한 칩에 수만 권의 책을 휴대할 수 있는 시대인데, 종이책을 고집하는 여자라. 
“게다가 처음엔 남자라고 말씀 안 하셨잖아요.”
예신이 입술을 보로통하게 말았다. 그건 사실이었다. 준은 예신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직업과 이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헤비메탈을 듣지 않는다는 것, 서울에 가는 대략의 경위 등을 밝혔지만 성별을 언급하진 않았다. 장 화백을 통해 예신이 아는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 번째 메일인가, 네 번째 메일에서 예신이 물었다. 

: 남자 분이세요, 여자 분이세요? 
re: 남자예요. 가도 돼요? 

그렇게 되물었다. 
사흘 만에 날아온 예신의 답장은 간결한데 복잡했다. 

: 오세요. 여전히 오고 싶으시면.

준은 예정대로 비행기 표를 끊었다. 서울에 오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뉴욕을 떠나고 싶어서였다. 
“집은 소규모 주택 단지예요. 말씀드렸죠?”
예신이 메일로 알려준 사실을 상기시켰다. 
“아, 네에.” 
그의 대답이 시원찮게 들렸는지 예신이 단지 구조를 또박또박 설명했다. 
“잔디정원을 가운데 두고 네 집이 한 동을 이뤄요. 집에 숫자를 조합해서 가구를 구분하고요. 빌라 1,2,3,4호 이런 식이죠. 제 집은 4호예요. 정원은 공용지니까 자유롭게 산책하실 수 있어요. 지내다 보면 한 동이 단지 전체 같을 거예요. 별도의 출입카드 없이는 다른 동으로 넘어가실 수 없거든요.”
“이웃들끼리 가깝겠네요. 다른 집엔 어떤 사람들이 사나요?”
“젊은 부부하고 노부인이요. 부부 중에 남편은 클리닉에 근무하고 아내는 개인사업을 해요. 좋은 사람들이에요. 저랑 같은 연배라 이야기도 잘 통하고. 노부인은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면서 배접 학원을 운영하세요.”
“배접이요?”
“지류 문화재를……. 쉽게 말하자면 고서적이나 서예작품 같은 것을 보존하는 기술이에요.”
‘쉽게 말하자면’에서 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라는 암시를 던진 것을 모르는지 예신은 덤덤했다. 
“서로를 챙기지만 각자의 세계를 존중해주는 어른들이에요.”
이웃 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건조한 음성은 사생활 침해 불가라는 메시지였다.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나.”
준은 누군가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에둘러 했다. 
“네에.”
예신의 대답이 시원찮게 들렸다. 
건널목이 나타났다. 예신이 신호등의 버튼을 누르자 일 분 후에 신호가 바뀐다는 음성 안내가 나왔다. 일 분보다는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을 때 호롱호롱 새 우는 소리가 나고 신호등에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건널목을 건너 반대편 거리에 도착했을 때 예신이 말했다. 
“시간을 잘 맞추셨어요. 노을이 짙어지기 전에, 지금처럼 하늘이 바닐라 색일 때 서울은 가장 예쁘거든요.”
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말끔했다. 구름이 겹친 곳은 더 말갰고 섬처럼 늘어선 구름들 군데군데 동그란 틈이 있었다. 틈새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플래시라이트처럼 강렬한 빛이 새어나왔다. 다채로운 색의 스펙트럼이 예광탄처럼 하늘을 갈라 눈앞이 아찔했다. 
준은 고개를 숙이며 정수리를 문질렀다. 
“어디 안 좋으세요?” 
예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잠깐 어지러웠어요. 시차 때문인가 봐요.” 
뉴욕에서 서울까지 고작 두 시간 비행기를 탔는데, 시차라니. 처음 본 사람에게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준은 불편했다. 그의 불편함을 읽었는지 예신이 입을 다물었다. 
예신의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로수 세 개를 지나칠 즈음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으니까. 
“어제 화구점에 다녀왔는데요.” 
성격도 급하지. 한숨 돌릴 틈도 안 주고 자료조사를 시작할 참인가? 
“하늘색 계열 물감들 색상이 다양하진 않더라고요.”
“네.”
“화가들도 하늘 그릴 때 하늘색부터 찾나요?”
“스카이블루라는 물감을 쓰긴 해요.” 
“스카이그레이나 스카이오렌지 같은 물감도 있어요?” 
“본 적 없는데요.”
준은 무심히, 짧게 대꾸했다. 어떻게 파는 색깔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나. 이것저것 섞어서 나의 색을 만드는 거지. 
“그런 물감들이 있어야 하는데. 하늘의 표정들을 다 그리려면.”
그가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데도 예신은 혼자 말을 잘 이어갔다. 
“하늘이 회색일 땐 우울한 것 같고 울긋불긋할 땐 화를 내는 것 같거든요. 오렌지 색일 땐 격한 사랑을 하는 것 같고. 아, 연보라색일 때는 멍이 든 것 같아 가슴이 찡해요.”
작가 아니랄까 봐. 시를 쓰네. 
“지금처럼 바닐라 색일 때는 모든 감정을 초월한 것 같고요. 너무 순수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죠. 비현실적이라 예쁘고. 그런 생각해보신 적 없어요?”
이렇게 대놓고 물어 오면 대답을 안 할 수가 없다. 
“비현실적인 건 예쁜가요?”
“네. 예쁜 것들이 다 비현실적인 건 아니지만요.”
철학 강의라도 늘어놓을 셈인가, 이 여자는. 
“이해가 잘 안 가는데.”
“하늘이 지금 같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가짜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진짜인 게 저런 거였으면 좋겠다. 너무 예뻐서 꿈같지만, 사실은 꿈보다 더 근사한 게 진짜 우리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들. 청승이죠?”
맑은 목소리를 흘려내던 예신이 어깨를 들었다 놨다. 준은 잠시 예신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말간 뺨에 머무는 동안 예신이 책을 가슴에 꼭 품었다. 
“언짢을 정도로 궁상스럽고 처량하다는 뜻이에요. 아, 궁상스럽다는 건…….”
“무슨 뜻인지 알아요.”
준은 예신의 말을 잘랐다. 예신이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승이란 말도 알아요.”
준은 예신의 시선을 붙들었다.
“다른 뜻은 없고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하시는지 몰라서요. 메일도 영어로 주고받았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이런 이야기 하는 거, 실없기도 하고.”
예신의 웅얼거림이 흐려졌다. 
“실없지 않았는데요.”
준은 힘주어 말했다. 생경하긴 했지만 듣기에 불편하거나 황당한 소리는 아니었다. 
예신의 눈동자가 흔들림을 멈추고 깊어졌다. 준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예신이 웃음을 되돌리고 다시 걸었다. 예신의 가슴과 책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 것을 보고 준은 화제를 돌렸다. 
“정류장에서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꽤 기다린 것 같던데요?”
“그래 보였어요?”
“기다림에 몰입해 있다가 막상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나니까 어리둥절한 것 같았어요.”
예신은 선의의 거짓말을 들켰단 표정이었다. 
“사실은 그랬어요. 공항버스가 원체 규칙적으로 오가는데 오늘은 시간표보다 삼십 분이나 늦었거든요.”
“지루했겠네요.”
“지루하진 않았어요. 책을 읽고 있기도 했고, 제가 원래 기다리는 거 잘하거든요. 비행은 어땠어요?”
“만화영화를 봤는데, 시간 잘 가던데요.”
“뭐 보셨는데요?”
“미래소년 코난 에피소드요.”
“그거 굉장히 오래된 건데.”
“더 이상 미래소년이 아니죠.”
준은 입을 벌리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은 지각변동과 전자무기의 남용으로 2008년 인류의 절반이 소멸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올해가 벌써 서기 2041년이었다. 지구는 빙하기로 접어들지도 않았고 핵전쟁으로 초토화되지도 않았다. 과거 속 미래를 넘어선 현재에,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묘해졌다. 
“우주소년 아톰도 재미있는데. 최신판 보셨어요?”
예신이 말꼬리를 올렸다. 
“아톰?”
“미국에서는 뭐라고 하는데요?”
“아스트로보이. 아탐.”
준은 우주소년 캐릭터가 박힌 예신의 셔츠를 훑었다. 책 귀퉁이가 우주소년의 주먹을 살짝 가렸고, 우주소년의 주먹이 봉긋 솟은 예신의 가슴에 가 있었다. 책 너머로 눈길이 넘어가는데 예신이 나무라듯 말했다. 
“여기서는 아톰이라고 해요.”
준은 머쓱해져 시선을 끌어올렸다. 아탐을 아톰이라고 부르는 곳. 익숙한 간판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 낯선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바닐라 색 하늘 아래 서서, 다른 차원의 세계에 속한 것 같은 여자와 마주한 채,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만화영화 속 미래, 그 실없는 것을 이야기하며.

아마추어 체스 플레이어. 야구광.

『얼음불꽃』 외 두 편의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체크메이트: 여왕과 흑기사』의 출간을 준비 중이며, 구상작으로는 『하버드의 연어들』, 『햇살 아래 열목어들』, 『오아시스가 꿈꾸는 시간』 등이 있다.
2008년 여름부터 홈페이지 “연어와 해파리(www.lovenwisdom.com)”를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 빈티지 타자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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