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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불꽃 같은 전쟁 2권

서미선 지음도서출판 가하201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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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소개
나로 인해 두 번 다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하루에도 수만 번 그녀에게 달려가려는 심장을 부여잡기 위해 칼로 나 자신을 후벼팠어. 고통이 커지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으니까.
사랑했지만 헤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7년 후 찾아온 기회를 더 이상 놓칠 수는 없다! 진아의 앞에 다가갈 자격을 되찾은 선민은 이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려 하는데…….
* 이 작품은 ‘부부’와 시리즈입니다.
2. 작가 소개
서미선
필명 소나기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세 남자와 매일 싸우는 게 하루 일과.
▣ 출간작
〈후견인〉, 〈루비레드〉, 〈잔인한 사랑〉, 〈가면〉, 〈카인과 아벨〉, 〈부부〉, 〈지독한 거짓말〉, 〈피의 베일〉, 〈넌 내게 지옥이었어〉, 〈되찾은 약혼녀〉, 〈아내〉, 〈레드 러브〉, 〈백설화〉, 〈도령〉, 〈홍분지기〉 외 다수
3.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에필로그
4. 미리 보기
아침이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보며 따가운 눈을 비볐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운전하고 왔는지 아직까지 정신이 몽롱했다. 몸은 여기저기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워, 움직이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절로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날 새는 것도 쉽지 않았고 밤을 새운 날은 며칠 동안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늙었어.”
진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반짝거리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인지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방 현장에 일이 아무리 많아도 될 수 있으면 당일치기를 고수했다.
그런데 어제는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고생을 여간 한 게 아니었다. 날은 어둡고 초행길이라 사람들이 가르쳐준 대로 차를 몰았는데, 고속도로는 보이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차를 모는 바람에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차바퀴가 빠져 옴쭉달싹을 못한 채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위치도 잘 모르는데 휴대전화 배터리도 다 되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근처를 지나가는 차가 있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에는 이미 새벽 5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서울이라는 이정표를 보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순환 도로를 타고 낯익은 건물을 보았을 때의 반가움이란…….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지친 몸을 길게 뻗었다. 아침 시작을 알리는 아파트 단지 안의 불빛을 보며, 몇 년 전 방송에서 동시에 불을 끄고 켰던 쇼 프로가 생각났다. 각자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들이 달라서인지 군데군데 켜져 있는 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웠다.
“이제 도착했다.”
진아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두 팔을 길게 뻗었다. 우두둑 뼈 소리가 나면서 몸의 근육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시동을 끄고 뒷좌석에 놓아둔 쇼핑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아이가 깨려면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했지만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평소라면 아이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것저것 준비물이라도 챙겨줄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문을 닫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 아저씨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더니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학생들과 직장인, 운동을 가는 노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오전 6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대단하다. 이 시간에…….”
감탄 섞인 목소리 때문인지 빙긋 미소로 답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자신을 보며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학생이 거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
학생은 대답 대신 얼굴과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이상하니?”
처음 보는 학생에게 묻자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재미있어하나 싶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고 신발과 옷, 심지어 머리카락에까지 흙이 딱딱하게 굳은 것 외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이유가 없었다. 직업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꾸미고 가꾸는 쪽과는 인연이 없었다.
“별것도 아닌 것 같고…….”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조금 전 그녀에게 거울을 보라며 가리켰던 학생이 계속해서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 아줌마.”
더듬거리는 학생을 보며 진아는 오른손을 흔들었다.
“늘 있는 일이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놀랐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멎자 주머니에 있던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달칵 소리가 나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한숨 섞인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제 오니?”
“기다리지 말라니까. 나 때문에 한숨도 못 잔 것 아냐?”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걱정으로 뜬눈을 새웠는지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보였다.
“차는 괜찮니?”
“응. 들어가서 조금 더 자. 괜히 나 때문에 형부도 잠 못 자고 있는 것 아니야?”
자신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은 언니였다.
“아니야. 그 사람 벌써 운동 갔어. 운석이 보고 잘래?”
“그러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피곤해. 녀석도 자야지, 괜히 나 때문에 못 자면 어떡해.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그냥 참을래.”
“그래. 너도 피곤해 보여. 꼴도 말이 아니고……. 꼭 씻고 자라.”
“네.”
거수경례를 한 뒤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향했다. 윤아 역시 처음에는 지저분한 그녀의 모습에 놀랐지만 가까이서 10년 이상을 같이 지내다 보니, 이제 웬만한 일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커다랗게 소리쳤다.
“언니, 이대로 저녁까지 잘 거야. 나 건드리지 마.”
“알았다.”
씻고 자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너무 피곤하다 보니 침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드러눕자마자 1분도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포기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루에 수천 번씩 하는데도 불구하고 진아 얼굴만 보면 한숨부터 나왔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성격 때문에 뭐가 되어도 크게 될 거라 했던 어른들의 말이 맞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똑똑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질렀는지…… 부모님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막내인 진아에게만은 이상하리만큼 너그러웠다.
한번은 이유를 묻는 자신에게 어머니는 너무 쉽게 대답해주었다.
“세상이 바뀌었잖니.”
그 한마디가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세상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설마 내 엄마에게까지 그런 힘이 미쳤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달나라를 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진아가 저지른 일은 너무 엄청났다.
“그……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이 떨려 나왔다. 결혼도 안 한 진아가 임신한 일도 기가 막힌데, 아이까지 낳는다는 말에 아버지는 아랫목에 앉아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아버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충격일 뿐이지만 두 분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니. 진아의 선택에 맡겨야지.”
그때 부모라는 존재가 자식 앞에 얼마나 거대한 산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업신여겨도 부모만큼은 그 모든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큰딸인 자신과 남동생이 가장 먼저 든 마음은 창피함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려는 자신과 달리, 진아의 고집은 완고했다. 그래서 비밀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결국 부모님까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고집을 피운다고 될 일이 아니야.”
“언니, 오빠. 내 뜻대로 하게 내버려둬요. 식구들에게 피해는 가지 않도록 할게요. 없는 사람처럼 쥐 죽은 듯 조용히 살 거라고 약속해.”
어이도 없었고 기도 막혔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 해야 할지…….
“후회할 거야.”
“지금도 후회해. 하지만 언니, 이 아이를 지우면 더 후회할 것 같아.”
결심을 단단히 한 듯 진아는 자신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로 하고 말았다. 물론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와서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운석을 보며 지우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로 인해 제 기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진아를 볼 때마다 가슴이 에어왔다.
“미련한 것.”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리는데, 여진이 등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휴, 놀라라.”
“엄마 이모 왔어요?”
“인기척이라도 해야지.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죄송해요. 근데 애 떨어졌다는 말은 좀 그렇다.”
말을 해놓고 보니 자신 역시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하필 애라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셨기에 놀라셨어요.”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고……. 그보다 이모한테 가지 마라. 밤새 운전하고 와서 조금 전에야 도착했어.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그 얘기 해줘야 하는데.”
“나중에 해도 되잖니.”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아는 모른 척했다. 지금 다른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아마 네 이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설마, 본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여진의 자신 없어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렸지만 성격이 급한 여진은 진아네 집으로 갈 게 분명했다. 처음 여진이 공모전에 입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디자인한 옷을 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보나마나 진아는 못한다고 펄쩍 뛸 게 분명했다. 여자라기보다 선머슴에 가까운 진아가 그 옷을 입으면 어떤 모습일지 자신 역시 몹시 궁금했다.
“네 이모 설득할 수 있겠니?”
“해봐야죠. 엄마도 이모가 그 옷 입으면 너무 예쁘겠다고 생각하지.”
“글쎄?”
자신 없어하는 그녀의 말에 여진이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만큼이나 엄마도 궁금해하고 있잖아. 이모가 여자 옷을 입은 것을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나도 한번 보았으면 좋겠어요.”
여진이 웃으며 부엌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윤아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릴 때부터 진아는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솔직히 자신이 봐도 진아는 무척 예뻤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윤아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드리워졌다.
요란스럽게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깊은 잠에 빠진 진아의 귀에는 그저 작은 소음에 불과했다. 이것저것 들추는 소리가 들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지만 잠들어 있는 진아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발끝에 매달려 있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지만 마치 귀머거리라도 되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모.”
부르다 지쳤는지 이제는 주먹으로 방문을 쾅쾅 쳐대기 시작했다. 두드리는 걸로 보아 자신이 나올 때까지 계속 두드릴 것 같았다. 밤새 운전하고 오느라 너무 피곤한 데다 진흙탕 속에 차가 처박히는 바람에 시간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걸려서야 간신히 집에 돌아왔는데, 저 마귀 같은 조카 때문에 황금 같은 잠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 뒤에 있는 조카 역시 쉬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으으윽…… 미치겠네.”
발에 말고 있던 이불을 거세게 차내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잠겨 있는 문을 열었다.
“이모.”
자신을 부르는 여진의 목소리에 손사래를 치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진이 손을 잡아끌었다.
“나 피곤해. 얼마 전에야 도착해서 이제 막 잠들었단 말이야.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했어.”
“당연히 했지. 이모 피곤하니까 절대 건드리지 마라, 제때 잠을 못 자면 사람이 피곤해서 안 된다는 둥, 엄마에게 있는 잔소리 없는 잔소리 들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모의 사정을 봐줄 수가 없어.”
분명, 여진의 말의 반은 거짓말일 게 뻔했다.
“사랑스런 내 조카 여진아, 이 불쌍한 이모 조금만 봐주라.”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그런 자신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진은 거칠게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단 말이야.”
“나중에. 잠 좀 자자.”
“안 돼. 1, 2분 정도만 시간 내주면 된단 말이야. 죽으면 평생 잘 잠이잖아.”
“여……진아…….”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면 제아무리 그녀라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진아는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여진의 말을 듣고 잠을 자는 게 나중을 위해서 더 편했다. 그래서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여진을 바라보았다.
“얘기해.”
다시 한 번 하품을 길게 내뱉고 고개를 끄덕이자 여진은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붙잡았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잖아. 공모전에 작품 냈다고.”
“그래.”
“우리가 입상했어.”
“그래? 야, 잘됐네.”
“이모랑 나랑 동시에 같이 나가야 한단 말이야. 치수도 재고…….”
“알았어.”
진아는 조카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을 하긴 하는데 잠결에 듣는 소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아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진이 계속 두드리고 흔들어 깨웠지만 물먹은 솜처럼 지친 몸은 그날 저녁이 다 되어가는 동안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진아가 눈을 뜬 것은 저녁밥을 먹고 치울 때쯤, 그녀를 깨우는 사랑스런 아이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오, 사랑스런 우리 아들.”
도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 오늘도 어김없이 흐릿한 서울 하늘은 가을 하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하루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일에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철야를 했는지 사무실에는 자신이 출근할 때까지 퇴근하지 못한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연예계의 생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은 배우나 매니저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날짜를 정하는 매니저들을 보며 선민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향긋한 커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좋은 아침입니다.”
경쾌한 음성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신을 보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별로세요?”
“내가 그렇게 보이나?”
비서인 미현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는 것이 때론 고마울 때도 있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는 무심함이 더 좋았다. 그래서 질문에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나중에 보면 안 될까?”
“바쁜 서류는 아닙니다.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더니 방금 전에 뽑아놓은 커피를 내밀었다. 울적한 기분을 알기라도 한 듯 초콜릿 하나까지 준비해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미소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부르세요.”
미현이 나가고 홀로 남은 선민은 커피를 창틀에 올려놓은 뒤 살짝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휘경과의 결혼 생활은 몇 달이 모자란 7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은 7년이란 세월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한 여자와 맺은 결혼이라는 언약은 쇠사슬이었고,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창살 안에 갇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면서, 언젠가는 자유가 자신의 손안에 떨어질 날을 고대하며 힘들었던 세월을 힘겹게 버텨낼 수 있었다. 마음은 당장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라 재촉하고 있었지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었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온몸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풀려난 것처럼 개운하기는 한데 마음은 생각했던 만큼 편하지 않았다. 하나가 둘이 되었고 둘이 셋이 되어 가정을 이루며 살아온 7년이 어제부로 몇 장의 종이와 사인으로 남이 되어버렸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 들였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 간단했고 쉬웠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로 인해 가슴이 아팠다.
“당신, 후회 안 할 자신 있나요?”
어제 모든 것을 정리하며 묻던 휘경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자신의 삶에 웃음을 주었던 희성을 생각하자 답변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 여자한테 갈 건가요?”
휘경의 질문에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선민은 몸 안의 모든 신경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컵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몸의 신경을 최대한 편하게 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 여자라니?”
“송진아!”
휘경의 입에서 이름을 듣는 순간, 누군가 목을 죄다 손을 놓아버린 것처럼 맥이 탁 풀렸다. 진아와 헤어진 뒤 단 한 번도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비밀 금고처럼 가슴에 열쇠를 채워놓았고, 얼마 전 선우에게서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조차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런데…… 휘경의 입에서 진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의 입에 오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너무 사랑하는 여자라서요?”
표독스럽기까지 한 휘경의 목소리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호흡을 한 번 길게 내뿜었을 뿐이었다.
“우리 얘기만 하지.”
“7년 동안 허수아비를 껴안고 산 내 마음을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죠.”
“스스로 그런 삶을 원한 게 아니었나? 난 처음부터 분명히 밝혔어.”
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휘경이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이나 나, 과거에 연연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들 아니잖아.”
“맞아요. 누군가에게 지는 것도 빼앗기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나예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커왔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물을 감추기 위한 행동인지 아니면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휘경의 그런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 자신이 한 번도 모자라다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란 사람과 살면서 나락까지 떨어졌어요.”
“날 원망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휘경의 표정에 그 또한 원망이 일었다.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만약 당신이 내 눈에 띄지 않았다면, 아니, 아버지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런 후회가 나를 괴롭혀요.”
언제나 자신만 피해자라 생각했던 선민은 갑자기 휘경에게 동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를 가진 시은에게 한 행동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당신을 원망했어. 당신이 나를 원망했던 것 이상으로 말이야. 하지만 당신이 한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알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지금도 내가 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때는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 자리를 확고하게 해놓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었어요. 물론 희생양이 시은 씨가 되고 말았지만요.”
한 번도 휘경이 자신의 행동에 잘못했다는 마음을 갖게 될 날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은 까닭에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군.”
“우스울 것 없어요. 나이 30이 넘어가면서 이제야 철이 들어가는 거니까요.”
휘경의 말에 선민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의 입가도 보일 듯 말 듯 살짝 치켜올라갔다.
“이런 말 하는 나도 믿어지지 않는데, 당신이야 오죽하겠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이제야 후회되는 게 너무 많아요. 그중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던 나예요. 그런 내 자신이 이제는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아요.”
마치 속마음을 알아내려는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자 그 자리가 갑자기 몹시 불편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점만 간단히 얘기하는 게 좋아. 무엇보다 지금 당신의 넋두리 들어줄 만큼 나 한가한 사람 아니라는 것 알잖아.”
휘경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에 편할 줄 알았던 처음 심정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 마주 앉은 자리가 답답해왔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기만 했을 뿐, 실제로 무엇인가를 공유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과거 얘기를 꺼내는 휘경을 보며 펼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모아 쥐었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군요. 가끔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깨지지 않을까. 사람 냄새를 풍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며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보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았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 씁쓸함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그런 휘경의 표정을 보니 괜히 자신이 휘경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두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서로의 연결 고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힐끔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보며 휘경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 붙잡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휘경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존심 역시 강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휘경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붙잡는 게 부담이 되었다.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상치 않은 말에 놀란 듯 휘경의 눈가에 살짝 잔주름이 가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긴장되는데요.”
“그렇게 조롱하지 않아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그래요?”
믿어지지 않는 듯 곱게 색을 입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행동이라 그런지 그의 시선은 그 모습에 못 박혀 있었다.
“보지 말아요. 그보다 당신이 묻고 싶은 게 뭐예요.”
“지금껏 당신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기고 지는 것 말고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해.”
그녀는 무슨 의도로 묻는지 알아보려는 듯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왜요?”
“그냥.”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조금 의외네요. 이런 날이 올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것 같아요. 이혼하기 전에 그런 마음을 가져주었더라면 훨씬 인간적으로 보였을 거예요.”
“내게 사과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한번쯤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면 좋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휘경의 성격에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우스웠는지 그녀는 피식 웃는 소리를 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뜨거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점이에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가정주부이기도 하고요. 설마, 날 인간으로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죠.”
한 번도 휘경의 감정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7년이 다 되어가도록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당한 선을 유지했고 그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렇다고 지금 와서 새삼스레 휘경에게 감정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 없는 그를 보며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당신의 그 솔직함이 너무 싫을 때가 있어요. 그 때문에 당신을 포기하는 게 지금은 쉬워요.”
“그래. 우리 이쯤에서 끝내자.”
일어서려는데 가냘픈 손이 그를 붙잡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날 여자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그리고 우리는 단지 잘못 엮였을 뿐이야. 아마,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이내 말문을 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와서 과거의 것들을 얘기해보았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이 내게 질문을 던졌으니까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목이 마른지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눈빛 또한 지금까지 보아 온 것과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결혼해 살면서 그 여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나요?”
“한 번도.”
망설임 없는 자신의 답변에 놀라 커다랗게 치켜뜬 눈동자에 의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말?”
“날 그렇게 모르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백을 집어 들었다.
“당신,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아요.”
“알아. 그녀를 내 심장에 묻었던 날부터 그녀에 대한 자격을 상실한 나야. 너와 결혼한 순간부터 맹세했어. 나로 인해 두 번 다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하루에도 수만 번 그녀에게 달려가려는 심장을 부여잡기 위해 칼로 나 자신을 후벼팠어. 고통이 커지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으니까.”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휘청거리는 휘경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보았다.
“독한 사람.”
억눌린 듯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휘경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선민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나로 인해 두 번 다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하루에도 수만 번 그녀에게 달려가려는 심장을 부여잡기 위해 칼로 나 자신을 후벼팠어. 고통이 커지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으니까.
사랑했지만 헤어져야만 했다. 하지만 7년 후 찾아온 기회를 더 이상 놓칠 수는 없다! 진아의 앞에 다가갈 자격을 되찾은 선민은 이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려 하는데…….
* 이 작품은 ‘부부’와 시리즈입니다.
2. 작가 소개
서미선
필명 소나기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세 남자와 매일 싸우는 게 하루 일과.
▣ 출간작
〈후견인〉, 〈루비레드〉, 〈잔인한 사랑〉, 〈가면〉, 〈카인과 아벨〉, 〈부부〉, 〈지독한 거짓말〉, 〈피의 베일〉, 〈넌 내게 지옥이었어〉, 〈되찾은 약혼녀〉, 〈아내〉, 〈레드 러브〉, 〈백설화〉, 〈도령〉, 〈홍분지기〉 외 다수
3.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10장
11장
에필로그
4. 미리 보기
아침이 밝아오는 동쪽 하늘을 보며 따가운 눈을 비볐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운전하고 왔는지 아직까지 정신이 몽롱했다. 몸은 여기저기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워, 움직이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절로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 날 새는 것도 쉽지 않았고 밤을 새운 날은 며칠 동안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늙었어.”
진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반짝거리고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인지 서울에 도착했을 때에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방 현장에 일이 아무리 많아도 될 수 있으면 당일치기를 고수했다.
그런데 어제는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고생을 여간 한 게 아니었다. 날은 어둡고 초행길이라 사람들이 가르쳐준 대로 차를 몰았는데, 고속도로는 보이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차를 모는 바람에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에 차바퀴가 빠져 옴쭉달싹을 못한 채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위치도 잘 모르는데 휴대전화 배터리도 다 되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근처를 지나가는 차가 있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시간을 확인했을 때에는 이미 새벽 5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그곳을 빠져나와 서울이라는 이정표를 보았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순환 도로를 타고 낯익은 건물을 보았을 때의 반가움이란…….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지친 몸을 길게 뻗었다. 아침 시작을 알리는 아파트 단지 안의 불빛을 보며, 몇 년 전 방송에서 동시에 불을 끄고 켰던 쇼 프로가 생각났다. 각자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들이 달라서인지 군데군데 켜져 있는 불빛이 오늘따라 유난히 반가웠다.
“이제 도착했다.”
진아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두 팔을 길게 뻗었다. 우두둑 뼈 소리가 나면서 몸의 근육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시동을 끄고 뒷좌석에 놓아둔 쇼핑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아이가 깨려면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했지만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평소라면 아이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것저것 준비물이라도 챙겨줄 텐데, 오늘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문을 닫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 아저씨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더니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학생들과 직장인, 운동을 가는 노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오전 6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대단하다. 이 시간에…….”
감탄 섞인 목소리 때문인지 빙긋 미소로 답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자신을 보며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학생이 거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
학생은 대답 대신 얼굴과 머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이상하니?”
처음 보는 학생에게 묻자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재미있어하나 싶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고 신발과 옷, 심지어 머리카락에까지 흙이 딱딱하게 굳은 것 외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 이유가 없었다. 직업이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꾸미고 가꾸는 쪽과는 인연이 없었다.
“별것도 아닌 것 같고…….”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조금 전 그녀에게 거울을 보라며 가리켰던 학생이 계속해서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 아줌마.”
더듬거리는 학생을 보며 진아는 오른손을 흔들었다.
“늘 있는 일이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자신에게 놀랐는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서 멎자 주머니에 있던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달칵 소리가 나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한숨 섞인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제 오니?”
“기다리지 말라니까. 나 때문에 한숨도 못 잔 것 아냐?”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걱정으로 뜬눈을 새웠는지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보였다.
“차는 괜찮니?”
“응. 들어가서 조금 더 자. 괜히 나 때문에 형부도 잠 못 자고 있는 것 아니야?”
자신의 말에 윤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나이가 많은 언니였다.
“아니야. 그 사람 벌써 운동 갔어. 운석이 보고 잘래?”
“그러고 싶은데 지금은 너무 피곤해. 녀석도 자야지, 괜히 나 때문에 못 자면 어떡해.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그냥 참을래.”
“그래. 너도 피곤해 보여. 꼴도 말이 아니고……. 꼭 씻고 자라.”
“네.”
거수경례를 한 뒤 신발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향했다. 윤아 역시 처음에는 지저분한 그녀의 모습에 놀랐지만 가까이서 10년 이상을 같이 지내다 보니, 이제 웬만한 일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게 되었다.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커다랗게 소리쳤다.
“언니, 이대로 저녁까지 잘 거야. 나 건드리지 마.”
“알았다.”
씻고 자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너무 피곤하다 보니 침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았다. 드러눕자마자 1분도 지나지 않아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포기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루에 수천 번씩 하는데도 불구하고 진아 얼굴만 보면 한숨부터 나왔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내로라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성격 때문에 뭐가 되어도 크게 될 거라 했던 어른들의 말이 맞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똑똑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저질렀는지…… 부모님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막내인 진아에게만은 이상하리만큼 너그러웠다.
한번은 이유를 묻는 자신에게 어머니는 너무 쉽게 대답해주었다.
“세상이 바뀌었잖니.”
그 한마디가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세상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설마 내 엄마에게까지 그런 힘이 미쳤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달나라를 가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진아가 저지른 일은 너무 엄청났다.
“그……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이 떨려 나왔다. 결혼도 안 한 진아가 임신한 일도 기가 막힌데, 아이까지 낳는다는 말에 아버지는 아랫목에 앉아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아버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충격일 뿐이지만 두 분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니. 진아의 선택에 맡겨야지.”
그때 부모라는 존재가 자식 앞에 얼마나 거대한 산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았다.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업신여겨도 부모만큼은 그 모든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큰딸인 자신과 남동생이 가장 먼저 든 마음은 창피함이었다. 어떻게든 일을 자연스럽게 처리하려는 자신과 달리, 진아의 고집은 완고했다. 그래서 비밀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결국 부모님까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고집을 피운다고 될 일이 아니야.”
“언니, 오빠. 내 뜻대로 하게 내버려둬요. 식구들에게 피해는 가지 않도록 할게요. 없는 사람처럼 쥐 죽은 듯 조용히 살 거라고 약속해.”
어이도 없었고 기도 막혔다.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 해야 할지…….
“후회할 거야.”
“지금도 후회해. 하지만 언니, 이 아이를 지우면 더 후회할 것 같아.”
결심을 단단히 한 듯 진아는 자신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대로 하고 말았다. 물론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와서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운석을 보며 지우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로 인해 제 기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진아를 볼 때마다 가슴이 에어왔다.
“미련한 것.”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몸을 돌리는데, 여진이 등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휴, 놀라라.”
“엄마 이모 왔어요?”
“인기척이라도 해야지.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
“죄송해요. 근데 애 떨어졌다는 말은 좀 그렇다.”
말을 해놓고 보니 자신 역시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하필 애라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셨기에 놀라셨어요.”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고……. 그보다 이모한테 가지 마라. 밤새 운전하고 와서 조금 전에야 도착했어.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그 얘기 해줘야 하는데.”
“나중에 해도 되잖니.”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아는 모른 척했다. 지금 다른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아마 네 이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설마, 본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
여진의 자신 없어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렸지만 성격이 급한 여진은 진아네 집으로 갈 게 분명했다. 처음 여진이 공모전에 입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디자인한 옷을 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보나마나 진아는 못한다고 펄쩍 뛸 게 분명했다. 여자라기보다 선머슴에 가까운 진아가 그 옷을 입으면 어떤 모습일지 자신 역시 몹시 궁금했다.
“네 이모 설득할 수 있겠니?”
“해봐야죠. 엄마도 이모가 그 옷 입으면 너무 예쁘겠다고 생각하지.”
“글쎄?”
자신 없어하는 그녀의 말에 여진이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만큼이나 엄마도 궁금해하고 있잖아. 이모가 여자 옷을 입은 것을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나도 한번 보았으면 좋겠어요.”
여진이 웃으며 부엌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윤아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릴 때부터 진아는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솔직히 자신이 봐도 진아는 무척 예뻤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윤아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드리워졌다.
요란스럽게 귓가를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깊은 잠에 빠진 진아의 귀에는 그저 작은 소음에 불과했다. 이것저것 들추는 소리가 들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지만 잠들어 있는 진아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발끝에 매달려 있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지만 마치 귀머거리라도 되는 듯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모.”
부르다 지쳤는지 이제는 주먹으로 방문을 쾅쾅 쳐대기 시작했다. 두드리는 걸로 보아 자신이 나올 때까지 계속 두드릴 것 같았다. 밤새 운전하고 오느라 너무 피곤한 데다 진흙탕 속에 차가 처박히는 바람에 시간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걸려서야 간신히 집에 돌아왔는데, 저 마귀 같은 조카 때문에 황금 같은 잠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 뒤에 있는 조카 역시 쉬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으으윽…… 미치겠네.”
발에 말고 있던 이불을 거세게 차내고 졸린 눈을 비비며 잠겨 있는 문을 열었다.
“이모.”
자신을 부르는 여진의 목소리에 손사래를 치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진이 손을 잡아끌었다.
“나 피곤해. 얼마 전에야 도착해서 이제 막 잠들었단 말이야.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했어.”
“당연히 했지. 이모 피곤하니까 절대 건드리지 마라, 제때 잠을 못 자면 사람이 피곤해서 안 된다는 둥, 엄마에게 있는 잔소리 없는 잔소리 들었지. 하지만 지금은 이모의 사정을 봐줄 수가 없어.”
분명, 여진의 말의 반은 거짓말일 게 뻔했다.
“사랑스런 내 조카 여진아, 이 불쌍한 이모 조금만 봐주라.”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그런 자신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진은 거칠게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웠다.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단 말이야.”
“나중에. 잠 좀 자자.”
“안 돼. 1, 2분 정도만 시간 내주면 된단 말이야. 죽으면 평생 잘 잠이잖아.”
“여……진아…….”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면 제아무리 그녀라도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진아는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여진의 말을 듣고 잠을 자는 게 나중을 위해서 더 편했다. 그래서 졸린 눈을 간신히 뜨고 여진을 바라보았다.
“얘기해.”
다시 한 번 하품을 길게 내뱉고 고개를 끄덕이자 여진은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붙잡았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했잖아. 공모전에 작품 냈다고.”
“그래.”
“우리가 입상했어.”
“그래? 야, 잘됐네.”
“이모랑 나랑 동시에 같이 나가야 한단 말이야. 치수도 재고…….”
“알았어.”
진아는 조카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무엇인가 열심히 설명을 하긴 하는데 잠결에 듣는 소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아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여진이 계속 두드리고 흔들어 깨웠지만 물먹은 솜처럼 지친 몸은 그날 저녁이 다 되어가는 동안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진아가 눈을 뜬 것은 저녁밥을 먹고 치울 때쯤, 그녀를 깨우는 사랑스런 아이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오, 사랑스런 우리 아들.”
도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 오늘도 어김없이 흐릿한 서울 하늘은 가을 하늘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하루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일에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철야를 했는지 사무실에는 자신이 출근할 때까지 퇴근하지 못한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연예계의 생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은 배우나 매니저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인터뷰 날짜를 정하는 매니저들을 보며 선민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평소와 다름없는 향긋한 커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좋은 아침입니다.”
경쾌한 음성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자신을 보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분이 별로세요?”
“내가 그렇게 보이나?”
비서인 미현이 자신의 감정 상태를 꼼꼼히 체크하는 것이 때론 고마울 때도 있지만 오늘처럼 기분이 좋지 않을 때에는 무심함이 더 좋았다. 그래서 질문에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나중에 보면 안 될까?”
“바쁜 서류는 아닙니다.
책상 위에 서류를 내려놓더니 방금 전에 뽑아놓은 커피를 내밀었다. 울적한 기분을 알기라도 한 듯 초콜릿 하나까지 준비해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미소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그럼 필요하실 때 부르세요.”
미현이 나가고 홀로 남은 선민은 커피를 창틀에 올려놓은 뒤 살짝 눈을 감았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휘경과의 결혼 생활은 몇 달이 모자란 7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은 7년이란 세월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한 여자와 맺은 결혼이라는 언약은 쇠사슬이었고,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창살 안에 갇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면서, 언젠가는 자유가 자신의 손안에 떨어질 날을 고대하며 힘들었던 세월을 힘겹게 버텨낼 수 있었다. 마음은 당장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라 재촉하고 있었지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었다.
물론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온몸이 쇠사슬에 묶여 있다 풀려난 것처럼 개운하기는 한데 마음은 생각했던 만큼 편하지 않았다. 하나가 둘이 되었고 둘이 셋이 되어 가정을 이루며 살아온 7년이 어제부로 몇 장의 종이와 사인으로 남이 되어버렸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 들였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 간단했고 쉬웠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로 인해 가슴이 아팠다.
“당신, 후회 안 할 자신 있나요?”
어제 모든 것을 정리하며 묻던 휘경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자신의 삶에 웃음을 주었던 희성을 생각하자 답변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 여자한테 갈 건가요?”
휘경의 질문에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선민은 몸 안의 모든 신경이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컵에서 손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몸의 신경을 최대한 편하게 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 여자라니?”
“송진아!”
휘경의 입에서 이름을 듣는 순간, 누군가 목을 죄다 손을 놓아버린 것처럼 맥이 탁 풀렸다. 진아와 헤어진 뒤 단 한 번도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비밀 금고처럼 가슴에 열쇠를 채워놓았고, 얼마 전 선우에게서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조차 내색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런데…… 휘경의 입에서 진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신의 입에 오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너무 사랑하는 여자라서요?”
표독스럽기까지 한 휘경의 목소리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호흡을 한 번 길게 내뿜었을 뿐이었다.
“우리 얘기만 하지.”
“7년 동안 허수아비를 껴안고 산 내 마음을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죠.”
“스스로 그런 삶을 원한 게 아니었나? 난 처음부터 분명히 밝혔어.”
그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휘경이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당신이나 나, 과거에 연연할 정도로 너그러운 사람들 아니잖아.”
“맞아요. 누군가에게 지는 것도 빼앗기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나예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커왔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물을 감추기 위한 행동인지 아니면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휘경의 그런 모습이 몹시 낯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내 자신이 한 번도 모자라다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란 사람과 살면서 나락까지 떨어졌어요.”
“날 원망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짓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는 휘경의 표정에 그 또한 원망이 일었다.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만약 당신이 내 눈에 띄지 않았다면, 아니, 아버지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그런 후회가 나를 괴롭혀요.”
언제나 자신만 피해자라 생각했던 선민은 갑자기 휘경에게 동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를 가진 시은에게 한 행동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당신을 원망했어. 당신이 나를 원망했던 것 이상으로 말이야. 하지만 당신이 한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알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지금도 내가 왜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때는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내 자리를 확고하게 해놓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었어요. 물론 희생양이 시은 씨가 되고 말았지만요.”
한 번도 휘경이 자신의 행동에 잘못했다는 마음을 갖게 될 날이 올 거라 생각하지 않은 까닭에 지금 하는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군.”
“우스울 것 없어요. 나이 30이 넘어가면서 이제야 철이 들어가는 거니까요.”
휘경의 말에 선민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의 입가도 보일 듯 말 듯 살짝 치켜올라갔다.
“이런 말 하는 나도 믿어지지 않는데, 당신이야 오죽하겠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이제야 후회되는 게 너무 많아요. 그중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 미련스럽게 붙잡고 있던 나예요. 그런 내 자신이 이제는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아요.”
마치 속마음을 알아내려는 듯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자 그 자리가 갑자기 몹시 불편해졌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요점만 간단히 얘기하는 게 좋아. 무엇보다 지금 당신의 넋두리 들어줄 만큼 나 한가한 사람 아니라는 것 알잖아.”
휘경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에 편할 줄 알았던 처음 심정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 마주 앉은 자리가 답답해왔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기만 했을 뿐, 실제로 무엇인가를 공유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과거 얘기를 꺼내는 휘경을 보며 펼치고 있던 손을 천천히 모아 쥐었다.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군요. 가끔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깨지지 않을까. 사람 냄새를 풍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며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보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알았다는 듯 그녀의 입가에 씁쓸함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그런 휘경의 표정을 보니 괜히 자신이 휘경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두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서로의 연결 고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힐끔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보며 휘경이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 붙잡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휘경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자존심 역시 강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휘경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붙잡는 게 부담이 되었다.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상치 않은 말에 놀란 듯 휘경의 눈가에 살짝 잔주름이 가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긴장되는데요.”
“그렇게 조롱하지 않아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그래요?”
믿어지지 않는 듯 곱게 색을 입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행동이라 그런지 그의 시선은 그 모습에 못 박혀 있었다.
“보지 말아요. 그보다 당신이 묻고 싶은 게 뭐예요.”
“지금껏 당신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기고 지는 것 말고 정말 원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해.”
그녀는 무슨 의도로 묻는지 알아보려는 듯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더니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왜요?”
“그냥.”
“당신이 그런 질문을 하다니 조금 의외네요. 이런 날이 올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것 같아요. 이혼하기 전에 그런 마음을 가져주었더라면 훨씬 인간적으로 보였을 거예요.”
“내게 사과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한번쯤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면 좋잖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휘경의 성격에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우스웠는지 그녀는 피식 웃는 소리를 내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뜨거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는 점이에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평범한 가정주부이기도 하고요. 설마, 날 인간으로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죠.”
한 번도 휘경의 감정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7년이 다 되어가도록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적당한 선을 유지했고 그 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그렇다고 지금 와서 새삼스레 휘경에게 감정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 없는 그를 보며 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당신의 그 솔직함이 너무 싫을 때가 있어요. 그 때문에 당신을 포기하는 게 지금은 쉬워요.”
“그래. 우리 이쯤에서 끝내자.”
일어서려는데 가냘픈 손이 그를 붙잡았다. 할 말이 있는 듯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이었다.
“정말 단 한 번도 날 여자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당신은 아름다운 여자야. 그리고 우리는 단지 잘못 엮였을 뿐이야. 아마, 그녀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이내 말문을 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와서 과거의 것들을 얘기해보았자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이 내게 질문을 던졌으니까 나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목이 마른지 물잔을 입으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눈빛 또한 지금까지 보아 온 것과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결혼해 살면서 그 여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나요?”
“한 번도.”
망설임 없는 자신의 답변에 놀라 커다랗게 치켜뜬 눈동자에 의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말?”
“날 그렇게 모르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백을 집어 들었다.
“당신,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알아요.”
“알아. 그녀를 내 심장에 묻었던 날부터 그녀에 대한 자격을 상실한 나야. 너와 결혼한 순간부터 맹세했어. 나로 인해 두 번 다시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하루에도 수만 번 그녀에게 달려가려는 심장을 부여잡기 위해 칼로 나 자신을 후벼팠어. 고통이 커지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으니까.”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휘청거리는 휘경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보았다.
“독한 사람.”
억눌린 듯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휘경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선민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