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결혼하기로 했던 개자식이 내일 결혼해. 다른 여자랑.”
허름한 포장마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설랑이 소주 한 병을 바닥내고 처음으로 튼 말문이었다. 근처 주차장에 차를 넣어 두고 한 잔이라는 약속과 달리 한 병을 다 비우도록 그저 그녀의 잔만 채워 주던 다니엘은 기회를 찾지 못해 입 안에만 담아 두던 위로를 건넸다.
“지금은 괴로우시겠지만 곧 더 좋은 인연이…….”
다니엘의 틀에 박힌 위로 따위는 귀에 들리지 않는 설랑은 슬슬 입매를 늘였다.
“죽여 버릴 거야. 갈기갈기 찢어서.”
무슨 기분 좋은 일을 말하기라도 하는 듯 고혹적인 미소까지 곁들인 설랑의 다짐은 다니엘의 본능을 일깨웠다.
“복수로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설랑이 다니엘을 쳐다보며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행…… 복?”
다니엘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는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내가 망가지면 복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의 죄는 사람이 단죄할 수 없는 법입니다. 죄인을 벌할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이시고, 그분은 죄를 지은 자들을 그저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설랑은 눈을 가늘게 만들어 다니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스물넷, 스물다섯 살이나 됐을까? 희고 고운 피부에 남자라기보다는 소년처럼 곱게 생긴 것이 취객들을 상대하는 대리운전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천장까지 이은 책 더미 속에 살 거나 아니면 십자가가 있는 곳이 어울리는 그에게 물었다.
“교회 다니니?”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중요한 한 마리의 양 같은 설랑을 위로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다만 너무 늦은 시간, 분명 성별이 다른 여자 양과 술병을 두고 앉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부인을 해 버렸다.
“아, 아니요.”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을 하는 유전 인자를 갖지 못한 다니엘의 어설픈 거짓말은 설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행복해 볼까?”
세상 모든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다니엘이 설랑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반겼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를 가지고 있고 손님은 더욱더…….”
설랑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팔찌를 찬 손을 귀 옆으로 쭉 뻗어 올려 올바른 선택을 한 저를 칭찬하는 다니엘의 말을 잘랐다.
“여기요.”
서빙하는 아주머니가 오자 설랑은 저를 행복하게 해 줄 유일한 것을 주문했다.
“소주 다섯 병 더요.”
이미 많이 취했고 ‘소주’라는 소리만 들어도 토기가 쏠리는 다니엘은 설랑을 말렸다.
“그만 드십시오.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설랑은 세상 사내라면 누구도 뿌리치지 못할 만개한 모란 같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마시자.”
더불어 약속했다.
“나랑 마셔 주면 행복해져 볼게.”
외로웠다. 저와 밤을 보낼 이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섹스할 상대가 없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상대를 찾자면 굳이 돈을 뿌리지 않고서라도 양껏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착한 교회 동생처럼 처음 보는 제가 걱정스러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대리운전 기사라면 저를 소름 끼치는 외로움에서 조금이라도 끄집어내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부린 설랑의 억지에 다니엘은 갈등했다.
‘옳지 않아.’
백 번, 천 번 뿌리쳐야 옳았다. 아무리 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고독을 호소하고 있다손 쳐도 저는 손님을 안전히 집까지 모셔야 하는 대리운전 기사일 뿐이고, 상대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일 따름이다. 소주 다섯 병을 나눠 마셔야 할 어떤 이유도 없는 것이다. 또 주차장에 세워 둔 차는 어떻게 하며 손님과 저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온통 함께 술을 마실 수 없는 이유뿐인데 입술이 멋대로 열리고 말았다.
“행복해지셔야 합니다.”
설랑은 그대로 두면 벼랑 아래로 몸을 날릴지도 모를 한 마리의 양을 못 본 체할 수 없는 목자 다니엘에게 미소로 약속했다.
“응.”
곧 소주 다섯 병과 서비스 안주가 도착했고 설랑은 잔을 들었다.
“자.”
다니엘은 소주 한 병의 주량이 부디 두 병 반으로 늘어나길 기도하며 소주병 마개를 비틀어 설랑의 잔을 먼저 채우고 제 잔을 채웠다.
“건배.”
투명한 두 개의 잔이 마주쳤고 쓴맛이라고는 없이 다디단 차가운 술은 슬프고 안타까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