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드 보헌은 성의 돌벽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으슥한 곳에 서서, 창문 너머 앉아 있는 조카를 아스라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조카 ‘로완’의 금빛 머리칼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고, 앞에 두루마리를 펼쳐놓고선 뭔가를 검토하는지 잘생긴 얼굴을 연신 찌푸렸다. 윌리엄은, 이 젊은이가 수년 동안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굳이 생각하기 싫었다. 로완을 영원토록 곁에 두고 싶었는데…….
윌리엄은 큰 키에, 넓은 어깨, 날렵한 엉덩이를 지닌 잘생긴 로완을 바라보면서, 또다시 어떻게 그 검고 못생긴 ‘탈’이 로완 같은 사랑스런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지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일었다. 탈은 스스로를 ‘랑코니아 왕’이라고 내세웠지만, 짐승같이 거칠고 칙칙한 피부에 더부룩하고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으며, 야만인처럼 게걸스레 먹고 말투 또한 상당히 거칠었다. 처음 본 순간 윌리엄은 그를 혐오하는 마음이 앞서, 에드워드 왕의 요청이 있을 때만 그를 집으로 초대하곤 했다. 탈이 집에 머무는 동안 윌리엄은 그를 손님으로 소홀함이 없이 대접하면서, 집사에게 그 시끄럽고 교양없는 속물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도록까지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윌리엄은 그 소름끼치는 낯선 젊은이와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져서 지냈다.
지금 탈의 아들 로완을 보면서 고통스런 기억의 단편이 떠오르자, 윌리엄은 가슴이 옥죄는 것만 같았다. 윌리엄이 그 야만스런 랑코니아 왕에게서 멀리 떨어져 바쁘게 보내는 동안, 아름답고 친절하며 사랑스런 여동생이 그 지지리 못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가 깨달았을 즈음엔 여동생 앤은, 탈과 헤어진다면 자살하겠다고 맹세할 정도로 이미 그 남자에게, 깊이 사로잡힌 상태. 그러나 미련하고 야만스런 탈은 그녀의 자살 맹세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모양인지, 앤의 숭고한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 하는 듯했다.
윌리엄은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며 그녀의 마음을 바꿔보려 했지만, 그녀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윌리엄은 탈의 혐오스런 모습을 지적했으나, 앤은 마치 어리석다는 듯이 오빠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가 암만 뭐라 해도, 그는 여자에겐 혐오스럽지 않아요.」
앤의 날씬하고 흰 피부를 더듬는 기름기 많은 남자의 시커먼 손을 상상할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윌리엄의 불쾌감을 북돋기라도 하듯 그녀가 웃으면서 윌리엄의 말을 막아섰다.
결국, 에드워드 왕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는 랑코니아 인(人)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들은 매우 거친데다 그들의 왕이 부유한 영국 신부를 원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래서 랑코니아의 탈 왕은 윌리엄의 아름다운 여동생과 결혼했다. 윌리엄은 제발 이 모든 일이 상상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열흘 동안 줄 곧 술에 취해 지냈다. 하지만 그가 만취의 마비 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본 장면은, 여동생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크고, 이글거리는 구릿빛 혈색의 탈이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동생을 온몸으로 감싸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홉 달 후에 로완이 태어났다. 윌리엄은 순간 푸른 눈동자, 상아빛 피부에 곱슬거리는 금발의 예쁜 아기에 폭 빠져들었다. 자식 없는 권태로운 결혼 생활을 하던 그는 로완이 태어나자,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아기에게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탈은 아기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흥! 갓난아이들이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며 칭얼거리다가 끝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아이들은 여자의 몫이야. 난 그애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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