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기태의 행방을 알아봐 줘야 하는 거야?”

“내 처음을 가져간 빚 갚음이라면 어때요?”

너무도 건조한 혜린의 목소리에 태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하룻밤 인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먹이며 거래를 하는 여자, 혜린.
일찍이 그녀를 마음에 품어버렸던 태수에게 혜린의 거래조건은 하룻밤의 인연만큼이나 지독한 아픔이었다.

-본문 중에서-

태수는 어젯밤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지 깨달았다. 중간 중간 끊어지는 기억들 속에서 자신이 혜린과 치열하고도 뜨거운 밤을 보낸 것을 보았다. 술에 취해 의식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의식 끝에는 만취해 정신없는 중에도 혜린을 안으며 다른 때와는 달리 많이 떨었던 자신이 있었다. 여자를 안은 게 처음도 아니었고 맨 정신도 아니었는데 태수는 그 어떤 때보다 급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을 느꼈었다. 믿을 수 없게도 어젯밤 자신이 그러했음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태수는 허공으로 두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마음만큼이나 거친 동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다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근육질의 단단한 어깨를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굳은 마음처럼 긴장이 잔뜩 들어간 몸으로 차가운 물이 흘러내렸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물에 반응하는 것은 배꼽 주위에 힘이 들어가 왕(王)자가 생긴 복근뿐이었다. 그는 샤워부스 아래에서 제법 오랜 시간을 서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혜린이 거짓말처럼 어젯밤 그를 찾아왔을 때의 모습으로 창가에 조용히 서 있었다. 흉하게 잘린 짧은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이 긴 생머리의 가발이 처음부터 그녀의 것인 양 자연스럽고 차분하게 어깨를 덮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와 처음 밤을 보냈다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 번도 자신보다 어린 여자와 밤을 보낸 적이 없는 태수는 이 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밤을 함께 한 여자들은 자신보다 연상이었다. 그것이 신경 쓸 일 없이 훨씬 편했다. 태수가 양미간을 실룩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메마른 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여기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못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너무도 태연히, 그가 욕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혜린의 당돌함에 태수는 그만 욕설이 튀어나올 뻔했다.

조금 전까지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혜린이 몸을 돌려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말했다.

“기태 오빠가…… 사라졌어요.”

똑바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혜린의 두 눈에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과 같은 적개심 가득한 눈빛은 더 이상 아니었다. 이 순간 혜린의 두 눈엔 어떤 반항심도, 어떤 분노도 없이 오로지 절실함만이 있었다.

“…….”

“할아버지가 어떻게 하신 것 같은데 제 힘으로는 찾을 수가 없어요. 대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늦은 밤에 이곳을 혼자 찾아왔을 때부터 기태의 일일 것이란 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기태에게는 보석 같은 아이였다. 그리고 기태가 없으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던 아이였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어젯밤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안겨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듯 기태를 부르던 이 아이의 울음 같은 웅얼거림, 기태 오빠…….

‘젠장! 빌어먹을!’

어젯밤에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그 말이 새삼 강하게 와 닿자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왜 기태의 행방을 알아봐 줘야 하는 거야?”

태수의 신경질적인 소리에도 혜린은 똑바른 시선으로 그를 향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혜린의 모습은 어젯밤 처녀를 잃은 여자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 처음을 가져간 빚 갚음이라면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