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밤을 지키려 달을 끌어 내렸는데, 이제는 밤이 미워졌으니 어쩌랴. 내가 떠나는 수밖에.

전설 속, 짐승의 일족이 살던 흑운동에 어느 날 피의 잔치가 벌어졌다. 검은 짐승의 왕이 난을 일으켜 흰 짐승의 왕을 죽인 것. 그리하여 도망치듯 인간세상으로 건너온 흰 짐승 일족과 그들을 따라 환생한 검은 짐승 일족, 그들이 인간세상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 사이의 꼬인 오해를 끊어내고, 얽힌 인연을 풀어내고, 그들의 사랑을 다시 이어가고자…….

“이이제이. 적은 적으로 제압한다 합니다. 검은 짐승 일족에게 지금 적은 둘입니다. 흰 짐승 일족들과도 번번이 세력다툼을 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이왕 있는 김에, 싹쓸이하는 것이 낫지 않나?”

치우가 무심한 듯 소이의 속을 떠보고 있었다. 허나 마음은 기뻐 미쳐 날뛸 것 같았다. 어여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혜안까지 지닌 정인. 제 마음과 같이 일족을 이끌어나갈 나의 소이.

“어차피 일족이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아 검은 짐승, 흰 짐승 어느 한 쪽만으로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나 소이는 그에 흔들리지 않았다.

※ ‘가하 에픽’은 다양한 시대, 색다른 소재, 독특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도서출판 가하의 새로운 브랜드입니다. 로맨틱한 판타지가 가득한 가하 에픽, 지금 만나보세요!

2. 작가 소개

김청청

오싹물, 미스터리물, 귀신물을 좋아하는 시대물 마니아입니다.

블로그 하고 있으니 놀러 오셔도 좋습니다. :)

http://blog.naver.com/cheong_yo

▣ 출간작

불을 삼킨 짐승(전3권/완결)

3. 차례

# 7. 물밑싸움

# 8. 월하정인

# 9. 밤 손님이 오시네

# 10. 다시 시작되는 인연

# 11. 옛날 옛적에

# 12. 풋사과 내음

4. 미리 보기

검은 밤, 흑운동 산 정상은 때 아닌 혼들로 빼곡히 찼다. 작은 요괴들이 여느 때처럼 바지런히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시중을 든다. 음습한 도깨비불은 혼들의 머리 위로 정신없게 날아다녔고, 날짐승들은 나무마다 모여 줄을 서 앉았다. 스르르 혼들이 넓적한 바위마다 자리 잡자, 그 뒤편에는 발 없는 길짐승들이 얌전하게 앉아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는다. 그르릉, 목울대를 넘어 낮게 흐르는 귀곡성이 산 전체에 스산하게 깔려 있었다.

폭주를 마친 치우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척을 하고 앉아 있었다. 언제 격렬하게 날뛰었나 싶게, 언제 저가 포악한 얼굴을 하였었나 놀리는 듯이 맑고 해사한 검푸른 짐승. 항상 메말라 있던 입술은 술에 젖어 붉게 빛났고, 검은 눈에는 그저 장난기인지, 아니면 색기인지 모를 것이 반짝였다. 해사한 얼굴과 달리 단단한, 그 호리호리한 몸도 여전하다. 단지 전과 같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걸쳤다는 것 정도랄까.

“마셔라, 내 오늘 하사하는 술이다!”

치우가 외치자, 와, 바위 여기저기에서 흥을 참지 못한 귀(鬼)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의 잔치는 검은 짐승의 왕이 후계를 뽑는다 하여 열린 터, 서로 제 목소리를 뽐내며 저를 알리려 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치우는 귀들의 성의에 답하듯, 가장 높은 단위에 앉아 무심한 척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때, 치우의 뒤에서 검은 발톱이 몸을 드러내 예를 취하였다. 끄덕, 치우의 눈은 여전히 정면을 본 채였다. 치우가 저를 무시하거나 말거나, 이미 검은 발톱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차였다.

‘후계라니, 이날을 위하여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던가. 내가 아니면 뉘라서 그 자리에 오른단 말인가?’

검은 발톱이 서둘러 치우의 바로 아래 자리에 앉자마자, 따라 들어온 창귀(倀鬼 : 호랑이에게 잡혀 먹혀 그에 붙어버린 귀신. 다른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도록 유혹한다고 전해짐) 계집이 요염하게 그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창귀가 술을 따르자마자, 검은 발톱이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흐흐, 한 잔 더 따라봐!”

“히히히히.”

긴 머리를 산발한 창귀가 킬킬, 요사스럽게 웃었다. 정신 나간 계집의 실성한 소리가 오히려 검은 발톱의 흥취를 돋우었다. 슥, 검은 발톱이 벌겋게 물이 든 눈을 희번덕거리며 계집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누가 입혔는지는 모르나 일부러 가슴골을 돋보이게 하려 했는지 젖무덤을 힘껏 동여맨 것도 모자라, 야리야리한 얇은 비단옷을 걸쳐 대놓고 색기를 풍기고 있었다. 창귀가 갑자기 무릎을 세우고 앉아 치마 자락을 펄럭거렸다. 더워, 더워! 중얼거리며 거침없이 움직이는 손짓에 허연 사타구니까지 옷이 말려 올라갔다. 술잔을 잡고 있던 검은 발톱의 손이 어느새 다가와 창귀의 치맛자락을 아예 풀어버렸다. 휘잉,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얇은 치마를 빼앗아가자, 창귀가 걸친 것은 속이 훤히 보이는 얇은 저고리와 속곳 두 개뿐이었다.

“좋아! 히히히히히. 안 더워! 안 더워!”

그 팽팽하게 착 감긴 붉은 속곳이 보인 순간, 사내의 손이 덥석 계집의 안에 들어와 속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흐응, 창귀가 몸을 배배 꼬며 좋다고 웃어대었다. 히히히, 동자 귀신이 들린 것마냥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리더니, 털썩 바위 위에 누워 풀린 눈으로 검은 발톱을 바라보았다. 잔뜩 성이 난 제 것을 달래려, 검은 발톱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려는데 단 위에서 치우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림이, 별로.”

치우의 중얼거림이 찬물을 끼얹은 듯 혼령의 기분을 망친다. 우뚝, 멈춘 혼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와 왕께 고한다. 고개는 조아렸으나 눈빛은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이런, 거슬리셨습니까.”

치우가 힐끗, 잠시 창귀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도로 거두었다.

“정신 나간 혼이잖아. 저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아마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 않나? 그런 계집을 품는 일, 참 재미없지. 아, 나만 그러한가?”

“그럴 리가요. 제가 부족하였습니다. 허니…….”

검은 발톱이 말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귀에게 돌아갔다. 아직 거의 반라인 상태로 바위에 널브러져 있는 계집에게 다가가는 데는 그저 두 보(步)면 거뜬하다. 채 마르지 않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분홍빛 유두, 쥐 잡아먹은 듯 번진 입술. 계집이 갓 잡은 생선회마냥 꿈틀거리며 다시 돌아온 주인을 반기려는 순간, 검은 발톱이 무미건조한 얼굴로 창귀의 목을 딴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와 말을 잇는 것이었다.

“재미있게 마무리해드려야지요. 킥킥.”

이런 마무리라, 뭐 그대답군. 치우가 차게 식은 얼굴로 술잔을 비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재미가 없다. 하는 짓들이라고는.

“이런, 제 자리가 붉은 것으로 인해 심히 더러워졌습니다. 자리가 정리될 동안 전하의 곁에서 제가 술이나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든가. 치우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으쓱, 어깻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치우와 겸상을 하는 검은 발톱이다. 과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오자 공기마저 상쾌하다.

‘이 자리가 이제는 나의 것이라, 이거지.’

혼령의 기분이 다시 사르르 풀어진다. 그러고는 변죽이 좋게 치우의 빈 잔에 한가득 술을 부어주는 것이었다. 사실 치우는 소이를 보고 온 후로, 아무 감흥이 없었다. 피가 튀어도, 계집의 벗은 몸을 안고 비벼도 마찬가지. 그러한 연유로 평소 같았으면 아랫것과 겸상하는 일 따위 있을 수 없었으나, 이 또한 그의 신경을 건드리기에는 부족하다.

그녀의 사생아를 죽이고, 흰 짐승의 씨를 말려버리겠노라 그리 돌아왔었다. 궁에서 들려오는 첩자의 보고가 참 재미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랑이 그 더러운 사생아를 결의 짝으로 맺어주려 한다니, 이렇게 재미있는 소식이 있나.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서서히 증발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꼭 그날 밤, 장터에 제 혼을 두고 와 껍데기만 이리 앉아 있는 듯, 웃음은 잦아들었고 분노는 사그라진다. 슬픔은 차갑게 얼었고, 즐거움 역시 아무리 붙잡아도 저에게서 도망가 버린다.

공(空), 마르고 마르다 못해 치우의 마음은 텅 비어버렸다.

‘이미 다 끝난 일.’

어차피 생의 의미가 사라졌음이라, 아무 놈에게나 후계 자리를 맡겨버리고 유람이나 다닐 참이었다. 이까짓 왕 자리, 하고 싶은 놈 마음껏 하라지. 벌써 바로 옆에 여기 한 놈, 저 단 아래에 꽤 많은 멍청이들이 왕이 되겠다며 모여 있지 않은가. 물론 저 많은 것들 중에 어디 하나 왕재(王才)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옆에 있는 놈은 멍청하지는 않으나, 왕이 되기에는 그릇이 작으며 보는 눈이 좁았다. 하지만 지난날 세운 공이 있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 흥미로워 지켜보던 중이었다.

‘나만큼 고약한 비(妃)를 만나 고생 좀 해보라지.’

마신 술보다 쓰디쓴 웃음이, 목을 비집고 새어나온다. 그간 마지막 끈을 놓지 못하여 궁에 첩자를 심어놓고 지켜보았으되, 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제가 망가뜨리고 온 그녀보다, 그 자신이 더 부서져 나갔음을.

‘밤을 지키려 달을 끌어 내렸는데, 이제는 밤이 미워졌으니 어쩌랴. 내가 떠나는 수밖에.’

밤도 달도 없는 곳으로, 말이지.

치우가 그렇게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검은 발톱에게 왕좌를 던져주려는데, 시종이 총총총 걸어와 은쟁반에 서찰을 하나 올리는 것이 아닌가. 보내는 이도 적히지 않은, 꽤 무례한 서한. 읽기도 싫어 찢어버리려는데, 얇은 한지에 비친 서체는 꽤 수려한 명필의 것이라. 별생각 없이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하던 치우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반짝인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글을 꽤 오래 곱씹는 치우의 얼굴은 이미 한 겹 변해 있었다. 비어 있던 커다란 방에 작은 불꽃이 하나 톡, 떨어진 탓으로.

히죽거리며 아래를 굽어보던 혼령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꼈다. 치우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검은 발톱이 슬쩍 고개를 돌려보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어버렸다. 방금 손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던 왕좌가, 순순히 자신에게 오지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달라진 치우의 얼굴이 그것을 확신케 한다. 짐승의 왕이 돌아왔다.

그날 밤, 비를 잃기 전의 치우로. 여유만만, 언제나 속내를 알 수 없고, 미소를 잃지 않는 능구렁이. 짧은 한마디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그만의 기운, 여인뿐 아니라 사내들도 가지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짐승. 결코 절대적인 선(善)으로도, 악(惡)으로도 나눌 수 없는, 차갑지만 혀가 녹을 만큼 달콤한 이, 위험한 왕.

‘제길, 이제야 겨우 날개를 꺾어놓았다 싶었는데…….’

검은 발톱의 손이 덜덜 떨리며 술잔이 하염없이 흔들린다. 이미 머릿속은 빙글빙글 돌며 토악질이 날 것만 같다. 그가 멈추어 있으면 걷고, 그가 걸으면 뛰어도 좁혀지지 않던 거리. 그를 이기려면 다리를 부러뜨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 날개를 꺾어버리는 수밖에 없음이라. 해서 왕의 반려를 몰아내고, 왕의 하나뿐인 지기(知己)를 넘어뜨리며 흔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주저앉은 그를 드디어 추월할 찰나. 돌연, 그의 심장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해버렸다.

“아, 별것은 아닌데, 흠…… 후계의 간택을 미룬다.”

치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씩, 웃으며 말했다. 삽시간에 귀들은 놀라 치우를 바라보며 동시에 입을 다물었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못 들은 척 술을 따라 제 잔을 채우는 검은 발톱만이, 치우를 바라보지 않을 뿐. 쪼르륵 술 따르는 소리에, 당황했던 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토해낸다.

- 아니 갑자기 왜? 왕이시여!

- 왕이시여! 연유를…….

- 왜? 왜!

그르릉, 크왕! 가르릉, 가르릉. 혼들이 동요하며 큰 소리를 내자, 길짐승들도 불안에 휩싸여 들썩거렸다. 씩, 씩 가쁜 숨 쉬며 누렇게 변색된 거대한 이빨을 가는 모습이 위협적이었다. 요동치는 공기에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던 요귀(妖鬼)들도 휙휙 날아다니며 키이이, 비명처럼 웃어댄다. 불안과 공포, 배반과 위협의 냄새는 피부가 따갑도록 자극적이었으므로.

“방금 내가 굉장히 깜찍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이 안에…… 배신자가…… 있, 다.”

싱글벙글 신나는 듯이 웃던 치우가 일순 표정을 바꾸어 당장 죽일 듯이 하나하나 눈을 맞춘다. 그저 눈빛일 따름인데, 귀들은 실제로 쿡쿡 찌르는 듯 통증을 느꼈다. 치우가 보내는 기세는 독(毒)을 품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칼날이, 스르릉거리며 저를 겨누었다가, 천천히 옆의 놈에게로 옮겨가는 양상이었다. 이 와중에 어느 놈이 배짱 좋게 그 눈빛을 맞받아치랴. 그저 하나같이 ‘어떤 놈인지 어서 나서지 못해?’ 하는 표정으로 옆자리 앉은 놈을 째려볼 뿐.

- 네놈이냐?

- 네놈이겠지!

서로 저가 지목당할세라 헐뜯기 바쁘다. 맨 끝의 한 놈까지 빠짐없이 눈을 맞춘 치우가, 마지막으로 제 옆에 앉은 검은 발톱에게 향한다. 검은 발톱은 아직까지도 미동 없이 혼자 잔을 채우고, 또 비우고 있었다.

“음, 어쩌지? 자네가, 수고스러운 일을 해줘야겠는데.”

아주 선한 얼굴로, 하지만 비릿하게. 눈, 코, 입 따로 떼어보면 어디 하나 호의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건만, 치우의 얼굴은 분명하게 의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나마 믿을 만한 몇을 골라 한 놈도 빠짐없이 조사하라, 엄포를 놓았다. 꼭 골똘히 생각하며 손꼽아둔 것처럼, 그는 착착 상황을 정리해간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치우 휘하의 직속 부대들이 우왕좌왕하는 혼들을 꼼꼼하게 둘러쌌다.

‘함정인가. 내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할 줄 알고?’

검은 발톱이 그제야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단을 내려간다. 턱턱 한참을 내려가서는 조사받을 혼들 사이에 이르러서야 치우를 마주 본다. 죄가 없는 몸이니, 조사할 테면 해보시라, 하는 무언의 답변이다.

“그림이, 좋군.”

이제야 말이야. 짧은 한마디를 던져두고, 치우가 망설임 없이 그길로 산을 빠져나간다. 소이가 있는 궁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