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낸 외로운 여자, 정은수, 부드러우면서도 세상에 대해, 거기다 안 좋은 기억으로 남자에 대해 대단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만큼은 헌신적으로 사랑을 쏟으며 일에만 열정을 쏟기에 바쁘던 그녀에게 한 남자, 10년 전 잠시 스쳐갔던 남자, 이젠 원생의 부친 자격으로 끈질긴 구애를 하는 남자, 김정우의 노력에 어느 정도 마음이 열리기나 하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열리지 못하는데…….

“세연이 때문이 아니야. 처음엔 아이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리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어. 그래, 아이 핑계대면서 매일 봤지. 그게 지금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잖아. 포항에서 그리고 여기에서……. 서로 싱글인 남자와 여자, 정분나고도 남는 시간이야. 내가 무뎌서 그렇지, 진작 알았다면 결혼을 하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이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봐야 짝사랑이라고요. 전 선생님한테 손톱만큼도 다른 감정 없어요.”
“아니잖아. 두려운 거야. 10년 전 그 일 때문에 아직도 남자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거라고……. 안 그래?”
“왜 자꾸 그 일을 거론하시는 거예요?”
“그만 잊으라고, 빠져 나오라고, 꽁꽁 숨겨두면 절대 그 속에서 못 벗어나니까. 이제부터라도 벗어나라고 하는 거야. 아직까지 못 벗어나고 있잖아.”
“벗어났어요. 설마 10년 전 그 일 때문에 내가 선생님을 거부한다고 생각해요? 틀렸어요. 난 그딴 거 신경 안 써요. 이미 오래전에 내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웠다고요!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미친년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유혹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내 잘못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수치스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나 남자들 여럿 만나봤어요. 사랑이라는 것도 여러 번 했고요.”
“섹스는? 그것도 했어? 그때 그 남자, 널 겁탈하려고 했다면서, 한 번도 취하지 못해서 그게 미련이 남아서 덮친 거라면서!”
“어떻게 알았어요? 내 뒷조사까지 하고 다닌 거예요?”
“그래, 그랬어. 그건 일단 나중에 때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하고 지금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한 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어. 그렇지?”
“그래요. 하지만 내가 일부러 싫다고 한 거 아니에요! 단지 그걸 못 기다리고 도망치듯 가버리는 그 남자들이 문제인 거죠. 왜 내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해야만 하는 거죠? 오래전 만신창이가 된 기억을 못 버리고 섹스에 조금 기피를 보였다고, 왜 그러냐고 물으면서 모든 다 말해보라고 할 때는 언제고, 막상 듣고 나서는 내가 평생 섹스를 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지어버렸어요. 지들 멋대로! 내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노력하면 되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주고 날 사랑한다면 충분히 배려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하긴 선생님도 남자니까 똑같이 그럴 거예요.”
“아냐.”
“맞을 거예요. 특히나 당신은 더 더욱 그럴지도 모르죠. 내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처음으로 본 사람이니까. 그게 지워지기나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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